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레미야 07:16-29 제물 보다 순종을 원했으나 듣지 않았다

*

예루살렘 성전 밖의 성읍과 거리에서는 백성들의 총체적 우상숭배가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출애굽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보다 여호와의 목소리 듣는 것과 순종의 길로 행하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완악하여 듣지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을 순종하지도 않고 교훈도 받지 않는 민족이라 선포합니다. 

*

# 16-20절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는 유다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이 성읍과 거리에서 총체적으로 행한 하늘 여왕과 다른 신들을 향해 제사하는 것이 여호와의 진노를 일으켰고, 결국 모든 것들이 죽음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

앞선 성전 설교(7:1-15)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진 국가 차원의 타락을 비반했고, 본문은 가정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민간 신앙의 우상숭배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지금 총체적으로 우상숭배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위해서 더이상 중보기도를 해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는 백성과 소통하지 않고 단절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풍요의 신인 하늘의 여왕을 섬기며 땅의 축복과 재앙으로 부터의 보호를 기원한 것입니다. 생사화복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무지한 상태로 헛된 것들을 향해 예배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이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유다는 나라가 망한 후에는 오히려 하늘 여왕에게 예배하지 않아서 재앙과 파괴가 왔다고 오해합니다(44:17-10). 멸망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가 또다시 우상숭배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데서부터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에 적절한 우상이 하늘의 여왕과 또 다른 신들이었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하지 않는 한, 무한하신 공급자이신 주님으로부터의 단절은 결국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는 탐욕으로 하나님 아닌 것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정성을 다해 모으고 모아보지만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회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닌 것들을 듣고 바라보고 예배하는 탐욕의 산물인 우상숭배에서 떠나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으로 만족하는 신앙을 회복하고 참으로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서야 할 자리에 그리고 선한 길로 바르게 행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가정의 주인은 누구이며, 우리 가족들이 추구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또한 우리 가정이 여호와의 목소리 듣기를 즐겨하고, 주님과 즐거이 소통하고 있으며, 하나님 아닌 것을 예배하는 탐욕에서 벗어나 참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잘 알고 있으며, 주님이 호주 되시고 주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어지고, 주님 만을 예배하고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 하는 가정으로 잘 세워져 있나요?

*

# 7:16-20(하나님과 유다 사이의 완전한 단절) - 묵상도움글

여호와께서 직접 예레미야에게 말씀하고 계신 이 단락은 앞 단락의 연속이 아닙니다. 앞 단락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선고하지만 여기서는 ‘심판의 피할 수 없음과 그 철저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심판은 취소될 수 있는 단계를 지나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에 하나님은 먼저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십니다(16절). 멸망의 심판이 유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결정되었기에 백성을 위한 예언자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습니다. 뒤이어 하나님은 앞 단락에서 도덕적 부패와 함께 부분적으로만 언급된 우상숭배를(6b절, 9b절) 유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으로 제시하십니다. 우상숭배는 유다의 일부 사람들에게 국한된 타락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공개적이며 노골적으로 우상을 섬깁니다(17절). 온 가족이 ‘하늘의 여왕(풍요제의-지역마다 다르다 가정 중심 제의의기에 부녀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한다)’에게 제물을 바치고 다른 우상들을 섬기며 여호와의 화를 돋우고 있습니다(18절). 이들의 우상숭배는 기대하였던 생명과 축복대신에 죽음과 저주를 가져다 줍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민족 신인 여호와를 괴롭히지만 결국은 이들 자신이 괴롭힘을 받아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19절). 이들의 수치스런 행위가 이들에게 수치스런 운명을 가져다 줍니다. 우상숭배의 대가로 여호와의 분노와 진노의 불이 이들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을 모두 태워버릴 것입니다(20절).

