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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1:18-12:06 예레미야의 고백 1 ; 악인의 형통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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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한 내용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현실을 접하고 탄식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실 것에 대해서 재확인합니다. 예레미야는 부당한 현실이 지속되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질문하는데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계속 악에 맞설 것을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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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의 고백” 다섯 군데 - 11:18~12:6; 15:10~21; 17:14~18; 18:18~23; 20:7~18 : 

예레미야의 고백은 당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고향(아나돗)에서 마저도 배척당할 만큼 당시 사회의 뿌리를 흔드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예언을 계속하는 가운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보호와 함께하심에 대한 약속이 이어지지만, 많은 곤경과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수년 동안 살며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기도와 부르짖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내용들이 “예레미야의 고백”이라 불립니다. 이  고백들은 예레미야의 말이지만 그의 인격과 선포하는 내용들을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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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0절 정의를 외치는 여정에는 저항과 고난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통해서 대적들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적들은 예레미야를 해하여 그의 이름이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도록 박멸하려 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께 호소하며 자신의 처지를 여호와께 의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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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겨서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제의의 헛됨을 지적하고, 제의적으로만 화려할 뿐 실제 삶과 사회 속에서는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고발하는 예레미야의 말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의 지도자와 백성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자신들의 신앙과 정통 그리고 삶에 있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제의 그리고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모든 언행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근간을 뒤흔드는 예언이었기에 자신들을 돌아보고 참된 여호와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예언자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끌어다가 나무와 열매 곧 예레미야의 모든 행적들과 말을 흔적도 없이 제거해 버리려는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여호와께서 예레미야가 알게 하신 것입니다. 공의로 판단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 하시는 여호와께 예레미야는 자신의 원통함을 의뢰하고 여호와께서 심판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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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는 바른 말씀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길과 지식과 모든 언행들이 여호와 앞에 바른 지 돌아봅니다. 하지만 악인은 바른 말씀을 듣게 되면 자신이 굽어진 것을 보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신을 깨우고 비뚤어진 것을 가리기 위해서 바른 말씀을 없애는 방편을 택합니다. 수많은 독재자와 권력을 가진이들이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일을 자행해서 많은 의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운 사실을 알고도 의인들은 정의를 외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런 이들의 외침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굽어진 것들을 바르게 하는 일들을 함께 이루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이루어 가는 일들을 진행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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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여정, 말씀의 여정, 하나님나라의 역사에는 자신이 주인이고 헛된 것들의 종노릇하는 굽어진 것들의 저항과 득세함을 통하여 고난의 현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한 저항 앞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올곧게 갈 수 있는 용기있는 믿음을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 혹여 마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현장에서 주를 부인하며 정의를 외면하는 일이 없길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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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20절 ‘그들에 대한 주의 보복을 보리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레미야서에는 보복의 요청이 다른 선지자들보다 많습니다. 이것은 사법정의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고발할 때 누가 죄인인가에 대한 판단을 고대세계에서는 간단하게 한 사람이 죄인이면 다른 사람은 죄인이 아닌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보복해 달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고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보복’이라는 단어를 선지서에서뿐 아니라 시편에도 등장합니다. 결국 이렇게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죄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복주는 긍휼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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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3절 정의를 외치는 자의 입을 막는 이는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벌하는 날에 철저하게 재앙을 내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을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아나돗 사람들이 행하려는 음모를 알고 계셨으며 그것을 예레미야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이유는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고 신명기 율법(신 13:1-15)에 따라 그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 근거는 본문에서 말하고 있진 않지만 고향 사람들이 이토록 분노한 이유가 우선 예레미야의 예언이 지방 제사장들의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요시야 왕의 성전 중심의 개혁을 지지하므로)이거나 또 다른 정치적인 어려움을 가져온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은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레미야는 계속 저주를 선포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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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대한 심판은 전쟁의 상황에서 재앙으로 곧 젊은이들은 전쟁에 나가서 칼에 죽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전쟁으로 황해진 상황에서 어린 아이들은 기근으로 굶어 죽을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자행한 이들을 여호와께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징벌은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는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전 587년 유다의 멸망을 예고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 참고로 포로에서 돌아오는 귀환민들의 명단에는(에스라 2:23; 느헤미야 7:27) 128명의 아나돗 사람들이 유배에서 돌아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들은 심판의 철저성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이를 문맥과 문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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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한계와, 자신들의 변질된 신앙의 현주소를 직시하지 못하고 결국 예레미야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고향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일에 열심을 품은 만큼 지금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겸손히 주님을 알아가는 일을 열심으로 행할 수 있으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 앞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겸손함으로 주님을 알아가고 배우는 일에 겸손히 임할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겸손함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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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 악인들이 형통하여 정의가 굽어지는 것 같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의로우심을 고백한 후에 질문합니다. 그것은 지금 악인들이 형통하고 반역한 자들이 평안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급기야 그들을 주께서 심어서 이렇게 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그들은 주님께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은 먼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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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11:20에서 여호와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적들의 입이 주께 가까운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은 멀다라는 말을 예레미야가 여호아께 고발 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들이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번영을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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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인과응보적인 상황으로는 악인이 벌을 받고 의인이 상을 받아 잘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한데 오히려 의인들은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악인은 더욱 창대해 져서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은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결국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들 곧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끝에서 악인의 심판과 멸망, 의인의 회복과 소망은 불변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다만 지금의 불의한 현실을 바라볼 때 주님을 소망가운데 신앙하면서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주께 맡기면서 주님이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우리는 오늘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맡기고서 다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한걸음씩 그렇게 조금씩 주의 인도를 따라 갈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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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절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되어 의인이 감당할 고난의 여정이 오래 일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시고, 자신을 보고, 자신의 마음이 주를 향한 것을 주께서 ‘감찰’하신다면  자신이 아니라 대적들에게 벌을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언제까지 그 심판의 날을 기다려야 하는지, 대적들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자신들은 결코 재앙을 보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고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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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대적들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모르고 심판을 지연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이 아직도 악인에까지도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닥치는 고난들을 인내하며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핑계하고 심지어 정의에서 불의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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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들이 계속 득세하니 땅도 채소도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다고 호소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들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적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앞 날에는 관심이 없다고 떠들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급기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하나님이 관심이 없으시니 자신들의 결정권자가 되어서 살아가야 한다고 교만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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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될 때 우리는 영적 긴장을 늦추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정의와 종말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같아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계획들을 부정해 버리는 데까지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지연이 있을 때에는 인내로 경주 해 가면서 그 상황에서 우리가 누리거나 감당하거나 책임과 의무에 대한 부분들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결코 하나님은 심판을 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서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고난의 여정을 잘 감당해 나아가길 기대하고 계신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되는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간절히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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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절 하나님의 공의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고백의 대상입니다. 

