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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8:18-09:06 무너져 가는 동족을 향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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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을 향한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고 예레미야는 탄식합니다. 백성의 무지한 모습과 여호와의 탄식도 이어지며 통곡합니다. 이 모든 원인은 이스라엘이 탐욕으로 인한 우상숭배와 거짓과 악행을 일삼으면서 여호와 알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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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2 죄악은 질병처럼 치료되지 않으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위로 받을 수 없는 근심으로 마음이 병들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딸 내 백성의 심판(질병) 가운데서도 무지하여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헛된 우상에서 돌이키고 버리지 못하는 완악함이 결국 치료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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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내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만 섬겨야 할 딸, 아름답고 우아하고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함축해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 모습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랑받는 자리가 아닌 심판의 자리,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먼 땅에 있고, 여호와를 찾고 바라봐야 하는데 함께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구원이 있기에 주께로 돌아갔으면 구원이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헛된 우상을 숭배하며 생긴 질병(죄악)을 치료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악화되어 가다가 결국 치료의 시기를 놓쳐 버리고서 탄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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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닌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질병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때로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게 죄는 한꺼번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우리를 병들게하여 무너뜨립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 백성이 조금씩이라도 돌이켜야 했건만 전할 수록 더 멀어지고 강퍅해지고 완악해 지며, 여호와로부터 멀어져 가는 이스라엘의 말로를 바라보는 그 마음이 함께 병들어 가게 됩니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지경을 넘어서버린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무지한 백성, 여호와의 탄식 앞에서 예레미야는 놀라움 속에서 근심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 그리고 이 민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면서 우리가 함께 품어야 할 그런 마음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병들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치료할 지 모르고 표류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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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죄악은 함께 한 이들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줍니다. 

예레미야는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해 주야로 울며 괴로워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간음하고 반역한 무리가 된 내 백성을 떠나고 싶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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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마음과 여호와의 마음이 한가지입니다. 이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외치고 전파하고 경고해도 듣지 않는 완악함으로 괴롭고, 멸망으로 치닫는 그 모습의 말로를 바라보면서 괴롭고, 심판으로 인하여 결국 스스로 선택한 어리석은 행실로 망해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괴로워 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떠나 헛된 우상을 섬기면서 여호와의 왕되심을 거역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풍요 제의에 물들어 음란한 행태로 감사와 찬양을 헛된 것에 돌리며 패역의 길을 가고 있는 이 백성을 보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한 긍휼을 포기할 수 없기에 여호와께서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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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토록 사랑과 은혜로 함께 한 이들에게 보은은 커녕 반역과 외면으로 악행함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완악하고 강퍅한 심령들을 만날 때마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는 공동체를 볼 때마다 이와 같은 상처와 고통이 옵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를 향해 주님께서 이런 아픔을 갖고 계신 죄악을 속히 끊어 버리고 간음과 반역이 아니라 정결한 백성으로, 순종하는 백성으로 서서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삶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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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8-9:1(예언자의 탄식) - 묵상도움글

예언자의 고뇌에 찬 탄식은 4:19-22와 14장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도 자신들이 선포하는 메시지로 인해 내적 고통을 경험하지만 예레미야의 경우는 그 정도에 있어 이들을 압도합니다. 예레미야는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과 완강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유다 백성 사이에서 거듭 견디기 힘든 좌절과 고통에 사로잡힙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의지와 백성의 완고한 불순종은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제동장치가 고장 난 기차와도 같았습니다. 본문에서도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절망적 현실을 고통스럽게 탄식합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겪는 내적 고통을 쏟아내고(18절), 뒤이어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19a)와 하나님의 탄식(19b절)을 인용합니다. 다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불만스럽게 탄식하는 백성의 말을 인용하고(20절) 길게 자신이 경험하는 고뇌를 격정적으로 토로합니다(21-23절[8: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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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락의 구조>

a. 18 예언자의 탄식

b. 19a 백성의 탄식

c. 19b 여호와의 탄식(고발)

b. 20 백성(예언자?)의 탄식

a. 21-9:1 예언자의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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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백성의 탄식(19a절)과 여호와의 탄식(19b절)으로 이뤄집니다. 예언자는 먼저 백성이 도처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재앙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안 계신가? 시온의 왕이 그곳에 아니 계신가?” 하며 탄식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시온에 계신 여호와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듯 당혹감을 토로합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시온 성전에 현존하시기에, 시온의 왕이시기에 예루살렘은 적들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교리체계 안에 가둬놓고, 일방적으로 그분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주시는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의지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전통신학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도움을 기대하지만, 그분의 침묵만 경험할 뿐입니다. 그분은 적이 유다를 침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거절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 백성의 적이 되셔서 이들을 원수들에게 넘겨주십니다.

