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레미야 07:01-15 유다 백성이 쫓겨나게 된 이유(성전 설교)

*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에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합니다. 그것은 성전을 찾는 이들에게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요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구원해 줄 것을 믿었지만 이를 거짓말이라 하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일) 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기만이며 결국 실로와 북이스라엘처럼 쫓겨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교합니다. 

*

본문은 소위 ‘성전 설교(7장, 26장)’로서 성전과 관련한 유다의 기만적 신앙, 왜곡된 신앙, 껍데기 신앙을 고발하며 참된 예배와 신앙 그리고 구원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바른 길과 행위 곧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삶(과 공동체의 형성)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와 같은 것이 없는 성전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거짓이며 도둑의 소굴일 뿐이며 결국 실로와 벧엘처럼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지금 남유다의 신앙이 삶의 변화 없는 곧 정의와 공의의 실현이 없는 제의적 신앙으로 전락하고 여호와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행하지 않는 신앙으로 전락한 원인은, 잘못된 성전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탐욕적 이해(혼합주의로 흐른)에 갖힌 무지와 어리석음에 근거합니다. 유다의 이러한 기만적 신앙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역설적인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로서는 지금 이 성전 설교는 당대 굳건한 성전 신학의 전통위에 서 있는 종교 기득권을 가진 이들과 이러한 신앙에 부화뇌동하는 백성들로부터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행한 설교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뜻 곧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입니다(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바꿔 말하면 이와 같은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과 예배는 결국 기만이며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 그리고 믿음의 벗들이 ‘함께 함’을 통해 누리는 기쁨이 없다면 성전 혹은 교회는 이미 그 존재 의미를 잃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_김기석 <끙끙앓는 하나님> 중에서

*

# 예레미야 7:1-8:3 구조

   7:1-15 예레미야의 성전설교

   7:16-20 하나님과 유다 사이의 완전한 단절

   7:21-29 제사보다 말씀의 순종

   7:30-8:3 우상숭배와 살육의 심판

*

# 1-2절 예배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에 서서 예언하라 합니다. 그것은 예배하러 가는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

남유다가 끝까지 기만적 신앙 곧 삶의 변화 없이, 또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삶으로 변화되지 않고, 선지자를 통한 선포에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가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전에 대한 잘못된 신앙에 기인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유다의 기만적 신앙에 경종을 울리고 왜곡된 신학이 고착된 성전에서 제의 종교를 통해 종교적으로 안일한 만족에 빠진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된 성전 신학을 깨기 위한 장소로 예루살렘 성문 앞에 아닌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서 외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앞에 서서 예배하러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일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기름진 제물과 화려한 예배, 웅장한 성전, 탐욕에 물든 제사장과 이들을 통해 거짓 평안을 보장받으며 나름대로의 종교심을 충족하고, 성전 그 자체만 있으면 만사형통이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부지런히 성전을 들락거리는 이들을 향해 외치는 이야기가 예배보다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은(5:30-31) 선지자와 제사장과 백성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어리석음, 그리고 왜곡된 성전 신학, 탐욕에 기인한 우상숭배, 하나님에 대한 무지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국 제의 종교 곧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와 제물을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드릴  뿐 삶의 변화와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일과는 상관없는 제의 중심적 신앙, 제의만 강조하는 신앙으로(예레미야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의가 아니라 삶이 문제이고, 성전이 문제가 아니라 성전 밖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의 곧 예배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삶 곧 하나님이 말씀을 순종하는 선한 일을 이루는 그 삶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 7:1-2(도입부) - 선포의 명령 _ 묵상도움글

하나님은 선포할 말씀의 내용(3절 이하)을 알려주시기 전에 먼저 선포 장소를 정해주십니다(2a절). 그분은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집 문’ 곧 성전 입구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라 명령하시고, 예레미야는 명령에 따라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문들로 들어오는 유다의 많은 주민들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2b절). 예언자가 말씀을 선포해야 할 장소인 성전 입구는 분명 의도적으로 선택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은 유다의 각처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였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면 아마도 성전 입구보다는 예루살렘 성문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외적 요인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일차적이지는 않습니다. 근본 이유는 선포의 내용과 관련하여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이 있어 예루살렘이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4절)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12-15절) 외치기에 가장 극적인 장소는 바로 성전 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당신의 집을 정죄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성전 입구에 세우시고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

# 3-7절 성전이 아니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사는 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살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과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데 이는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 합니다. 오히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정의, 소외된 자들을 압제하지 않음, 무죄한 피 흘리지 않음,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음)이 약속의 땅에서 사는 길이라고 역설합니다. 