앞 단락의 성전설교(1-15절)가 국가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유다의 공식적인 종교를 비판한다면, 가정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는 ‘하늘의 여왕’ 제의에 대한 고발은 우상숭배에 물든 민간신앙을 고발합니다. 공식적인 국가종교에서부터 민간신앙에 이르기까지 유다는 우상숭배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cf. 5:4-5).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자발적으로 우상들을 쫓기에 하나님께서 우상들과의 동거를 허락하시거나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갈림길로 내몰리십니다.

‘하늘의 여왕’ 제의 풍요제의에 속하는 ‘하늘의 여왕’ 제의는 아마도 앗수르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던 므낫세(696-642)가 통치할 때 특히 민간신앙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하늘의 여왕’ 제의는 성소와 관련이 없는, 가정을 단위로 하는 사적 성격의 제의에 속한다. 왕들과 고관들도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술을 부었지만(렘 44:17) 일차적으로는 여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44:19) 가정 중심적 제의였습니다. 아이들이 나무를 해오고, 아버지는 불을 지피고 어머니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바칠 과자를 만들었습니다(8:18). (벌거벗은?) 여신이나 별의 모습을 본떠서 과자를 만들거나 또는 과자에 그 모습이나 표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 제의를 통하여 땅의 축복과 재앙으로부터의 보호를 기원하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점령을 전후해서 애굽으로 도망한 유다 사람들은 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하늘의 여왕’ 제의의 폐지에서 찾습니다(44:17-19). 이들은 생명과 풍요와 안전을 보장해주는 ‘하늘의 여왕’을 섬기지 못하게 된 결과로 재앙과 파괴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유다의 멸망은 우상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이 아니라 ‘하늘의 여왕’이 보낸 재난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하늘의 여왕’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하늘의 여왕’ 제의는 폐지되었다가 왕의 사후(609년)에 다시 번창했던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와 불법이 멸망의 원인(예레미야) <> 포로된 자들은 하늘 여왕께 드린 제의를 중단했기에 우리를 벌하신 것이라고 동일한 사건을 놓고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계속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 여왕제의에서 떠나지 않고 적극적 참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건에 대한 분석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배후에 있는 정확한 원인을 찾아야 개선하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

# 21-26절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순종(하는 백성) 곧 언약의 규례를 지키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너희나 먹으라 합니다. 출애굽 하시면서 원래 이런 희생제물을 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씀하시면서 정말로 원하신 것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거룩한 백성으로 여호와께서 명하신 길로 행하는 것을 원하시며 그리하면 함께 하시겠다고(23절 이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했지만, 그들은 순종하지도 듣지도 않고 오히려 더 완악한 마음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거역합니다. 그 이후로 오늘까지 여호와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목이 곧아 조상보다 더 악을 행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함 없는 예배와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선포를 따라 이스라엘이 그토록 열심히 바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니 차라리 너희가 그 제물을 먹으라 합니다. 정말 먹느냐 마느냐, 먹어도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게서 의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보배로운 소유 제사장 나라로 부르셔서 먼저 원하시는 것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명령한 길로 행하는 왕과 백성의 관계를 잘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순종하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할 뿐 아니라 그 얼굴까지 돌려서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를  깨우기 위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순종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악을 행합니다. 

.

애초부터 우리가 여호와께 무엇인가를 해 드린 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무엇이 부족하고, 우리가 드린 것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일만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물, 헌신, 제사, 제물등을 여호와께서 원하시는가? 그런 제의적인 행위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소회된 이들을 향한 긍휼을 베푸는 것이 결국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며,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제의를 강조하다보면 처음에는 여호와를 예배하지만 차츰 제의 자체를 예배하고 급기야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사람을 예배하는 심각한 모습으로 전락합니다. 무엇보다 삶의 자리에서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일은 관심이 없이 제의 자체만 강조하는 생명력 없는 제의만 남을 뿐입니다 

.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서 여호와의 통치를 따라 행하는 길이 복있는 자의 길입니다. 이를 거역하고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로 행한다면 필경 망하는 길입니다. 주께서 보내신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목이 곧은 자가 된다면 조상들보다 더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