예레미야의 탄식과 질문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책망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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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한다면 진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서는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질서가 잡힌 땅(평안한 땅)에서 걱정 없이 지낼 생각만 한다면 맹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요단의 울창한 숲처럼 거칠고 적대적인 환경에서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면한 어려움과 위협은 앞으로 닥칠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정도도 힘들다면 앞으로 더 큰 고난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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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믿는 믿음이 있을 때 그래서 주를 의지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계속 정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공의도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요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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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지금 보호와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대적들의 배반과 박해가 기다릴 뿐입니다. 대적들과 심지어 가족들이 감언이설로 예레미야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흔들림이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앞으로 닥칠 고난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악한 자들의 성공에 직면하여 야훼의 역사의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면 집안 사람들마저 하나같이 대적이 되었을 때 그 좌절과 고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남겨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계획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여호와께서 반드시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시며, 마침내 악인을 심판하고 보복하실 것에 대해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고백의 대상임을 알고 더욱 주님만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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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8-12:6(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 - 묵상도움글

예레미야의 다섯 고백들: 11:18-23+12:1-6; 15:10-21; 17:14-18; 18:18-23; 20:7-13+14-18

자신을 죽이려는 친족들의 음모를 알게 된 예레미야는 야훼께 탄식하며 호소합니다(18-20절). 야훼께서 그의 탄식에 응답하여 당신의 예언자를 죽이려 하는 아나돗 사람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21-23절). [현재의 문맥에 의하면] 자신이 당해야만 하는 부당한 고난의 경험으로부터 예레미야는 의로운 재판관 야훼께 현실에 모순되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해 질문을 던집니다(12:1-2).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성공’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상에서 모든 신앙인들이 경험하는 악의 실체의 신비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 곧 악의 문제에 대한 이론적 사변을 거절하시고 당신의 정의(약속의 말씀)를 믿고 악에 맞설 것을 요구하십니다(5-6절).

