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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6:14-29 제자의 길(마 14:1-12; 눅 9:7-9; 참조. 눅 3:19-20)

*

복음 곧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자 헤롯 왕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줄 알고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와, 옛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깁니다. 자신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에 대하여 옳지 못하다 한 요한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생일에 춤을 춘 헤로디아의 딸의 소원을 빙자하여 처형합니다. 

*

# 전체

예수님께서 제자를 파송하시고 난 이후부터 왕의 대리자인 제자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가하고 또 권능을 위임받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예수 그리스의 이름이 늘어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왕의 시대가 되었다라고 하는 그런 선언과도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해롯은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현재 분봉왕으로서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데, 오래전부터 소문으로 들어왔던 자가 이전의 왕의 시대에 태어났던 그런 왕이 이제 드디어 등극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이러한 두려움, 그리고 그가 이전에 행했던 일들 때문에 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았던 헤롯왕이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 진짜 왕이 나타났다는 소식인데 당연히 가짜 왕은 이것이 달갑지 않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세례 요한이 눈엣가시로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의 억울한 죽음, 로마식 처형 방식, 주변의 강압에  따른 사형 결정, 매장 등은 예수님의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이 즈음에 등장하는 헤롯왕의 이야기는 복음 곧 진짜 왕과 가짜 왕의 대조로서 백성에게 생명을 주고 살리는 진짜 왕에 비해, 백성을 죽이고 불의한 가짜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은 향후 예수님이 가실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암시해 주고 있고 또한 제자들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황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나서 그 사이에 들어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내일 말씀 서두에 보면 제자들이 파손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나서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전형적으로 마가복음에서 많이 쓰고 있는 샌드위치의 구조로 보면 세례 요한의 이야기도 제자들이 파송된 제자 파송과 연관되는 그러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안타깝고 또 두렵고 떨리고 비장한 이야기 같지만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제자의 길에 대해 조금 더 심사숙고해야 되고,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이 길을 걸어가야 된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금 강조해서 말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실패자처럼 보이기가지 합니다.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것도 그렇고, 헤로디아는 헤롯의 두 번째 아내인데 자기 형의 딸이고, 자기 동생의 아내인데 자기가 차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연회장에서 춤을 춥니다. 세례 요한은 이 상황 가운데 죽게 됩니다. 예수님도 33세에 돌아가셨고 또 세례 요한도 이렇게 젋은 나이에 죽었고, 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도 사실 역사에 보면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거나, 많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순교를 당했었고, 심지어 마지막에 사도 요한도 반모섬에서 오랜 나이에 감옥 생활하다가 죽게 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다 실패한 실패자처럼 보이는 그러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일관되게 이러한 모든 제자들이 우리에게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가운데서도 그러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평안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합니다. 이런 말씀을 전했던 제자들이 살았던 길을 보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는데 세상적 관점에서 마냥 성공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아마도 세상은  그렇게 평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걸어가야 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우리는 지금 걸어가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제자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님 때문에 평안하고, 주님으로 인하해서 기뻐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만족한 그러한 삶을, 그래서 가장 영광된 삶을 살았다라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지금 현재 내가 기뻐하고 내가 평안하다 내가 감사하다라고 하는 삶의 고백과, 지금 제자들이 핍박과 혼란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감사한 내용이 과연 같은가 대조해서 봐야 됩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걸어갔던 그러한 길이 아닌 다른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원천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하나님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도 되짚어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됐건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파송하면서 왕의 대언자로서 귀신을 내어쫓고 치유하고 천국복음과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는 상황 가운데서, 여전이 오늘 세례 요한처럼 충성되게 길을 걸어가지만 요절할 수도 있는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 있고, 또 세상의 관점에서 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으로서 보면 영광되고 복된 길이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헤롯이 지금 예수님께서 이름이 드러나자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가 이전에 세례 요한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많은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들을 느끼는 그런 일들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헤롯은 어떤 사람입니까? 헤롯 가문에서 왕이 되었을 때 유대인이면서도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갖지 못해서 어떻게든 민심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위해서 로마에 충성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또한 집안의 권력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 동족상잔의 비극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동생의 아내마저도 빼앗아 올 정도로 패륜적인 그러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바로 헤롯 가문의 왕들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롯왕의 동생 빌립의 아내였다가 또다시 헤롯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헤로디아는 자의든 타의든 자기가 원하는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남편도 이용하고 남편도 쉽게 바꿀 수 있었고, 또 심지어 자기 딸인 자녀마저도 이용해 먹을 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신앙마저도 이용하고 있는 무서운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한편 요한을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또 요한에 대해서 좋게 생각합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다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또 그를 잘못 처리했을 때 자기가 그토록 얻고 싶어했던 민심의 동요가 일어날까 봐 함부로 처형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핑계하기 좋게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며 요한을 잡아 목에 가두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일에 대해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아무도 비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레요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한 사실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한 겁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헤롯은 자신을 비판하는 그런 소리에 대해서 민감하게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어야 되는데 오히려 그러한 세례요한을 좋게 생각하면서도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좋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또 양심과, 아내의 등쌀 여기서는 여자를 위해서 잡았다고 했으니 아마 헤로디아의 성화에 못이겨 요한을 잡아서 옥에 가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황에 못이겨 가두긴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존중하고 있는 면도 있고 군중의 동요를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 요한에 이어 예수님에 대해서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옛선지자 중의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세례 요완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헤로디아처럼 우리가 얻는 탐욕을 위해서 신앙도 자녀도 모든 사람도 이웃의 관계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하는 것도 다시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20절 말씀입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감옥에 가둬놓긴 했지만 아마도 세례 요한을 불러서 가끔 설교를 듣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진보하지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놀라우신 기적과 또 가르침을 듣고 놀란 무리들과도 비슷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에 대해서 놀람으로 반응하고 뭔가 다른 것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더 나가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늘 좋은 말씀을 듣는 데는 익숙한데 그 자리에서 그것을 그냥 해소하고 끝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듣기 좋은 말씀 자기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자세, 때로는 싫지만 이런 얘기 정도는 내가 들어줘야 된다라고 하는 딱 그 정도로만 놀라고, 설교와 말씀을 어떤 교양으로 생각하고 삶의 변화나 성숙과 열매는 없는 모습은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러한 삶의 모습 이것이 바로 헤롯왕과 같은 신앙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례 요한과 같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을 옆에 두고서도, 또 그의 설교를 듣고서도 그는 변화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이러한 신앙으로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신앙은 자기가 불편하지 않을 때까지만 순종하고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실천하고 그리고 언제든지 죄의 가능성들을 두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모든 것을 돌이키고 버리고 끊고 결단하는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여서 말씀을 따라 온 몸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상황이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못하고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이러한 신앙도 진정한 회개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이 어떻게 죽게 됩니까? 어느 날 잔치를 하는데 헤롯이 자기 생일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합니다. 화려하게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서 잔치를 하고 있는 그런 상황인데,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옵니다. 아마 어머니가 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춤을 춥니다. 이 춤을 이제 역사에 의하면 굉장히 매력적이고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그러한 춤인 것 같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해 헤로디아의 춤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딸을 사람들 앞에서 그러한 매력을 드러내게 하는 이런 몰염치하고 또 패륜적인 행위,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자식마저도 이용하며 웃고 있는 이러한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결코 우리와 멀지 않은 듯 합니다.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자녀들을 학원에 내몰고 있는 그런 상황도 재고해 봐야 합니다. 겉으로는 자녀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속을 들여다 보면은 결국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도구로 자녀들을 내몰고 있는 그런 상황과도 비슷합니다. 

