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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4:19-31 슬프고 아프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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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패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의 탄식과 고통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이 아파하고 슬퍼하며 고통당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아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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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그 백성의 슬픔과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안은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념(파토스)에 사로잡힌 자인 동시에 그 백성들의 고통을 자기 몸에 짊어지는 자입니다. 예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기에 십자가의 길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 김기석목사님의 <끙끙앓는 하나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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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절 하나님은 심판과 전쟁을 가슴이 무너지는 것같은 고통가운데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듣고 슬프고 아프고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다고 탄식합니다. 장막과 위장이 패망하고 탈취당하여 파멸하는 곳에 깃발과 나팔소리 가득합니다. 언제까지 진행될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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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같은 이스라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는 주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편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들려지는 탄식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탄식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동시에 죄악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는 결국 심판의 전쟁을 말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전철을 답습하는 유다도 철저하게 패망하고 탈취를 당하며 파멸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막과 휘장이 파멸되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겠지만 고통당하는 그 일들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어 더 아파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심판의 전쟁은 더 참혹하고 오래일수밖에 없습니다. 더럽혀진 그 땅을 정결하게 회복하는 데는 파멸되는 시간 뿐 아니라 포로로 끌려간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죄악의 기간만큼 고통의 대가는 길고 오래가고 또 그만큼 아픈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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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심판의 전쟁을 통해 이 백성이 고통당하는 그 현장에 누구보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서 매를 든 부모의 심정으로 함께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고통당하는 곳에 하나님은 절대적 타자이면서도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감내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친히 그 모든 고통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물도,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우리의 불순종과 불의한 죄악 때문임을 깨닫고 속히 그 자리에서 여호와께 돌아오는 길만이 지금 우리가 붙잡아야 할 생명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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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절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가 결국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악행으로 치닫게 합니다. 

지금 진행되는 재앙의 원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과 지각없는 미련함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악을 행할 줄 몰라야 하는데 오히려 더 지혜로웠고, 선을 행하는 일에 지혜로워야 했으나 오히려 더 몰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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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이면 당연히 왕되신 하나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알기만 할 뿐 아니라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를 따르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심판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데까지 오게 된데는 그들의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게을렀고, 하나님을 아는데에 무지했고,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며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가졌으며,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미련하여 망하는 길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데는 빨랐고, 정작 선을 행하는 일에는 너무도 무지하고 더딘 것입니다. 그래서 재앙이 바로 코앞에 닥쳐왔는데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기업의 땅을 살아가는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채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면서 결국 멸망을 자초한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은 악한 일을 행하는 데는 미련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일에는 지혜롭고 열심이어야 합니다(롬16:19).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선악의 행실에 대한 기준이 생기고, 분별력을 가지게 되어서 악행(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을 멀리하고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지식의 능력을 덧입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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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22(예언자의 탄식) _ 묵상도움글

화자에 따라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21절에서 예언자는 자신이 선포한 재앙이 그 폭력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울부짖습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는 재앙이 예언자를 영적-육체적 고통의 심연에 빠뜨립니다. 그는 자기 백성의 멸망을 몸으로 미리 체험합니다. 22절에서는 야훼께서 당신 백성의 어리석음을 탄식하십니다. 그분은 심판의 위험을 가르쳐주어도 이를 피하려 하지 않고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심인 이스라엘의 미련함과 무지를 책망하며 슬퍼하십니다. 두 단락은 다가오는 재앙(5-18절)에 대한 예언자와 야훼의 반응으로 서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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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적들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하는 유다의 절망적 현실이 예언자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영적 짐이 그의 육체를 고통에 빠뜨립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 온 몸이 발작적으로 반응합니다. 19절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속이 뒤틀리네. 내 심장의 벽이여, 내 안에서 심장이 마구 뛰는구나.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배와 창자가 뒤틀리고,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 엄습하고, 심장은 터질 듯이 뜁니다. 몸과 마음이 견뎌내기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b-20절은 예언자가 왜 이처럼 격렬하게 아픔을 겪는지 그 까닭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전쟁터에서 혼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와 전쟁의 함성을 듣습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어지럽게 울리고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서로 뒤엉켜 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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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예언자의 고통이 그처럼 격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다의 처참한 패배와 그로 인한 땅의 황폐함 때문입니다. 유다는 전쟁에서 거듭 패하고 온 땅이 황폐해집니다. 예언자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터전인 집을 ‘나의 장막과 [나의] 휘장’이라 부르며 이들에 대한 강한 연대성과 깊은 연민의 정을 내보입니다. 그는 동족이 겪는 절망적 파국에 동참하여 함께 그 고통을 경험합니다. 후반절은 “홀연히 나의 장막이, 한순간에 나의 휘장이 황폐해졌다”로 옮기는 것이 좋다. 부사 ‘홀연히’와 ‘한순간’은 재앙(패배)의 철저성과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적에 의해 순식간에 생존의 터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황폐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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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예언자는 환상과 환청을 통해 거듭 전쟁의 깃발과 나팔소리를, 유다와 예루살렘이 전쟁으로 완전히 황폐해지는 것을 보고 듣습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을 자기 백성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야훼의 심판의지와 백성의 완강한 반역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충돌하기에 예언자의 탄식과 고통도 더욱 심해집니다. 예언자는 백성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음을 알고 이를 막으려 하지만 이들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멸망의 모습을 보여주시지만, 예언자의 선포는 백성의 완악한 마음을 되돌리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점점 더 가까워오는 전쟁의 깃발을 보고 더 크게 들리는 나팔소리를 들으며 유다의 피할 수 없는 멸망에 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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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절 재앙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무지와 악행이 야훼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그분을 알아야 하는 자들이 어리석게도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미련한 자식이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악을 저지르는 데는 지혜로우면서도 선을 행할 줄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악한 일에 사용합니다. 이들은 재앙이 바로 코 앞에 닥쳐왔지만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거절하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며 멸망을 자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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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6절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혼돈과 공허 속에서 무너져갈 뿐입니다. 

