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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4:22-29 신명기 법전, 십일조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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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 합니다. 만일 택하신 곳에서 너무 멸고 행로가 어려우면, 돈으로 바꿔와서 마음에 원하는 것을 사서 구하고 권속이 함께 먹으며 성읍에 거주하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챙기라 합니다. 매 삼년에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과 더불어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먹게 했고, 그리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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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7절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며,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마땅히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의 소산을 허락하신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 드리고 이를 함께 먹으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택하신 곳이 너무 먼 곳에서는 돈으로 바꿔와서 마음에 원하는 것을 사서 구하고 여호와 앞에서 권속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 합니다. 특히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분깃과 기업이 없기에 이들을 챙기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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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드리는 시기가 토지 소산이 생길 때와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이 있을 때로 보이는데 아마도 일년에 한 두 차례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중앙 성소에 와서 드리며 함께 먹는 것은 축제를 함께 병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레위기의 십일조는 보통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일하는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는 레위인과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레위인에게 돌아가는 몫에서 레위인들이 드리는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먹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제사장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십일조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십일조를 먹을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앞서 음식 규례에서도 레위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 전의 규정이라면, 신명기는 거룩한 백성이기에 구별해서 먹어야 한다고 했듯이, 십일조를 일반 백성들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제사장의 혜택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이 누리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발전되면서 왕같은 제사장의 도식이 이미 구약에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미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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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드리며 함께 먹고 축제를 갖는 것은 이 모든 소산들이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이를 먹고 마시면서 여호와의 은혜를 기억하게 했고,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으면서 초태생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동시에 이를 함께 먹으면서 자신들의 주권 또한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뭇 백성들이 드려진 이 많은 십일조가 며칠 만에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이 십일조는 축제보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 모두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제사장들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도록 지도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 사이에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고 지속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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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29절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섬길 때 복주시는 분이십니다. 

매 삼년 끝에 드리는 십일조는 성읍에 저축하여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먹도록 했습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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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종류가 세 가지처럼 보입니다. 1) 레위인에게 주는 모든 소출의 십일조(민 18:21; 참고. 레 27:30-32), 2) 성소에 가지고 올라가 가족들이(종을 포함) 레위인들을 초대해서 함께 즐거워하며 먹는 십일조(신 14:22-27; 참고 신 12:17-19), 3) 매 3년의 십일조로 3년마다 각 성의 가난한 자, 고아, 그리고 과부 및 레위인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거워하는 십일조(신 26:12-13)가 그것입니다. 이는 전통적인 랍비들의 주장입니다. 

십일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1) 제1 십일조: 레위인을 위해 성전에 바친 십일조(레 27장; 민 18장), 2) 제2 십일조: 잔치와 축제를 위한 십일조(신 12장)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십일조가 매 삼년으로 가서 한번 더 드리는 것으로 보여 십의 이조나 그 이상까지 드리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첫째, 성전에 소득의 2/10의 헌금 비율은 지나치게 높아 보입니다. 왕실에 내는 국가 세금은 별도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치는 자가 가족 및 사람들과 그것을 모두 먹기 위해 매년 성전에 올라가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이렇게 모두 함께 삼년만에 가서 막대한 양의 십일조를 며칠 만에 다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조리에 쓰는 감람유를 한꺼번에 다 소비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가 토지 소산 뿐 아니라 가축의 첫 새끼도 끌고 올라와서 다 먹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년 드리는 십일조와 삼년 째에 드리는 십일조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래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다른 종류의 십일조가 아니라 같은 십일조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일 이렇게 십일조를 드려서 매년, 매 삼년 모두 다 먹어버렸다면 나머지 기간에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년 드리는 십일조든, 3년째에 드리는 십일조든 그것을 레위인과 제사장을 넘어서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들까지 생계와 구제의 폭을 넓혀서 성중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함께 살려서 정의를 실현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매년 토지와 여타 소산의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드려진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 경외를 가르치는 분깃과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일들의 구제를 위해서 사용되므로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진 공동체와 세상으로 만들어 가려는 데 필요한 중요한 도구요 시금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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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에 맞게 적용되었는데, 율법적으로 모두 드려야 한다는 것은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십일조가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갔다는 것과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 이외에 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십일조는 종교세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을 좁쌀하나까지 세어서 율법적으로 드리는 것보다 공동체의 공평과 정의를 위해서 힘에 더하도록 섬기는 일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이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이를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기 믿음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행해져야합니다. 그런데 마치 이것을 안하면 저주가 임한다는 등의 협박이나 강요에 의해서 바치도록 하는 것은 조금 과한 표현으로 갈취와 강도행위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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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기 십일조?