# 27-29절 여호와를 거절하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은 필연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귀기울이지도 않고 목이 곧은 백성이 되면 선지자를 통해 어떤 말을 해도 돌이키지도 않고 순종은 더더욱 거리가 멀게 되며, 더 이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는 민족(이방 민족을 지칭하는 이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

신앙은 순간순간 우리 삶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소통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않아 불순종으로 변해버린 이들에게 남은 것은 멸망 뿐입니다. 주님이 포기할 만큼 우린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마음의 관심은 주님 아닌 것으로 가득하고, 우리의 귀는 세상의 소리 청종하는 것에 더 밝고, 우리의 행실은 불순종으로 가득하여, 진리에서 멀고, 그리스도의 향기 없는 삶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나요?

*

# 7:21-29(제사보다 말씀의 순종) - 묵상도움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는 21-29절은 먼저 화자와 문체에 따라 21-28절과 29절로 나눠집니다. 산문으로 된 21-28절은 다시 청자에 따라 21-25절과 26-28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1-25절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너희’로 부르며 출애굽 이후의 지속적인 배교행위를 고발하십니다. 반면에 유다 백성을 ‘그들’로 지칭하는 26-28절은 예언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개역개정은 26절의 주어를 ‘너희’로 고쳐 읽으며 앞 부분에 연결시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의 완악함 때문에 그의 선포가 거절되고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운문으로 된 29절에서는 예언자가 2인칭 단수 여성(예루살렘?)에게 애가를 부르라고 명령합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21-28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한 불순종을 고발하고, 29절은 애가의 형식을 빌어 이들에게 심판을 선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의종교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아주 파격적이자 도발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마치 일상적인 식사의 경우처럼 희생제물의 고기뿐만 아니라 번제물의 고기도 함께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21절). 그분은 유다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당신께는 번제물의 고기가 필요 없으니 그런 것은 제의참여자들이 먹어 치우라고 말씀하십니다. 22-23절은 하나님이 제의규정의 준수를 전혀 무시하는 명령을 내린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분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며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번제와 희생제사의 준수가 아니었습니다(22절). 제의는 이스라엘의 원초적 신앙고백에 속하는 출애굽 사건하고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에게서 원하신 것은 그분 말씀의 순종이었습니다(23절). 계약관계는 제사가 아니라 순종에 의해 유지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성전의 제의를 통해서만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그분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그분께 등을 돌리며 완고하게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24절).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그분은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거듭 보내셨지만(25절) 이스라엘은 초지일관 그분께로 돌아오길 거절했습니다(26a절). 지금의 세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들은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이전 세대들보다 더 악을 행합니다(26b절).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전해도 이들은 그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27절). 이들은 그 입에 진실이 없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길 거절하는 백성입니다(28절). 완고하게 자기 길을 가는 자들에게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29절).

21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번제물을 너희 희생제물에 덧붙여서 그 고기를 먹어라.”-파격적입니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제의규정에 위반됩니다. 번제는 제물을 제단에서 모두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지만(cf. 레 1장과 6장), 다른 제사에서는 희생제물로 잡은 짐승의 고기 가운데 일부를 떼어 번제로 드리고 나머지 부분은 제의참석자들의 몫으로 돌려집니다(cf. 레 3장; 7:11-18; 삼상 1장과 2장). 원칙상 번제물의 고기는 제의참석자들이 먹을 수 없습니다. 레위기 율법을 배경으로 볼 때 하나님의 명령은 차라리 풍자적입니다. “내게는 고기가 필요 없으니 희생제물뿐만 아니라 번제물도 너희가 다 먹어라! 너희들이 드리는 제사는 나하고는 상관이 없으니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와신앙을 제의종교로 변질시켜버린 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기에 이들이 어떻게 제사를 드릴지라도 그분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상과 달리 하나님은 제물에 의존하는, 생존을 위해 제물이 필수적인 그러한 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숭배자들의 제사를 무조건적으로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의규정의 철저한 준수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과 실천입니다. 제의규정의 준수는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며 따르는 자들에게나 필요합니다.