.

여호와께서 지금 원하시는 것은 성전을 화려하게 짓고, 예배를 웅장하고 멋지게 드리고, 제물과 여타의 헌물을 많이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미 앞서 여호와의 (선한)길은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6:16,19)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을 세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면서 그것은 거짓말이라 합니다. 성전이 성전 되는 것은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이들의 삶에 달려 있는 것이지 화려한 성전 그 자체는 다만 건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건물 성전을 보면서 그 성전이 거룩한 성전, 하나님이 함께하는 성전, 구원의 성전으로서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살게 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거짓말이라 하면서 믿지 말라 합니다. 

.

이어서 바른 길과 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사항들(정의, 소외된 자들을 압제하지 않음, 무죄한 피 흘리지 않음)은 모두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결국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 빠진 제의와 종교와 신앙은 다른 신 곧 우상을 따르는 우상숭배(공의와 정의를 행함이 없이 지극히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행위에만 치중하는 신앙)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결국 정말로 다른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것은 탐욕에 기인한 우상숭배의 대상이 결국 ‘돈’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의를 드리는 이유도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그런 신앙이 결국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며,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우상숭배가 바로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는 돈의 우상입니다. 

.

성전은 특정 공간 혹은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하여 이 땅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내안에 사신 그리스도로 사는 것,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뜻인 정의와 공의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거룩한 삶이고 왕같은 제사장의 삶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미 이 땅에서 세우고 살고 누리며 증거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

# 7:3-7(약속이 따르는 권면) - 묵상도움글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삶의 자세를 질적으로 바꾸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권면에 따라 악한 행실을 고치면 구원이 주어질 것을, 가나안 땅 또는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3절과 7절). 하나님은 교리적-성전중심적 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4절) 그 성전을 자신의 집으로 선택하신 분을 바라보도록 요청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유다에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만이 구원을 보장해줍니다. 유다 백성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길과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3a절, 5a절). 하나님께서 고쳐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십니다. 이웃이 서로 공정을 실천하고(5b절),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들의 법적 권리를 존중해 주며(6aa절; → 출 22:21-23; 신 24:17),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고(6ab절), 재앙을 가져오는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 합니다(6b절).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순종하여 곧은 길을 벗어나지 않고 바르게 처신할 때 그분께서 조상들에게 약속으로 준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7절).

사회적 법규의 준수와 우상숭배의 금지가 나란히 언급됨은(5-6절, 9절) 하나님 백성에게 있어서 사회(윤리)와 종교(제의, 예배)가 구별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이웃 사이의 정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성전제의는 종교적 위선에 불과합니다.

4절 성전에 관한 허상을 고발하는 두 번째 권면은 부정 명령문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웅장한 성전 건물을 보면서 이 건물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떠들어대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세 번에 걸친 반복은 절대 최상급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고대 세계에서는 주술적 성격을 갖기도 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듯이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외쳤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구원을 보장해준다는 전통적 신학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제의가 안정과 지속적인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말은 선전문구에 불과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신 여호와께서 구원을 주관하시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다는 사실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성전과 그 성전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당신의 현현 장소로 택하셨지만, 그분의 실존은 예루살렘 성전에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성전으로 인정하실 때만 ‘여호와의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 말씀의 순종입니다.

*

# 8-11절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함이 없는 성전은 구원과 거리가 먼 가증한 일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함이 없는 성전 신학을 무익한 거짓말이라고 선언하고 십계명(1,6,7,8,9)을 어기는 행위를 하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데, 결국 가증 한 일 곧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길과 행위를 굽게하여 삶이 없는 제의적 신앙을 고수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보며 모독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실상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삶’과는 정반대입니다. 

.

