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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1:01-17 언약을 지키는 것과 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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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다시한번 이스라엘을 향하여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한 이후에 맺은 것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것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해왔음을 말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반역하여 조상들의 죄악으로 돌아가 언약을 깨뜨렸음을 고발합니다. 이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에게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명하는데 이스라엘은 여전히 제의적으로만 해결하려 할 뿐 정작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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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14(언약의 파기) - 묵상도움글

하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과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거절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들을 모아놓은 11-13장의 서두에 나오는 11:1-14는 유다가 어떻게 구원 가능성을 상실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언약파기를 고발하며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신명기 율법에 따라 언약을 파기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책의 자리’에서 보자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언약파기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주전 587년의 파국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그리고 그 이후 거듭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유다를 심판하는 사건입니다. 또 심판을 경험하고 그 파국적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재난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훈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언약파기의 불순종이 저주를 불러왔기에,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한다면 그에게 미래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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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여호와의 언약은 먼저 듣고 그리고 행(말)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것을 잘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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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일평생에, 그리고 남유다가 망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과 소통하며 살리고 회복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은 대로 전해야 했습니다. 듣는 자가 사명자이고 사명자는 전해야 하고, 그 말씀에 대한 전함이 결국 변화와 성숙과 회개와 회복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적에는 꿈과 환상 등 여러가지 모양 여러가지 방편으로 전했다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증거하시고 역사하심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약속하신 성령께서 이미 주신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왕되신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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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교회로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신대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이 땅에 주의 나라 세우시고 완성해 가신다는그 약속 그래서 마침내 열방이 주께로 돌아와 온 땅이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로 완성되리라는 그 약속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더불어 그 언약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주셨으니 우리는 날마다 그 언약의 말씀을 듣고 전하고 행하는 길이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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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절 여호와의 언약이 우리를 백성되게 하고 그 땅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한 이후에 체결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라 행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거룩한 왕과 백성의 관계가 되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맹세한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이 땅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멘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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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약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구원한 백성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이 언약의 규례들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명령입니다. 그것도 창조주요 구원주로서의 왕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고 따라 행하는 것이 왕의 백성으로서 행해야 할 마땅한 바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백성으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관계가 이어지고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덧붙여 또 맹세하셨습니다. 이미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인데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대로 하나님은 오늘까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약속의 땅에 거하는 바로 그것이 지금 증언하고 있기에 이 말씀을 듣는 예레미야는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구원하심도 언약을 통해서, 이 땅에 거하게 하심도 언약을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사는 삶의 내용은 바로 여호와의 규례를 따라 이 땅에서 듣고 순종하며 명령을 따라 행하는 길로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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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과 방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 길로 행하는 것이며, 주님이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대로 날마다 즐거이 살아가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 길과 다른 길 사이에서 매일 서서 우리 삶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우리 삶의 내용을 채우며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길이 여호와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것과, 그분의 나라 백성 삼으사 그의 나라 이곳에서 살게 하신 주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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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5(언약 이행의 경고) - 묵상도움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3a절)께서 먼저 ‘이 언약의 말(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십니다(3b절). ‘이 언약의 말(들)’(cf. 신 29:1)은 이스라엘이 언약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특히 신명기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시던 날에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조상들과 언약을 체결하고 준수해야 할 계명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애굽을 수식하는 ‘쇠풀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혹독하게 당했던 고난의 종살이를 함축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cf. 