22절 22-23절에서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를 거절하시는 이유를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이끌어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올 때 하나님은 이들에게 번제와 희생에 관한 가르침을 주거나 그 준수를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 이들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제의는 이스라엘의 출발점이자 원초적 신앙고백에 속하는 출애굽사건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제의는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에, 달리 말하자면, 여호와신앙의 핵심에 속하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자의 제의를 받지 순종하지 않는 제의를 받지 않습니다. 우선순위는 말씀의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사회 역사 윤리적인 가르침이 1차적으로 말씀입니다.

23절 애굽에서 해방시키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제의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말씀의 순종이었습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제의규정의 준수에 근거하지 않고 당신 말씀의 순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규정에 따라 드린다고 계약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원하신 것은 그분 음성에 순종하는 것, 곧 그분께서 명령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분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계약을 준수한다면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축복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가나안의 바알종교를 포함한 고대근동의 모든 종교에서는 제의가 복을 가져다 주지만, 여호와종교에서는 계약준수의 결과, 곧 말씀에 순종한 대가로 복이 주어집니다.

24절 24-25(26)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24절)과 여호와의 지속적인 관심(25절)을 대비시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악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출애굽 이후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였다. 이들의 불순종은 의도적이며 계획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완강하게 반역하며 자신들의 악한 길을 갔슶니다. 후반절은 이스라엘의 배교행위를 비유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가까이 가야 할 이스라엘이 그분께 등을 내보이고 멀어집니다.

25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후에도 거듭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 당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계시하시며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셨습니다(cf. 신 18:18; 호 12:12-13). 등을 돌리고 완강하게 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돌려세우기 위해 그분은 무진 애를 쓰셨지만 허사였습니다. ‘종 선지자’는 하나님과 예언자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종이 주인에게 속한 자로 주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예언자도 하나님께 속한 자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또 종이 주인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지켜주십니다.

26절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목덜미를 굳게 하며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악하였다.”

26절부터 시점이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현재로 옮겨집니다. 21-25절에서 2인칭 복수 ‘너희’로 언급되었던 현재의 이스라엘이 26-28절에서는 3인칭 복수 ‘그들’로 불려집니다. 현재의 문맥에 따르면 26절은 27-28절처럼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22-25절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을 고발하신 하나님은 26-28절에서는 예레미야에게 과거 세대들보다 더 악화된 현 세대의 완악함을 알려주십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이들이 조상들보다 더 악합니다. ‘목을 굳게 하다’(17:23; 19:15; cf. 왕하 17:14; 잠 29:1)는 남의 말에 담을 쌓고 제 고집대로 나아가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고집불통의 이스라엘은 제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갑니다(cf. 왕하 17:14; 잠 29:1).

27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의 사명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cf. 1:17-19; 6:27-30; cf. 사 6:9-10; 겔 2:3이하). 조상들보다 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은(26절) 예언자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도 그의 외침에 응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13b절에서 하나님은 본문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시며 이스라엘이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직접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예레미야에게 그의 예언자적 사역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될 것을,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들 것을 알려주십니다.