이제 헤롯왕이 그러한 모습에 마음이 혹합니다. 그래서 허황된 그 세치혀를 휘둘러 함부로 약속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기를 보낸 어머니에게 가서 아마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면 왕이 이런 약속을 해주리라고 하는 그런 예상까지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헤로디아의 딸이 살로메인데 이 살로메가 어머니에게 쪼르르 가서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대번에 그간 벼르고 있었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합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했으니까 많은 대신들 앞에서 왕이 했던 세치 혀의 말에 대해서 말을 바꿀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살로메는 왕에게 들어가서 이 사실을 요구합니다. 

세례요한은 물론 이미 왕의 궁전에 들어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 자체가 죽음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걸어가면 늘 이렇게 성공하고 잘 되고 뭐든지 말씀에 순종하면 만사형통한 순탄한 세상 일들을 보장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면서 풍랑을 만났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결코 제자의 길이 순탄하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전해주고 모든 일이 잘 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뭔가를 더 얻고 부요케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자의 길를 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26절 말씀에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함께한 이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핑계합니다. 양심의 법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그는 사람들의 관심과 평가 그리고 자신이 이미 맹세하는 것을 어기지 못하는 그것이 불의한 일이면 용서는 구하고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가 반복되는 범죄를 알면서도 행하는 그러한 습관적인 죄를 이제는 우리도 멈춰야 할 것입니다. 또 헤롯처럼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그러한 말씀은 없습니까? 우리가 듣기 좋고 편한 것만 듣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냥 버리는 이러한 형식적인 묵상을 하고 있진 않습니다. 가족도 선지자도 자신의 자녀도 탐욕의 수단으로 삼는 그러한 삶을 그대로 지금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면서 욕망의 종노릇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왕이면서도 종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자의 길이 어떠한 길입니까? 복음에 순종하고 전도하는 일이 항상 승리하는 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길을 걸어갔지만 가시밭길 고난길 광야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길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께 나와서 간구하며 그토록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제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까? 그런다고 한다면, 일찌감치 제자의 길을 걸을 수도 없을 뿐더러, 신앙마저도 이용해 먹는 그러한 사람과 같이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
오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더불어서 해롯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들을 점검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끊어버리고 온전한 신앙으로 그리고 마음에 굳은 결심으로 이 제자의 길이 걸어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아침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신앙마저도 우리의 탐욕을 이루는 도구로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족마저도 자식마저도 우리의 탐욕을 이루는 도구로 지금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 양심의 보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로 반응하고 열매 맺는 신앙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주의 말씀을 걸러서 듣고 

우리 입에 달게 여기는 것만 삼키는 것이 아니라 

쓰든지 달든지 그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가감 없이 듣고 순종하고 믿으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이 용기 있는 믿음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세상에서의 영광을 바라며 나가지 않게 도와주시고 

날마다 묵묵히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끝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용기 있는 믿음, 인내하는 믿음 허락하여 주옵소서 

늘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기꺼이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든 믿음의 가족들 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의 길을 결단하고 숙고하고 

그리고 용기를 구하여서 여전히 이 길을 달려갈 수 있는 

그런 믿음을 덧입혀 주옵소서. 

모든 가족들이 묵상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케 도와주시고 

각자의 삶을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병중에 있는 귀한 믿음의 가족들을 붙잡아 주시고 늘 감사하며 

주의 뜻을 따라서 정말로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든 연약한 자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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