존재와 행실의 변화가 없는 종교 행위는 기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제의적 종교에 몰두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죄악을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더 화려하고 많은 제물들을 드리는 것을 통해서 더 많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의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으로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지만 결국 이러한 확신도 자신들의 탐욕적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음을 꼬집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잘못된 구원관에는 정의와 공의를 버리고 소외된 이들을 짓밟고 군림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행위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성전에 들어와서는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도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제사에만 힘쓰는 백성을 향해 성전을 “도둑의소굴”로 만든다고 책망하시면서 가난한 자에 대한 행동의 근본에는 재물 욕망이 놓여 있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재물로 구체화된 우리의 욕망입니다. 

.

일주일 내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삶 곧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거룩한 삶과는 거리가 먼 탐욕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주일에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에 와서는 헌물과 예배 한 번으로 자신들의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위안을 받으면서 또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탐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신앙이 우리의 자화상이며,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을 기만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교리적으로 오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면서 길과 행위 곧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일은 기껏 선택사항 정도로 돌려서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은 좋고 삶이 약한 정도로 표현할 문제가 아니라 그의 믿음 자체가 문제이며, 예레미야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떠난 것이며 다른 신 곧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값싼 사죄 선포와 은혜로 전락한 복음이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신앙고백이나, 성전과 제사를 의지하는 것은 그들의길과 행위가 올바르지 않을 경우 우상을 섬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문제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이다. 달리 말해 그가 사는 삶을 보면 그가 믿는 신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성경 구절들을 틀림없이 암송하고 인용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에 취한 오늘이 우리 교회는 예레미야의이 고발 앞에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싸구려 사죄 선포, 싸구려 은혜의 약속이 난무한다.” _김근주 <특강 예레미야> 중에서 

*

# 7:8-11(유다의 현실: 상실된 기회) - 고발 : 심판의 근거 _ 묵상도움글

하나님은 성전을 찾는 자들을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책망하십니다(8절).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구원을 보장해 준다는 거짓된 믿음(4절)에 현혹돼 열심으로 성전을 찾습니다. 성전 예배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여호와신앙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4절)는 하나님의 경고는 허공을 가르는 외침일 뿐이었습니다. 제의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구속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이들은 십계명의 기본적 가르침조차 무시합니다. 거리낌없이 도둑질하고(8계명) 살인하고(6계명) 간음하고(7계명) 거짓으로 맹세하며(9계명) 우상들을 섬기면서도(1계명) – 이런 일을 행한 자들은 원칙상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9-10절). 이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듭니다(11절; cf. 마 21:13). 남을 해하거나 물건을 강탈한 자들이 은신처를 찾아 숨는 것처럼 유다 백성은 성전을 도피처로 활용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저지른 각종 파렴치한 짓들과 불법을 제의적으로 용서받기 위해 성전을 찾습니다. 이들은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리며 자신들의 악행이 사함을 받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10절) 하고 감사합니다. 성전이 자신들의 범죄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자들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이들은 성전을 피 묻은 손을 씻는 곳으로 악용합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이들이 하는 짓은 모두 ‘가증한 일’로 보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이들의 거짓과 위선을 다 지켜보셨기에(11b절)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됩니다.

유다 백성은 여호와신앙을 제의종교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감금시키고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분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이들이 마음에 둔 하나님은 이들의 성전 예배를 언제나 기쁘게 받으시고 이들의 범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본문은 제의화된 여호와종교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여호와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계명)에 대한 순종함이 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의(예배)는 참석자들만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믿는 자들이 제의(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가능성), 제의(예배)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분의 은총에 속하기에 우리에게는 이를 자동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처음부터 배제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의(예배)를 물리치실 수도 있습니다. 제의(예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교회)이 당신께 나아올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하신 하나의 통로에 불과합니다.