심판의 전쟁이 진행된 결과 땅은 혼돈과 공허로, 하늘은 빛을 잃고, 산은 진동하고 요동하면서 사람과 새들도 사라져 버립니다. 땅은 황무지가 되고, 성읍들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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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에 대해 묘사하는 그림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한 모습으로 심각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혼합주의적인 신앙으로 점철된 삶의 결과입니다. 곧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이와 같이 쌓아가는 모든 것들의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같고, 황무지같은 인생이면서, 무엇인가를 많이 얻고 쌓고 채워가는 것 같지만 어느날 허무하게 무너져 버릴 썩어 없어질 것들을 쌓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혼돈과 공허, 어둠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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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으시고, 생명을 주시고, 양육하시며, 모든 것을 채우시고 부으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채우는 것은 유한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 아닌 것으로 아무리 채우고 채우려고 해도 결코 채울 수 없는,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알지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자리에 헛되고 유한한 것들을 채우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고 결국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은 결국 혼돈과 공허 속에 무너져가는 인생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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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3-26(혼돈으로 돌아감) - 완전한 멸망 _ 묵상도움글

23-26절은 환상보고에 속합니다. 예언자는 환상 중에 이스라엘에 닥칠 미래의 사건들을 봅니다. 그는 심판의 도구로 야훼께서 북쪽에서 불러 올 ‘민족들의 파괴자’(4:7)에 의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경험하게 될 파국적 재앙(4:4-21)을 종말론적-묵시적 색채를 사용하여 우주적 혼돈으로 확대합니다.

예언자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옛 창조전승을 배경으로 앞으로 이스라엘에 닥칠 혼돈을 종말론적-세계사적 시각에서 기술한다. 하나님의 징계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창 1:2)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23a절). 하늘에는 빛(창 1:3)이 사라지고(23b절), 굳건함을 상징하는 산과 언덕은 뒤흔들리며(24절), 하늘의 새들(창 1:20)이 도망가고 사람(1:26)이 없어집니다(25절). 식물이 자라던 비옥한 땅이 생명에 적대적인 사막으로 변합니다(26a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창 1:31) 피조세계가 무질서와 혼돈과 죽음의 세계로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피조세계가(창 2:2-3) 그분의 진노에 떨어집니다(26b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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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8절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황폐해질 것이지만 그러나 진멸하지는 않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슬퍼하겠지만 그런다고 이미 작정하신 심판은 후회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반드시 시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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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이방나라의 도구와 인생 채찍으로 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진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확정된 결정이기에 바꿔지거나 물려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했지만 결국 남겨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재건해 가시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한 소망이 남겨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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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때로 후회도하시고 심판이 결정을 돌이키시기도 할 때도 있지만 이제 남유다에 대한 시판은 확정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 앞에 취해야 할 자세는 정말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잃고 황폐하여 황무지 같을 지라도 주께서 살리시고 회복하시며 온전케 하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실하시고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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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7-28(확정된 심판) _ 묵상도움글

야훼의 심판은 이제 확정된 결정이기에 바꿔지거나 물려지지 않습니다. 온 땅은 황폐해지고 땅과 하늘이 애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황폐함이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야훼께서 끝장을 내지는 않으십니다. 유다 땅이 심판으로 폐허가 되겠지만 역사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생존할 것이다. 철저하고도 엄중한 심판이 선언되지만, 그래도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소망이 남겨집니다.