28절 예레미야에게 예언자의 고독한 사명에 관해 말씀하신(27절)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선포할 메시지를 그에게 알려주신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 평가를 전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완고함이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거듭 유다의 멸망이 정치적 재앙이 아니라 신학적 파국임을 암시해 줍니다. ‘교훈’으로 번역한 ‘무사르’는 훈계나 견책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잘못된 길을 가는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멸망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을 되돌리기 위해 징벌하셨지만 이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30; 5:3). 진실이 없어져 이들의 입에서 끊겼습니다. 5:1-2의 경우처럼 진실(에무나)은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찾아가서는 구원을 얻었다고 감사하지만(10절) 성전 문을 나서면 탐욕스런 거짓을 일삼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서 진실을 기대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민족’은 주로 이방민족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29절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은 필연입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죽음)을 기정사실로 간주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애가를 부르듯이 청자 ‘너’에게 ‘벗은 산 위에서’ 죽음을 통곡하라고 명령합니다. 아직 생명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음부에 발을 내딛었음을 보여줍니다. 신분이 직접 언급되지 않은 2인칭 여성 단수의 청자로는 예루살렘, 유다 또는 가나안 땅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벗은 산’은 사람들이 생명과 풍요를 소망하며 우상을 숭배했던 곳입니다.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는 애도 행위와 관련된 풍습에 속합니다(cf. 미 1:16: 욥 1:20). 그러나 사용된 표현은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너의 성별된 것(%rez>nI)을 잘라 버려라’가 됩니다. 머리털을 ‘성별된/구별된 것’으로 지칭한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나실인 규정(민 6:5)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은 서약기간이 끝난 후에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명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관계가 끝났음을 보여줍니다. 순종의 봉헌서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께 구별된 자(나실인)가 아닙니다. 목덜미를 뻣뻣이 세우고 제 길을 간 이스라엘의 죄악에 상응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리십니다.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로 번역한 히브리어 표현을 직역하면 ‘그분의 진노의 세대’가 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보여줍니다.  

# 거둠의 기도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이 헛된 부요를 추구하는 죄악에서 떠나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을 순종하는

참된 예배자의 복을 추구하는 믿음 주옵소서.

여호와의 노를 일으키는 우상숭배에서 떠나

부끄러운 일을 자행하지 않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음성에귀 기울이고

우리는 기도로 반응하며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의 목소리 청종하기를 기뻐하고 

오직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고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온전하게 살고

주께서 명하신 선한 길로 행하며

우리 삶이 주께 합당한 삶이게 하옵소서. 

우리의 악한 마음과 꾀와 완악함을 버리고

날마다 주 앞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에 겸손히 귀 기울여

순종하게 하옵소서.

날마다 우리 삶에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에

합당하게 반응하며

주님과의 소통의 관계 온전케 하옵소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34 예레미야 18:01-12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평화의길벗 2023.08.11 18
533 예레미야 17:19-27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평화의길벗 2023.08.10 26
532 예레미야 17:01-18 예레미야의 고백 3 : 간구와 신뢰의 고백 평화의길벗 2023.08.09 19
531 예레미야 16:14-21 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비전 평화의길벗 2023.08.07 17
530 예레미야 16:01-13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 예고된 심판의 이유 평화의길벗 2023.08.07 25
529 예레미야 15:10-21 예레미야의 고백 2 ; 탄식하는 신앙 평화의길벗 2023.08.06 25
528 예레미야 15:01-09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평화의길벗 2023.08.05 24
527 예레미야 14:13-22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평화의길벗 2023.08.03 23
526 예레미야 14:01-12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평화의길벗 2023.08.02 23
525 예레미야 13:15-27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멸망과 유배의 원인) 평화의길벗 2023.08.01 26
524 예레미야 13:01-14 내 백성 되게 하려 하였으나 평화의길벗 2023.08.01 16
523 예레미야 12:07-17 보배로운 소유에 대한 심판 평화의길벗 2023.07.30 25
522 예레미야 11:18-12:06 예레미야의 고백 1 ; 악인의 형통 앞에 평화의길벗 2023.07.30 18
521 예레미야 11:01-17 언약을 지키는 것과 깨는 것 평화의길벗 2023.07.29 30
520 예레미야 10:17-25 심판에 대한 애가와 간구 평화의길벗 2023.07.28 27
519 예레미야 10:01-16 창주조 하나님 앞에 헛된 우상 평화의길벗 2023.07.27 19
518 예레미야 09:17-26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평화의길벗 2023.07.26 25
517 예레미야 09:07-16 이 땅이 멸망한 이유 평화의길벗 2023.07.25 22
516 예레미야 08:18-09:06 무너져 가는 동족을 향한 눈물 평화의길벗 2023.07.23 21
515 예레미야 08:04-17 진리(말씀)에서 멀어진 결과 평화의길벗 2023.07.23 27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2 Next
/ 3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