신 4:20; 왕상 8:51). 언약의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그분께서 명한 모든 것을 행하여야 합니다(4a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기초하여 그 위에 그분과의 관계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스라엘이 준행하면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되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4b절; cf. 7:23; 30:22; 31:33; 출 6:7; 신 4:20; 7:6; 27:9; 29:12-13). 시내 산에서 체결한 언약은 쌍무적인 것으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보호와 번영을 당신의 의무로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족장들에게 맹세한 그분의 약속(창 12:7; 28:4 등등)은 계속 유효할 것입니다(5a절).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해오셨습니다(5b절). 땅의 약속(5a절)과 순종(4a절)의 결합은 하나님께 불순종할 경우 땅을 상실하게 될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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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절 여호와의 언약은 듣고 지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 언약을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 선포하며 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지키라 합니다. 출애굽때로부터 지금까지 처음 언약을 체결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간절히 끊임없이 순종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백성은 순종하지도, 귀 기울이지도 않고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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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꾸준히 끊임없이 지속해 왔습니다. 예언자를 보내고 많은 응답과 도우심으로 함께 하셨으며 새벽부터 일어나 어깨에 짐을 지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사람처럼(이 말은 ‘끊임없이’라는 말의 유래에서 근거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새벽같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그 열심을 이어받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열심은 동일하며 예언자는 하나님을 본받고 순종하는 삶과 사역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에 반해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저하고 듣지 않고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모습은 예레미야가 지금 갖고 있습니다. 고난에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의 모범을 예레미야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며 살고 또한 전하는 삶을 예레미야처럼 이스라엘도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하신대로 행하시고 이루시고 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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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전했던 예레미야, 그 고난의 여정이 어쩌면 오늘 우리의 싸움이면서 우리의 길이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델이기도 합니다. 결코 녹녹치 않은 길입니다. 바보로 어리석은 자로 무지한 자로 비현실적이며 시대의 흐름에 무딘자로, 그리고 무엇보다 무례하고 경솔한 자로 이상한 살마으로 취급받기에 딱 좋은 모습을 예레미야는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언약에 신실했던 하나님의 명령을 온몸으로 순종한 예레미야의 길로, 그리고 예수님의 길로, 그리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갔던 그 길이 교호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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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8(불복종의 결과로 현실화 되는 저주) - 묵상도움글

3-5절이 예레미야 개인에게 준 말씀이라면 6-8절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3절에서 조건적으로 언급된 저주가 이제 실제화됩니다.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당신 목소리를 순종하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셨지만(7절)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강퍅하여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8a절). 이 불순종의 결과로 언약에 따른 저주가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언약의 조문들을 지키지 않았기에 언약 규정에 따라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임했습니다(8b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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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반역은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행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 사이에 있는 반역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전철을 따라 여호와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다른 신을 섬김으로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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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지금까지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은 반역이었습니다. 망해가는 유다의 상황을 안타까워하시며 선지자를 통해서 돌이키도록 예언하시며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한는 일입니다. 장차 올 재앙에서 살아날 길을 예배하시고 그렇게 살아가길 원하셔서 오래 참으심으로 모든 것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창조하심과 구원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주권을 가지신 왕됨을 부인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 하나님 아닌 것을 왕으로 삼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배은망덕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호와의 말씀 듣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다른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던 그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신앙은 정치입니다. 정치는 누가 왕이냐의 싸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왕됨을 거역하고 우상을 왕으로 삼은 반역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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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온전한 기억이 오늘의 신앙을 결정합니다. 지금 진행되는 정세에 대한 상황을 말씀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라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며 귀기울여 주의 말씀 듣기에 힘씁니다. 생사화복이 주께 있음을 믿는 자만이 주님의 뜻과 마음 그리고 계획하심에 관심을 가지고 날마다 주 앞에 나아가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무시하고, 탐욕에 눈이 멀고, 하나님 아닌 것을 왕으로 모시는 우상숭배는 결국 반역의 길이며 자멸의 길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깨는 행위로서 응당 이 언약을 깨는 자에게 주어지는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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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3절 반역에 대한 재앙은 소통의 단절로서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재앙은 필연입니다. 이 재앙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의 중보도 듣지 않으시고 그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부르짖어도 구원해 낼 수 없는 재앙입니다. 