18절 “야훼께서 저에게 알려주셔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당신께서 그들의 행실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되돌아보며 탄식합니다. 그는 전반절에서 야훼를 3인칭으로 부르며 그분께서 자신에게 통찰력을 주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셨다고 말합니다. 동사(알다)의 목적어가 나오지 않고 행위의 주체인 ‘야훼’가 맨 앞에 나옵니다. 알게 된 내용보다 이를 알려주신 분께 초점을 맞춘것입니다. 예언자는 몰랐던 사실을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야훼께서 친히 알려주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된 사실의 확실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하나님과 특별한 개인적 관계(보호)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후반절에서 예언자의 눈은 직접 야훼께로 향합니다. 야훼께서 예언자에게 ‘그들의 행위’를 보여주셨습니다. 21절은 ‘그들’이 예언자의 친척들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이 꾸며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예언자는 야훼의 계시를 통하여 적들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보이시다/보여주다’는 예언자의 사적 경험에 계시적 성격을 부여해줍니다(cf. 24:1; 암 7:1, 4, 7).

19절 예언자는 자신을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신뢰하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에 비유합니다(cf. 사 53:7; 렘 51:40; 시 44:23[22]). ‘순한[신뢰하고 있는] 어린 양’은 예언자가 주변사람들의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뢰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하반절은 이들의 음모가 위협이 아니라 예언자의 완전한 절멸(絶滅)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열매’로 번역한 ‘레헴’은 나무의 생장(생명)에 본질적인 수액(樹液)을 가리키기에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생명을 완전히 끊어버리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예언자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를 기억나게 해주는 흔적조차도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예언자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없애버려 그의 이름이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아주 깨끗하게 제거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들의 음모는 예언자와 함께 그가 선포한 말씀들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20절 억울하고도 위험한 상황에 몰린 예언자는 의로우신 재판장 야훼(12:1, 3; 17:10; 시 7:10; 17:3 등등)께 호소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살피시며 의로 판단하시는 만군의 야훼께 자신의 처지를 위임합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원래 ‘콩팥과 심장’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심장’을 판단과 결단을 주관하는 ‘의지의 자리’로, 콩팥을 자주 ‘양심의 자리’로 간주합니다(cf. 12:2). 예언자는 의로우신 야훼께서 자신의 ‘원통함’(송사)에 개입하셔서 불의한 적들에게 복수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cf. 15:15). 음모와 폭력의 위험에 빠진 자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보복’(나캄)은 한풀이 또는 앙갚음과 같이 부당하게 억눌린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과 관련된 법적 용어에 속합니다. 고대 세계의 통속적 사고에 의하면 고난과 재앙은 죄의 결과였기에 어려움을 당하는 자는, 신학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는 자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가해자(加害者)의 징계는 피해자(被害者)의 무죄에 대한 반증(反證)이 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기도자는 자신에게 아무 잘못도 없음을 하나님께서 입증해달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적들에게 복수해주시길 간구했습니다.

