2015.05.02 02:16

이 웃픈 현실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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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1 - 이 웃픈 현실에 고함


우리 시대는 ‘이데올로기’(Ideology; 이념)가 아니라 ‘이코노미’(Economy; 경제)가 지배하는 시대라 한다. 원래 경제의 주도권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나온 것이 이데올로기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 독점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정당화하는데 이데올로기가 앞장서 왔다. 그러나 점차 경제의 주도권이 강력해 지면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버리자 이 경제 앞에서는 정치, 문화, 과학, 외교, 사회, 심지어 종교마저도 맥을 못 추게 된다. 급기야 윤리와 이념은 경제 논리로 옳고 그름이 판가름 되고, 자연적으로 권력은 경제의 주도권을 가진 자가 독점하게 되고, 그런 주도권은 대물림되면서 경제 주도권의 유무에 따라 새로운 신분 사회가 형성돼 가고 있는 형국이다. 원시, 고대, 중세, 근대와 현대의 역사를 움직여 온 것도 핵심엔 ‘경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경제’ 논리 앞에 정의와 윤리가 무기력하게 내팽개쳐 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안타까운 희생이 더 많아지는데도 이것을 바로 잡아줄 희망적 이데올로기가 경제 주도권의 횡포에 도무지 요원하다는 것이다.


시대마다 경제 주도권을 쥐고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은 나름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신화를 통해서 독점하는 경제의 주도권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했고, 중세사회에서는 종교의 힘으로 이를 정당화했으며, 근대에는 이성을 통해 정당화시켰다. 오늘날 이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 후에 모든 것이 경제 그 자체의 유무로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가 대체되어 버렸다. 경제의 부유함이 힘이고, 권력이고, 정의이다. 심지어 선악에 대한 판별 기준도 경제 주도권자에게 공공연하게 결정권이 넘어간다.


그러나 이후에 경제가 주도권을 쥔 채로 진행된 잘못된 전횡의 무자비함은 멈출 수 없이 ‘아노미’(Anomie;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규범이 사라지고 가치관이 붕괴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개인적 불안정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 삶의 가치와 목적의식을 잃고, 심한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지며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현상)로 치달아가고 있다. 인간의 자기 주도권마저도 경제 앞에 스스로 포기하며 내려놓은 지 오래다. 스스로 정화해 갈 능력마저 마비되어 무감각해지고, 지극히 이기적인 계산에 빠르고 암묵적 불의에 동조하면서도 그것을 분별하는 사고조차도 사치로 여기거나 귀찮아하며 아예 생각 자체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버리고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산다.


‘미가’라는 선지자가 구약성경에 나온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둘로 나뉘어 있는 상태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주변 열강 특히 앗수르의 위협 상황에서 발생하는 지배자들과 경제 주도권자들이 쥐고 있는 공권력의 횡포로 피폐해져 가는 사회 속에 정의를 부르짖었던 선지자다. 그가 태어난 ‘모레셋’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전시에는 적이 통과하는 성으로, 평시에는 군인들의 주둔지로서 온갖 부역에 시달리는 곳으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수도나 도시를 위해 희생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도시와 지배자들의 안녕을 위해 가혹하게 희생을 강요당했던 모레셋 주민의 아픔을 직접 보고 겪은 미가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지배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향해 당당하게 잘못을 고하며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해야 살 수 있다고 외친 것이다.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어 그들이 고쳐야 불균형과 문제가 해결되고 사회가 안정될 수 있기에 지배자들을 향한 날 선 예언을 과감하게 공의로 선포했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편에 선 지식인은 결국 권력의 시녀가 된다. 종교도, 법도, 공권력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탄탄하고 합리적인 논리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 해도, 1%의 지배자들을 위한 시녀로 기생하며 자기 안위와 영달에 눈이 멀고 절대 다수의 사람을 착취하는 견(犬)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침묵하는 이도 마찬가지고, 깨닫지 못한 무지로 인해 주어진 권리를 내팽개치는 이들도 결국 지배자들의 도구로 이용되다가 토사구팽당하고 만다. 그런 가운데 끝까지 이 웃픈(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여 자포자기 내지는 자위하며 살아가는 다수의 무지렁이 같은 이들이 늘어만 간다.


이런 시대 속에 현실을 직시하며 깨어 있는 지식인들의 선구자적 외침과 행동이 여전히 요구되는 이유다. 무지하기에 따라갔고, 생각이 고착되어 버려 비인간적 삶의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깨워서 현실을 바로 직시하게 해야 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끝났지만, 무엇보다 끝까지 약자의 편에 서서 더불어 살아야 할 신(新) 이데올로기(?)로 이코노미를 다스리고 아노미를 잠재워 이 술(슬) 푸(프)게 하는 나라에 여전히 기쁘게 살아갈 소망과 이유가 있음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웃는사람 라종렬

광양시민신문 <쉴만한물가>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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