10절 “너희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말한다. ‘이 역겨운 짓들을 [계속] 행할 수 있도록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위선적-제의적 신앙을 조롱하듯이 비판하십니다. 후반절의 뒤 부분에서 하나님은 이들의 자기만족적 구원을 신랄하게 풍자하십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은 얼마간 불충분합니다. 다음과 같이 풀어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받았다고? 그래, 구원을 받았으니 가증한 일을 계속 해보려무나.” 이들은 성전예배에 참석한 대가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은 성전예배를 통해 사회에서 행한 범죄행위가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받았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잘못은 이제 깨끗이 씻겨졌고, 사회에 나가 또 잘못을 범해도 제사를 드리면 다시 용서를 받을 수 있기에 이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떠나 가증스런 짓을 계속합니다. 자동적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수단(예배)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죄와 구원은 실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자들의 자기만족적 구원이 이들을 더 깊이 악의 웅덩이에 빠뜨립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계속 죄를 범해도 좋다는 ‘악(惡)의 면허증’입니다. 성전에 가기만 하면 의로운 자 되어서 성전 문을 나설 수 있다 생각하니, 예루살렘 성전은 온갖 도둑들로 가득하게 된다. = 그런 예루살렘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된다. 

*

# 12-15절 성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성전 제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시킨 유다 백성에게 심판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행한 이스라엘이 악에 심판을 언급하십니다. 지금 유다는 그들과 같은 일을 행하였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여호와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선고합니다. 그래서 실로에 행한 것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행할 것이며, 에브라임(북이스라엘)에 행한 것처럼 약속의 땅에 사는 너희를  쫓아낼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

기만적 신앙과 잘못된 성전 신학에 사로잡힌 유다는 실로와 북이스라엘(에브라임)처럼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이스라엘의 중앙성소였던 실로는 제사장직을 맡고 있던 엘리가문의 부패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졌습니다(삼상 1-4장). 예루살렘도 그렇게 될 수 있는데 유다 백성은 깨닫지 못합니다. 성소 자체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악을 행하면 성소가 있는 도성과 나라라도 하나님을 멸망에 넘기십니다. 앗수르를 통해 실로를 멸망시키고 에브라임 자손(북이스라엘)을 고향 땅에서 쫓아내신 것처럼 이제 동일한 전철을 밟고 있는 예루살렘 성소를 멸망시키고 유다 백성을 쫓아내실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

조심스럽게 오늘 우리가 믿는 교리와 신앙에 대해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 기초한 신앙이 아니라 전통을 따라서 알게된 하나님과 구원의 길등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상당 부분 왜곡되거나 편중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우리에게 형성된 교회의 모습이 결국 하나님이 찾으실 만한 신앙과는 거리가 말고, 교회는 믿음과 삶이 분리되었으면서도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 구원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정죄하고 가두는 일에 서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신앙이 좋은 것처럼 착각합니다. 공의와 정의에는 무관심하면서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나도 손해 보지 않으려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세상에 힘으로 저항하려 합니다. 돈이 최고의 숭배의 자리에 있어서 교회의 운영과 여타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있으면서도 축복된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것이 고착화된 교리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안일한 신앙과 말씀에 대한 오판의 결과라고 한다면 다시 말씀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찾으시는 그 신앙인지,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요청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간다면 실로와 벧엘과 예루살렘의 전철을 따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

“신앙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역설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신앙이 몰상식이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일상적 관계나 삶을 파괴하는 가르침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 영성에 가깝습니다.” - 김기석 목사님의 <끙끙앓는 하나님>중에서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 이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도 아니고, 복을 더 얻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구원과 생존 여부를 결정 지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길과 행위 곧 정의와 공의 곧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능력으로 사랑하며 선을 행하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길로 행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