심판의지의 단호함. 자기의 의지를 때로 후회하시며 심판 결정을 되돌리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기의 뜻을 이스라엘과 피조세계를 위해서 돌이키시기도 하지만, 28절은 심판은 더 이상 완전하게 결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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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절 하나님이 심판은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전쟁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급하게 피하려 하지만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기에 정치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음행한 연인에게 나아가려고 치장하지만 오히려 바람을 핀 연인은 이스라엘의 생명을 찾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속에 있는 이들의 고통 소리가 대적자들의 함성(소리)과 더불어 해산하는 여인의 통하는 소리와 함께 들립니다. 도움을 요청하지만 누구도 도와줄 수도 없고 피할 길도 없기에 고스란히 그 심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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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30a) 침략자들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온 상황에서 지도자들은 어이없게도 그들을 향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신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이스라엘의 문제는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만을 섬기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함께 겸하여 섬겼으며, 하나님 아닌 것을 주인삼아 산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 길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강대국의 힘을 빌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단장하고 치장하여 나아가서 나름대로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그 연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멸시가 아니라 생명인데 이스라엘은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침내 멸망당하는 그순간은 고통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산모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무도도울 수 없이 화가 임하여 죽이는 자들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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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기 전이나 중에도 위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금 이러한 파멸과 심판의 재앙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여 외교적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권모술수는 더이상 침략꾼들의 시선을 끌지 못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도움을 요청해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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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정치입니다. 정치는 누가 왕이냐의 싸움입니다. 천지만물도 나와 우리의 가정과 교회도, 그리고 세상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진짜 왕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들 예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길을 열어 주시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하시고 삶의 자리에 적용해 가며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운데 진행되는 모든 일들을 신학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 정치 역사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인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지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우리가, 믿음의 자녀인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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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9-31(시온의 멸망) _ 묵상도움글

30절 예언자는 예루살렘/시온을 2인칭으로 부르며 책망하듯 고발합니다.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는 책망 어린 질문으로 ‘도대체 너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침략군이 유다의 성읍들을 모두 점령한 극단적 위기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지배계급이 하는 짓거리는 차라리 어이가 없습니다. 여인이 애인을 꼬시기 위해 화려한 옷에 값비싼 금붙이로 치장하고, 눈을 크게 보이려고 주변에 검게 눈화장을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매력적인 조건으로 침략군의 마음을 돌려보려 합니다. 침략군의 욕망을 만족시킬만한 좋은 조건의 강화조약을 제안해서 이들을 철군시키려 합니다. 예루살렘은 위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파국적 재앙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여 이를 극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천박한 아름다움(정치적 술수)은 의도했던 침략군의 시선을 끌지 못합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예루살렘을 애인(봉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생명이었습니다. ‘연인들’은 예루살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로[유다와 정치적 관계에 있었던 주변 나라들보다는] 침략군을 가리킵니다. 예언자는 신학적 사건인데, 예루살렘은 끝까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몸부림도 정치적인 입장에서 뭔가 도모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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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적을 꼬셔서 살아남으려는 예루살렘의 시도는 실패합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루살렘은 두려움과 진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는 해산하는 여인, 특히 첫 아이를 낳는 여인과 같습니다. 산고의 진통이 시작되면 애를 낳기까지 전혀 무방비상태에 놓여지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처지가 그처럼 절망적입니다. 적이 공격해오지만 이미 기운이 다하였기에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절망적으로 헐떡이며 손을 내밀었지만 어디에서도 도움을 구하지 못합니다. 살인자의 손에 넘겨져 죽을 때만 기다리는, 이미 다 끝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는 절망적 상황을 비유합니다. 무방비 상태, 어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절망적 상태인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께 향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역사를 신학적으로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개인의 삶에서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연습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시도는 자연스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 공동체적으로 보면 이렇다할 작업들이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방전도 세속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정치가와 교회 목사들의 이야기가 똑같이 집니다.

정치를 정치적으로도 봐야 하지만 교회 지도자는 정치를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우리 세상에 벌어지는 것을 신학적으로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 연습 없이 어느날 갑자기 보여지진 않는다. 주어진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사회 정치 역사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지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우리 나라, 공동체를 향한 뜻을 탐구해 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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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악으로 아파하시며 고통당하시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알길 원하시고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오늘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길을 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더욱 선한 일을 하는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 곧 악한 일은 멀리하게 하옵소서.

심판의 심각함을 기억하고

이제라도 우리가 돌이켜 

온전하게 살길 바라시는 그 마음을 헤아려

온전히 주께 돌아가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에 우리의 생명을 맡기지 말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역사 속에서도

변함없이 일하시고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 두드리고 찾고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 구원의 일을 의뢰하는 

지혜로운 자로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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