시온의 왕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백성의 원망에 뒤이어 여호와의 탄식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들로,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는가?” 도와주기 싫어서도,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이 여호와로 하여금 도와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눈앞에 닥친 파국적 재앙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격노하신 여호와께서 이들의 불순종을 징계하시는 사건입니다. 시온에 여호와의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구원과 축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의존하기를 거절하고 우상을 숭배할 때 그분께서 심판자가 되셔서 이들을 징계하십니다. 성전의 존재나 교리가 말씀에의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20절 예언자는 다시 백성의 원망어린 탄식을 인용합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끝났건만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한탄합니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초여름에 밀을 추수하고 늦은 여름에 과일을 따서 말려 저장해 겨울을 대비합니다. 초봄에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여름에 거둬들인 곡물로 지내야 합니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의 처지가 마치 수확한 것 없이 여름을 보내고 굶주림의 겨울을 맞는 농부의 절망적 형편과도 같다고 낙망하며 탄식합니다.

21절 예언자는 백성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멸망을 피할 수 없는 동포의 운명이 예언자를 멸망의 고통에 빠뜨립니다. 유다에 다가오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파국적 멸망이기에 예언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절망합니다.

22절 예언자는 멸망을 벗어날 수 없는 유다의 운명을 중상을 입었지만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에 비유합니다. 예언자의 질문은 형식상 수사의문문이지만, 유다가 여호와에 의해서 상처를 입었기에 실제로는 의사도 유향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적 탄식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처라면 치료받을 수 있지만, 우상숭배를 즐기다가 여호와로부터 심한 매를 맞아 중상을 입었기에 유다의 치료와 회복은 가능성이 없습니다. 길르앗은 치료제로 쓰이는 유향으로 유명했습니다(cf. 창 37:25; 렘 46:11; 겔 27:17).

9:1 운명으로 확정된 유다의 멸망에 예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는 것뿐입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백성의 죽음이기에 아무리 울어도 그 슬픔을 달랠 수 없습니다. 눈물이 메마를 정도로 울었지만 그래도 애통함을 멈출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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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절 죄악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거짓, 진실하지 않음, 악행, 여호와를 알지 못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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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약속의 땅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삶의 내용을 채워가는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여야 했습니다. 세상의 약육강식의 폭력과 헛된 우상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서 분명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진리(말씀)를 가까이 하며 살아갈 때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백성은 이미 이 진리의 말씀, 여호와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서 시류에 영합하여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방식을 따라 욕망의 포로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따르지 않는 죄악된 모습은 결국 공동체 내부에서부터 먼저 파괴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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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향하여 상처를 주고 분열케 하는 거짓의 혀를 놀립니다. 형제를 살리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방과 속임으로 신뢰를 깨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속이면서 진실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렇게 소유를 불려 가는 속이는 기술까지 가르칩니다. 여호와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는 악으로 시작하여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오지도 향하지도 않고 더 멀리 여호와를 떠나는 악으로 행하는 일에 지칠정도입니다. 항상 거짓으로 도배되고 속이는 일에 익숙하다 보니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급기야 진리되신 여호와를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아가는 일도 싫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알량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해지고, 세상에 대하여서도 자신의 경험과 잠시 얻는 성공으로 자만하여져서 마치 여호와가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세상에 대하여 자신만만해 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여호와를 아는 일이나 여호와의 뜻을 아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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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회는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사회이며, 중상모략이 난무하고 거짓이 승리하는 불의의 사회이며, 폭력으로 서로를 착취하는 불법의 사회입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적인 사회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신들의 거짓과 악행에 방해와 걸림이 될 뿐이고, 급기야 심판의 지연으로 현실은 악이 더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예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 끝의 심판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의 악행이 이토록 뻔뻔한 이유는 결국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무지와 미천함과 얕은 신학도 한 몫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져 가는 불신 세상에서 말씀을 맡은 자들은 신용의 사람이 되어가고 신뢰를 쌓아가는 사람이 되어가서 관계를 회복해 가는 삶이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쌓여 갈 때라야 그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음을 믿기에 날마다 주의 말씀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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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9(이스라엘의 속성이 된 거짓과 사기) - 묵상도움글

<9:2-9의 양식에 따른 구조>

9:2-6 책망 어린 탄식(하나님 또는 예레미야)