# 7:12-15(심판의 선고) _ 묵상도움글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거절한 유다(13절)에게 멸망과 유배의 심판이 선고됩니다. 이전에 이스라엘의 악행 때문에 여호와께서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12절)에 행하셨던 대로 유다 백성이 의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같은 재앙을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14절).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고, 가나안 땅이 그분께서 이스라엘에게 상속재산으로 준 기업이기는 하지만(14a절),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과 가나안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주지는 않으십니다. 유다는 실로 성소의 멸망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냈어야 했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이스라엘의 중앙성소의 역할을 담당했던 실로 성소가 제사장직을 맡고 있었던 엘리가문의 부패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졌다면(삼상 1-4장) 예루살렘 성전도 동일한 잘못을 범하면 마찬가지로 심판에 떨어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했지만 유다 백성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실로 성소의 몰락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소가 있다는 사실이 그 도성과 나라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악을 행할 경우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소라 할지라도 멸망에 넘기십니다. 앗수르를 통해 실로를 멸망시키고 에브라임 자손들을 고향 땅에서 쫓아내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소를 멸망시키고 유다 백성을 당신 앞에서 모두 쫓아내실 것입니다(15절). 성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성전제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시킨 유다 백성에게 심판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대략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벧엘과 세겜 사이의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실로는 이스라엘이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 지파동맹 시대의 주요 성소였습니다(cf. 삼상 1-3).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연례적인 축제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cf. 삿 21:19이하).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기원전 11세기 중반에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긴 후에(4:1a이하.; cf. 렘 7:12, 14; 26:6, 9; 시 78:60) 실로 성소는 그 중요성을 급격히 상실합니다. 엘리의 후손은 실로를 떠나 예루살렘 북동쪽에 인접해 있는 놉으로 자리를 옮깁니다(cf. 삼상 21:1이하). 블레셋의 위기 때 실로는 파괴를 경험했던 것 같지만 멸망 당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로는 주전 72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또는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됩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주님의 나라 이루도록 택하사 

주님의 몸된 교회로 성전으로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먼저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게 하옵소서. 

주께서 제시해 주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과

성전은 우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행하게 하옵소서. 

예배에 앞서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며

기꺼이 사랑을 실천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비로서 주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의 삶임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왜곡되고 고착된 교리를 바로잡고

삶의 변화 없는 예배에만 치중하고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예배를 추구하는 탐욕에서 벗어나고

모든 가증한 일들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실로와 벧엘 그리고 예루살렘에 행하신 

여호와의 일을 깊이 새기고

역사적 전철을 밟지 않는 교회와 신앙이게 하옵소서.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교회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믿음의 사람, 예배자로

부족한 종도 세워지고, 그런 이들을 세우는 목회로

내용과 방향을 흔들림 없이 채우고 행하게 하옵소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34 예레미야 18:01-12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평화의길벗 2023.08.11 18
533 예레미야 17:19-27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평화의길벗 2023.08.10 26
532 예레미야 17:01-18 예레미야의 고백 3 : 간구와 신뢰의 고백 평화의길벗 2023.08.09 19
531 예레미야 16:14-21 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비전 평화의길벗 2023.08.07 17
530 예레미야 16:01-13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 예고된 심판의 이유 평화의길벗 2023.08.07 25
529 예레미야 15:10-21 예레미야의 고백 2 ; 탄식하는 신앙 평화의길벗 2023.08.06 25
528 예레미야 15:01-09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평화의길벗 2023.08.05 24
527 예레미야 14:13-22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평화의길벗 2023.08.03 23
526 예레미야 14:01-12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평화의길벗 2023.08.02 23
525 예레미야 13:15-27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멸망과 유배의 원인) 평화의길벗 2023.08.01 26
524 예레미야 13:01-14 내 백성 되게 하려 하였으나 평화의길벗 2023.08.01 16
523 예레미야 12:07-17 보배로운 소유에 대한 심판 평화의길벗 2023.07.30 25
522 예레미야 11:18-12:06 예레미야의 고백 1 ; 악인의 형통 앞에 평화의길벗 2023.07.30 18
521 예레미야 11:01-17 언약을 지키는 것과 깨는 것 평화의길벗 2023.07.29 30
520 예레미야 10:17-25 심판에 대한 애가와 간구 평화의길벗 2023.07.28 27
519 예레미야 10:01-16 창주조 하나님 앞에 헛된 우상 평화의길벗 2023.07.27 19
518 예레미야 09:17-26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평화의길벗 2023.07.26 25
517 예레미야 09:07-16 이 땅이 멸망한 이유 평화의길벗 2023.07.25 22
516 예레미야 08:18-09:06 무너져 가는 동족을 향한 눈물 평화의길벗 2023.07.23 21
515 예레미야 08:04-17 진리(말씀)에서 멀어진 결과 평화의길벗 2023.07.23 27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2 Next
/ 3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