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07 22:33

세금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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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7 - 세금과 혁명


세금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라고 말한다. 기원전 200년 경에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가 군인들의 반발로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며 증표로 남긴 것이 ‘로제타석’이다. ‘프랑스혁명’도 루이 16세가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발생한 것이고,미국 ‘독립전쟁’이 터진 것도 영국의 세금정책에 반발한 ‘보스턴 차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렇게 세금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안타깝게도 반란이나 민란으로 얼룩졌다. 그릇된 세금이 백성들의 저항을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 기록에 세금에 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하는데 밭의 비옥도를 여러 등급으로 나눠 각각 세금을 매긴 것이다. 삼국시대 때 만들어진 이 ‘조(租),용(庸),조(調)’라는 세금제도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농지에 부과한 조(租)는 쌀로 징수했고,호적에 등재된 16~60세의 남자에게 매긴 용(庸)은 노동력으로 거둬갔다. 그리고 조(調)는 특산물로 세금을 내도록 했다. 이 중 세금의 주류는 지금의 소득세와 비슷한 조(租)였다. 19세기까지는 산업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농지에서 대부분의 소득이 발생했기 때문에 농지와 관련된 세금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차 과세 기준이 모호해 지고 결국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에 매기는 세금인 전정(田政)과 군정(軍政),환정(還政)이 부정부패로 얼룩지는 삼정의 문란이 초래됐다. 이런 가운데서 동학혁명을 비롯한 조선시대 민란들도 대부분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징세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일어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금은 국가의 살림살이와 복지에 없어서는 안될 기초다. 함께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동의 살림살이를 위한 비용이 들게 마련이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 속에서 소득의 고저에 따라서 적절한 조세가 이루어질 때 그 사회와 국가는 건강하게 유지 발전해 갈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조세 정의가 어그러지면 반드시 어느 한켠에서는 유한한 자원으로 인한 고통과 결핍이 수반되기 때문에 조세 제도는 발의와 시행 그리고 집행까지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나 그것을 집행하는 정부는 욕심 내지 않고 정의를 이루어가야 한다. 한 가정의 살림살이나 작은 사업장 그리고 기관들 모두 회비나 소득으로 살림살이를 해갈 때도 마찬가지다.

최근 불만이 커지고 있는 조세정책을 살펴보면 분명 정의가 무너진 것이 뻔히 보인다. 서민의 세금들은 탈탈 털고, 기름 짜내듯 뺏어가다시피 하는데 정작 더 많이 벌고 가진 이들은 그 반대로 배가 더 불려지고 있는 형국이다. 거기다가 그렇게 거둬간 세금은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처럼 사라진다. 구성원들은 죽겠다 하는데 블랙홀같은 기업을 살린답시고 내몰라라 하고, 전 정권에서 떠 안은 눈덩이같은 빚과 여러 실정들로 인해 고갈된 통장을 보며 한숨이 깊어진 것은 사실이다. 거기다가 지지율까지 떨어져 가는 형국이니 뭘 하더라도 조세저항이 만만치 않다. 이러한 조짐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는 형국이다. 그러면서 OECD 최하위 복지 수준이면서도 복지 과잉이라는 터무니 없는 말로 호도하는 말이 나온다. 한마디로 국민을 졸로 보거나 노예로 보지 않고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작금의 형국의 근본적인 원인은 권력과 자본을 쥔 이들의 탐욕 때문으로 보인다. 어디 그 욕망이 만족함이 있었던가? 자고로 단기부양책으로는 전쟁이나 대규모 건축이 최고였다. 현대의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페르시아만 전쟁 등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의 경제학자들은 옛날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축조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들도 일종의 경기부양책이었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기부양책으로 이익을 보는 이보다 피해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경기부양책이라는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경기부양책인지도 분명해 진다.

오늘날은 생산과 공급의 부족보다 소비력이나 의욕 상실 내지는 분배의 불균형이 더 문제다. 그렇다면 단기 부양책으로 생산을 더 늘리고, 그런 기업을 위한 일이 아니라 살림살이들이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예전처럼 검소하게 살고 절약하며 금 모으기 해서 살릴 수 없는 형국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살아야 하고, 살려야 하기에 몸부림 쳐야 한다. 그런 몸부림이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웃는사람 라종렬

광양시민신문 '쉴만한물가' 칼럼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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