비록 그들 섬기던 신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누구도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내린 재앙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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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에 대한 필연적 재앙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지라도 이제 여호와는 반역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참으셨고 기회를 주었으며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심지어 재앙이 내려와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그토록 의지하고 분향하며 제단을 쌓은 신들의 숫자가 허다하다 하더라도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시작되면 누구도 여기에서 절대로 구원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전에도 말씀하셨듯이 우상은 무지하고 무능하며 헛되고 헛된 정말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이며 생명도 능력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지 않으니 대번에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게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겠지만 구원의 문이 닫힌 것이니 누구도 열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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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만왕의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창조주 구원주 재림주 심판주로서 주되심에 대한 고백이 일순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 아닌 것을 왕으로 섬기며, 종노릇 하던 데에서 참된 왕, 진짜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왕이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되고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만왕의 왕되신 주님을 고백하고 그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이 거룩한 백성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입니다. 종과 백성, 자녀와 양은, 주되시며 왕되시고 아버지요 목자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되신 주님의 음성 듣기를 거절한다는 것은 심각한 반역으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거역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소통을 거부하고 말씀을 듣지 않게 되니 여호와께서도 더이상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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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에 일방적 간구만 있다면 기도마저도 우상숭배하는 이들과 변별력 없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만든 우상일 뿐 하나님을 자기 욕심과 소원을 들어주는 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대로 구하기만 할 뿐 정작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귀기울이지도 관심도 없고 듣지 않기에 순종하는 삶도 없습니다. 오직 탐욕에 점철된 헛된 것으로만 가득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상은 성읍의 수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하고 많습니다. 모두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고 따르는 것 같지만 각자가 만든 우상에게 절하고 예배하고 제물을 바치면서 결국 자신의 탐욕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재앙이 멀지 않은 모습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이 과연 여기에서 멀까요? 그래서 주님의 주 되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귀기울이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이 낯설게 다가오나요? 아님 익숙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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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반역은 중보마저도 소용없게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예레미야에게 반역한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합니다. 그들을 위해 부르짖고 구해도 또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더이상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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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왕되심을 거역하는 반역은 결국 언약을 파기한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셔서 부르짖음에 응답하고 소통하여 인도와 보호와 공급하시겠다는 모든 것들을 단절하고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생사화복을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들에 의존했기에 결국 구하는 대상도 이미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우상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을 아시므로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시지만 이제 이스라엘이 절박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는 간구를 할 지라도 이미 때는 늦어서 더이상 여호와께서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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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여호와께 아룁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이 단절되어버리는 것은 결국 죽음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늘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귀가 더 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간구는 구하지 않아도 필요를 아시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간구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이미 여호와의 의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의와 욕망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여호와께서 들으실리 만무한 것입니다. 반역은 이토록 모든 관계를 깨고 다시 하나님과 단절되고 깨어진 관계가 되어 죄와 사망 아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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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14(순종의 거절과 심판의 필연성) - 묵상도움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죄악을 고발하며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9-10a절에서 이스라엘의 배반을 정치적 반역으로 규정하십니다. ‘반역’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케셰르’는 정치적 모반을 의미합니다(cf. 삼하 15:12; 왕하 11:14; 17:4).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9절). 이들은 참된 왕 야훼의 통치를 거절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우상을 새로운 통치자로 섬기며 조상들의 악습을 따랐습니다(cf. 삼상 8:5이하; 호 13:10).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10b절).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은 이미 멸망을 당한 북 왕국뿐만 아니라 남 왕국을 포함한 전체 이스라엘이 자기 조상들에게 부여된 언약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야훼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언약을 파기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심판은 필연입니다(11절). 야훼께서 배반한 자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 재앙은 확정된 것이라 이들이 그분 앞에 간구하고 탄식하여도(11b절), 예언자가 이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하여도(14절; cf. 7:16; 14:11; 15:1)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구원의 문은 완전히 닫혔습니다. 야훼께서 들어주시지 않자 우상들에게 살려달라고 울부짖겠지만, 우상은 이들을 구해줄 수 없습니다(12절). 재앙의 때에 이스라엘이 그처럼 열심히 섬겼던 우상들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상숭배자들은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헛것이 됩니다(cf. 2:5). 