9:2 탄식

9:3-6 고발

9:7-9 심판의 선언(하나님)

9:7 징계의 선언

9:8 고발

9:9 징계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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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야훼(예레미야)께서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시며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떠나 차라리 광야로 가서 혼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간음과 배반으로 가득 찬 예루살렘의 안락한 방에 누워 편안하게 밤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광야를 여행하는 자들이 유숙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만들어 놓은 불편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실 수 없는 하나님은 가슴을 에는 깊은 번뇌(煩惱)에 빠지십니다. 그분은 당신 백성의 맹목적 거절에 무력감을 느끼기까지 하십니다. 간음과 반역은 자주 우상숭배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다음 절들이 보여주듯이 윤리적 계명의 위반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이스라엘의 불성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연대성도 철저하게 파괴해버립니다.

화자를 예레미야로 이해할 경우 1절은 심판예언자 예레미야의 고뇌와 동포에 대한 연민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무시하는 이스라엘과 모든 관계를 끊고 차라리 혼자서 외딴 곳에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통스럽게 탄식합니다. 바로 앞에 다가온 이스라엘의 멸망을 내다보며 예언자는 이를 막아보려 필사적으로 애를 쓰지만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절망적 현실 앞에서 차라리 도피하고 싶지만, 예언자는 자신이 있을 곳이 광야가 아니라 예루살렘임을 알고 있기에 그러지도 못합니다. 맡겨진 사명에서 도피할 수도, 죽음의 벼랑으로 내달리기만 하는 동포의 파멸적 운명에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예언자에게 좌절과 고통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3절 3-6절에서 하나님 백성의 간음과 반역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하나님(예언자)은 특히 입과 혀에서 나오는 범죄, 거짓과 사기를 고발하십니다. 이들의 혀는 전쟁 무기인 활과 같다(cf. 시 57:4; 63:3-4).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떠난 활이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이들의 혀는 이웃을 향해 거짓의 활을 날려 댑니다. 이들은 진실에는 무기력하지만 거짓에 있어서는 뛰어난 능력과 열심을 발휘합니다. 이들의 거짓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이며 일상적입니다. 악에서 악으로 나다니는 이들에게 악은 선택이 아니라 이들의 삶 자체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들에게 이웃은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유일한 관심사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다’는 ‘인정하다’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cf. 호 4:2; 5:4).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에 이들은 거짓을 진실로 주장합니다.

4절 하나님(예언자)은 사회에 만연된 부패의 심각성을 풍자적으로 고발하십니다. 이웃끼리 서로를 신뢰하며 격의(隔意)없이 지내라고 충고하시는 대신에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4a절)는 당신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사회규범에도 배치되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사회적 가치와 규범의 근원이자 보장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사회가 얼마나 악하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회(공동체)는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사회이며, 중상모략이 난무하고 거짓이 승리하는 불의의 사회이며, 폭력으로 서로를 착취하는 불법의 사회입니다. 한마디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적인 사회입니다.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아콥 야콥)에서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은 야곱(창 25:27-34; 27:1-40)에 대한 암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기꾼 야곱(이스라엘)의 후예답게 모두 사기를 치며 이웃끼리 서로를 헐뜯으며 돌아다닙니다.

5절 앞 절에서 언급한 형제간의 사기를 표현을 달리하며 반복합니다. 서로를 불신하며 험담하는 이들의 거짓은 우연이나 우발적 실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거짓과 악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힘써 노력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웃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를 열심히 연구하며 끊임없이 악을 행합니다. 거짓을 말하도록 제 혀를 가르치며 지치도록 악을 행합니다.- 의도적 불법

6절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는 거짓과 속임수가 이제 이스라엘의 본성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생존을 위해 속이는 것도 나쁘지만 이스라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속이기 위해 삽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생존의 이유이자 목적이 됩니다.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웃을 속이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거짓과 악을 행하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사기꾼의 본성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절함은 차라리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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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죄악과 질병으로 눈물 흘리며

회개와 회복의 길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

주님의 그 마음과 눈물을 기억하여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길에서 돌이켜

다시금 정결하고 진실하며 

주의 통치와 인도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의 죄악의 질병들을 발견하고

속히 그 길에서 떠날 수 있게 하옵소서. 

거짓과 악이 난무하여 

신용사회를 표방하나 불신풍조가 가득한 세상에서

진실의 사람으로 신뢰를 주는 공동체로

거듭나게 하옵시며

이를 위해 진리의 말씀앞에 날마다 나아가기를

즐거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더욱 여호와를 알아가기를 힘쓰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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