말라기(3:10)에 나온 십일조를 여기 신명기와 평면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말라기 당시의 상황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않았고, 성전은 방치되어 허물어지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먹고 살 길이 없어 도망가거나 다른 일을 하는 상황에서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야 레위인이 생계가 보장되고 성전도 제대로 운영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바벨론에서 돌아와 회복된 공동체의 중심이고, 이 성전이 올바르고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 공동체가 바로 세워질 수 있기에 이를 위한 십일조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말할 것이지, 율법적으로 복 받으려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십일조를 내야 레위인이 먹고 살고 그렇게 성전이 회복되어서 예배가 회복되고 축복하면 복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레위인의 역할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의 축복 임하도록 일하는 중보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없으면 누가 복을 빌어주지 않기에 복이 차단됩니다. 그래서 레위인이 정상적으로 임무하도록 이스라엘 공동체는 도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당시는 레위인은 취약계층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십일조는 너무 잘해서 세계에서 한국교회만큼 부유한 교회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태반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긍정적, 부정적 영향이 많습니다. 십일조 제도는 초창기 신앙의 선배들이 잘 정착시켜 한국교회에서는 성도의 당연한 의무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것을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협해서 축복을 받으려면 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안내면 저주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까지 하며 협박하는 것은 위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인간을 저주하기를 기뻐하시겠습니까?

신명기 15:29에 복과 십일조가 연관되어 있지만 단순하게 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복 주시는 길은 다양한데 왜 꼭 십일조로만 말하는가 입니다. 십일조는 복 주시는 여러가지 일중에 하나로 봐야 합니다. 

도한 십일조는 청지기 의식의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왜 하느냐를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 내 것도 내 생명도 자녀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개념으로 고백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드리는 여부로 저주 여부가 결정된다고 하는 것은 율법적 요소요 왜곡된 강요행위입니다. 

결국 십일조는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잘 가르쳐, 신앙과 교회의 재정이 바로 세워지도록, 이웃봉사와 선교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교회 안의 사역자들을 지원하는 등으로 바로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재정이 바른 용도로 사용되도록 하고 잘못된 용도로 횡령하는 일이 없도록 재정을 투명하고 바르게 운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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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할까?

오늘날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냐에 대한 논쟁들이 많습니다. 성전이 무너졌기에 이제 그 안에서 일하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전에 성전의 기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이 이전의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전임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생계와 교회 공동체의 운영 유지를 위해서는 당연히 비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구제와 선교하는 일에도 필요한 재정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영 유지 선교 구제 및 여타 교회가 하는 일에 필요한 재정들이 구성원들의 부담으로 채워져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구성원들이 어느정도를 부담해야 적절한가 했을 때 십분의 일정도로 기준을 정하고 이도 본인의 처지와 믿음의 분량을 따라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이며, 주님이 허락하신 것들을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로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부담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감당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를 복을 받는 거래적 개념으로,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것은 긍정적 결과보다 부정적 영향이 더 크기 때문에 재고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드려진 재정에 대한 집행이나 운영도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하고, 참으로 운영 유지 및 선교와 구제등에 건강하게 사용하되 과하게 남지 않도록, 그리고 모자라서 전임 사역자가 생계 유지를 위해 영적 관리가 소홀함이 없도록 세밀하게 살펴 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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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모든 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소득과 

허락하신 자녀들과 소유들을

허락하시고 부으시고 맡기신 분은

우리 주님이신 줄 믿고,

이 모든 것들을 청지기의 마음으로

관리 사용 누리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소유에 대한 주권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있는대로 자족할 줄 알고

부족함 속에서도 주님의 인도를 믿으며

많든 적든 이기적 사용에서 벗어나

제사장 나라로서 축복의 통로로서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데

인색하지 않게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이러한 드림과 나눔과 섬김을

즐거이 감당하게 하옵시며

주님이 주신 것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잘 누릴 수 있는 믿음도 주옵소서. 

지금 우리 가운데 연약한 이들을 향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외면치 않게

우리 마음에 긍휼의 마음을 허락해 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아낌없이 우리 것을 나눠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셔서 내게 있는 것으로 

즐거이 섬기게 하옵소서.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의의 백성, 선한 일에 열심인 성도로 살게 하옵시며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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