21절 예언자의 탄식과 호소(18-20절)가 응답을 받습니다. 야훼께서 예언자의 원통함(송사)에 개입하셔서 박해자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십니다(21-23절). 예언자를 죽이려고 협박하고 음모를 꾸민 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언은 예레미야가 야훼에 의해 보냄을 받은 예언자임 보여줍니다. 예언자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곧 그를 보내신 분에게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예언자는 사자의 전언양식을 두 번 사용하며(21절과 22절) 자신을 박해하는 고향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보복의 요청이 다른 선지자보다 많습니다. 사법정의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서 너가 나를 죄인으로 고발할 때 누가 죄인인지? 고대세계는 간단하게 한 사람이 죄인이면 다른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이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 자들에게 보복해 달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복’이라는 단어를 선지서에서도 시편에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죄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복주는 긍휼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21절은 대적들의 정체와 이들이 예언자를 죽이려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피를 나눈 친족들인 아나돗 사람들이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예레미야를 혈족의 일원으로 보호해주어야 할 자들이 그를 죽이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아마도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고 신명기 율법(신 13:1-15; cf. 슥 13:1-6)에 따라 그를 죽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아나돗 사람이 어떤 근거에서 예레미야의 선포를 거짓으로 평가하고 그를 죽이려 했는지는 본문이 침묵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인 요시야 왕의 개혁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에 생존권을 위협받게 된 지방 제사장들에 속했던 아나돗 사람들이 분개했던 것일까? 예레미야의 심판선포가 아나돗에 어떤 정치적 어려움을 가져왔기 때문일까?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자신의 친족을 거짓 예언자로 죽인다 했을 때는 이유가 없진 않을 것입니다. 이유를 찾기 힘들지만 18-23앞부분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했기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다고 선포했습니다. 인접 문맥을 배경으로 추론해 보면(전후 문맥), 아나돗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멸망을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스스로 언약백성이라 칭하고 있었기에 감히 언약백성에게 저주를 선포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은 선지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자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1장과 연계했을 때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음모의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22절 만군의 야훼께서 당신이 보낸 예언자의 목숨을 노리는 아나돗 사람들에게 멸망을 선포하십니다(22-23절). 젊은이들은 칼에 죽고 아들딸들은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전쟁에 의한 징계를 시사해줍니다. 전쟁에 나간 젊은이들은 적들의 칼에 맞아 죽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은 기근으로 굶주려 죽을 것입니다. 예언자의 생명을 위협한 자들뿐만 아니라 집안의 미래를 담당할 젊은이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징계에 떨어집니다. ‘벌하다’(파카드)은 잘못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법과 정의는 불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자들의 징벌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유린된 당신의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23절 만군의 야훼께서 음모자들을 징계하실 때 한 사람도 그분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모두 재앙에 떨어져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벌할 해’(셔낫트 퍼쿠다[징벌의 해]; cf. 8:10; 10:15; 23:12; 46:21; 48:44; 50:27)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드러내시는 때로, 여기서는 주전 587년의 유다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귀환민들의 명단을 보고하는 에스라 2:23과 느헤미야 7:27에 의하면 128명의 아나돗 사람들이 유배에서 돌아왔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음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철저성들에 대한 문자들을 문맥과 문학적 이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절 앞 단락에서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에게 복수해 주길 하나님께 간구한 예레미야는 이제 하나님을 법정으로 불러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공의(정의)에 답변을 요구합니다. 예언자는 먼저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11:20a)의 의로우심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로움’은 법률적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교제)와 관련된 개념으로 그분의 도우심을 포함합니다. 야훼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45:21). 뒤이어 예언자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관해 그분의 의견을 묻습니다. 그는 최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권위 있는 최종판결을 요구합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경험적 현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의인이 부당하게 핍박을 받으며 궁핍하게 사는 반면에 악한 자들이 부요함과 평안함을 누린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로운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빈말이 아닌가? 불의한 자가 승리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2절 전반절에 기술된 나무의 표상(cf. 11:16; 11:19)은 원래는 야훼와 그의 말씀에 의존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긍정적인 비유에 속합니다(cf. 17:7-8; 시 1:1-3). 예레미야는 이 표상을 역으로 불의한 자들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비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으시자 그들은 뿌리도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배반자들에게 성공과 번영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음은 딴 곳에 두고 오직 입으로만 당신을 섬기는 자들이(cf. 사 29:13) 땅에서 잘 살며, 그들의 자손이 번성합니다.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배반자들을 축복하실 수 있습니까? 정통신학의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인과응보의 원칙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르침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는 불의한 자들의 성공에서 하나님의 관여(허락)를 보며 그분의 연루(連累)를 고발합니다.

3절 현실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정의(결백)에 이의를 제기한 후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판결에 호소합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결과)에 근거해 평가하자면 사역의 열매가 없는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에 속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언자임을 하나님이 입증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 이를 보여주기 위해 첫 단어로 2인칭 독립인칭대명사를 사용합니다 - 자기에게 악함이 없음을 아시리라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결과(열매)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을 살피며 공의로 판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결백)과 자신의 무죄를 결합시킵니다. 입으로만 찾는 자들과 달리 마음으로 찾는 자신이 유죄라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의로운 분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호소하면서 악한 자들의 징계를 간구합니다(3b절). 악한 짓을 하면서도 잘 사는 자들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이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심판을 받은 자들임을 보여달라고 기도합니다. 악인의 멸망은 [부당하게] 고난 당하는 자의 의로움을 입증해주는 사건입니다. 19절과 달리 도살하러 끌려가는 양의 표상이 멸망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구별하다’(카다슈 hi.)는 ‘하나님께서 쓰실 목적으로 따로 떼어놓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예레미야는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구별된 반면에(1:5) 그의 대적자들은 ‘죽을 날을 위하여’(살육의 날) 구별됩니다.

4절 [입으로 경건을 과시하며, 하나님의 정의로 자신의 악행을 포장하는] 악한 자들에게 징벌이 내리길 간구한 예언자는 이제 시선을 사회를 넘어 자연계로 돌립니다. 악한 자들의 악행이 생존의 기초가 되는 자연계마저 재앙에 떨어뜨립니다. 땅이 통곡하고 온 들판의 풀이 말라버린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한 가축과 새들이 죽어갑니다. 극심한 가뭄과 한발로 땅이 저주를 받고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들이 완전히 파괴됩니다(cf. 호 4:1-3). 땅에 사는 자들의 악행(라아)이 모든 피조물의 생존을 위태로운 상태에 빠뜨립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앞날에 관심이 없다고 떠들어대며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하나님은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 자신이 결정권자가 되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종말론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긴장감을 늦춥니다. 그것은 결국 종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계획을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5절 네가 걷는 자들과 함께 달려도 그들이 너를 지치게 하였다면 어떻게 말들과 겨룰 수 있겠느냐? - 사역 : 네가 평화로운 땅에서[만] 안전하게 느낀다면 요단의 울창한 숲에서는 어떻게 하려느냐?

5-6절은 예언자의 탄식에 대한 야훼의 답변입니다. 5절은 지혜문학적 전통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전반절과 후반절은 표현만 달리하면서 동일한 내용을 서술합니다. 걸어가는 자들의 뒤를 따라가기도 힘들어 한다면 질주하는 말들과는 어떻게 겨루어 이길 수 있겠는가?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한다면 진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서는 어떻게 이를 이겨낼 수 하겠느냐? 질서가 잡힌 안전한 곳(‘평안한 땅’)에서 걱정 없이 지낼 생각만 한다면 맹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요단의 울창한 숲처럼 거칠고 적대적인 환경에서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구속적 간섭을 바라며 탄식하는 예레미야에게 위로의 말씀대신에 책망 어린 교훈(가르침)이 주어집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과 위협은 앞으로 닥칠 것들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정도에 그처럼 불만스럽게 탄식한다면 후에 임하게 될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예언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입니다. 하나님께 눈을 떼지 않고 그분만 의지할 때 그분 말씀과 현실 사이의 모순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고백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냉정하게 하나님의 공의를 따지지 말라 합니다. 예언자도 우리도 이해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다. 이 문제에 들어가면 철저하게 사변에 빠지게 됩니다. 시편과 욥기등도 큰 틀에서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발생합니다. 욥이 창조주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지 공의를 깨닫는 것 아닙니다. 자신의 초라함을 인정합니다. 공의는 고백할 내용이지 이해의 차원은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공의 이해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할 수 있게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맡은 자에게 공의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공의에 대한 신뢰가 요청됩니다. 더 큰 어려움이 올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요청합니다.

6절 네 형제들과 네 아버지의 집조차도, 그들조차도 너를 배반하고, 그들조차도 네 뒤에서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해도 그들을 믿지 말아라.(밑줄 강조하는 표현)

내용상 21-23절에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버림받고 완전히 고립될 것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3인칭대명사 ‘그들’과 부사 ‘조차도’(~g 감)를 두 번 사용하면서(‘그들조차도’) 예레미야가 제 집안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들로부터 핍박 당할 것을 강조하여 보여줍니다. 바로 집안 식구들이 그의 대적이 됩니다. 예레미야에게는 보호와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대적들의 배반과 박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기다릴 뿐입니다. “네 뒤에서 크게 외치다”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대적 태도에 속함은 분명합니다. 집안 사람들이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설득시키려 하겠지만 예레미야는 이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6b절). 예레미야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흔들림이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앞으로 닥칠 고난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악한 자들의 성공에 직면하여 야훼의 역사의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면 집안 사람들마저 하나같이 대적이 되었을 때 그 좌절과 고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6b절에 의하면 집안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잘못하고 있다고, 그가 전통에 위배되는 말을 선포하고 있다고, 유다 사회를 무질서에 빠뜨리고 있다고 설득하면서 그를 침묵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과 신탁에만 순종할 것을 예레미야에게 미리 주지시키십니다. 예레미야의 집안이 제사장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고려할 때 그의 반대자들의 논리도 나름대로 신학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교리화된 이스라엘의 제사장적-예언자적 전통에 맞서 ‘자신의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했기에 그의 고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

# 거둠의 기도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악인들을 통해서 오는 고난의 상황을 맞닥뜨릴 때에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정의를 왜곡하고

교만한 모습으로 폭력을 행사 하려 할 때에

주님께 의뢰하면서 그런 이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대적들이 바른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며

위협하고 막으려 할 때

당당하게 끝까지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주관하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날을 고대하면서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뜨는 

지혜와 용기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악인의 득세에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고

이후로 더 큰 고난의 상황이 온다해도 

하나님의 공의는 신비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며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알고

이해보다 주님을 향한 신뢰와 고백

변함없이 갖고 살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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