우상들이 성읍만큼 많이 있고, 이들을 위해 세운 제단들이 예루살렘의 골목만큼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13절; cf. 2:26-28), 이것들은 야훼의 분노만 더 할 뿐 추종자들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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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반역에 대한 재앙은 그 어떤 제의적 행위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여호와의 집에서 꾸미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물로 자신들에게 임한 재난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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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재앙 선포에 대해 반응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제물과 제사를 드리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악한 음모라고 말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는 삶의 열매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과 제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호와를 향한 기만이며 열납되지 않는 빈껍데기 예배이며, 향기없는 예배이며, 우상숭배와 같은 제의일 뿐입니다. 그들 생각처럼 제사로 재앙을 비껴 나갈 수 있었다면 기뻐하겠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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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신앙은 예배당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가장과 직장 그리고 세상에서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는 일,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고민하고 품고 묵상하는 것, 그리고 되새김질하면서 고민하고 기억하고 선택을 좌우하게 하는 가치, 간절한 열망을 갖고 추구하는 것, 하루나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은 시간 동안 지배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가치요 왕이요 주인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 아닌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자신에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따라 살면 우상을 닮아가서 무지하고 무가치하고 무자비하며 무의미한 삶으로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탐욕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기껏 예배당에서 예배하며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고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신앙과 제의는 껍데기 일뿐 하나님께서 받으시거나 기억하시거나 인정할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제의는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난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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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제의적인 예배,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삶의 예배, 그리고 골방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며 드리는 개인 예배, 이렇게 공동체와 삶과 개인의 세 가지 예배가 일치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정의와 공의의 열매와 개인의 삶의 변화가 수반되어 일치된 예배를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드리는 합당한 예배,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린들, 아무리 많은 제물을 드린들 그것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제물이 아니라 기억되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아무런 역사도 응답도 없는 껍데기 예배일 뿐입니다. 정말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지 그래서 합당한 예배인지 점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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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절 반역은 결국 재앙을 불러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세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반역은 하루아침에 좋은 나무가 꺾여 버리게 합니다. 바알에게 분향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일으켰고,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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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뜻을 이루는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맺기를, 여호와께서 꿈꾸시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세상을 만들어 늘 좋은 열매를 맺는 푸른 나무로서, 돌감람나무였던 이스라엘을 참감람나무가 되게해 주셨습니다. 이를 언약하시고 신실하게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반역은 하루아침에 이 모든 역사를 버리고 잃어버리고 깨어지게 했습니다. 바알에게 분향하면서 여호와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려 했고, 여호와의 뜻을 구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여호와의 노여움을 샀으며,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왕이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왕으로 섬기는 악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만군의 여호와의 재앙을 선고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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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우리를 돌 감람나무 같던 우리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고, 죽은 것같은 우리를 참포도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 맺어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백성, 거룩한 나라로 변화되고 열매맺는 복있는 자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그 복된 길을 거절하고 참감람나무 참포도나무에서 떨어진다면 우리는 살아 잇으나 죽어 있는 자로 사망의 종노릇하는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부지런히 심을 열매가 무엇인가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곧 성령의 소욕을 따라 주를 따르고 위해서 살아가는 성령의 열매인가요? 아니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욕심으로 점철되어 가는 탐욕의 열매인가요? 화로다 나여 하시는 여호와의 재앙이 아니라 복되도다 내백성이여 하시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열매 맺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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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17(제사가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 - 묵상도움글

운문으로 된 15-16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아마도 전승과정 중에 훼손을 경험하였기에, 정확히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전체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다시금 형식적 제의로 당신을 찾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cf. 6:20; 7:21-23). 이들은 마음 속으로는 못된 짓을 계획하면서도 성전을 찾아와서는 거룩한 고기를 드립니다. 이들은 제사로 재앙을 비켜 지나가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의 생각대로 제사로 재앙을 면할 수 있다면 이들은 기뻐 날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과거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였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의 관계가 현재의 잘못을 덮어주지 않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거센 바람에 활활 타오르는 불에 떨어진 나무와 같습니다. 제의도 신학적 특권도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에게서 재앙을 면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15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못된] 책략이나 꾸밀 때 그에게 나의 집에서 무슨 권리가 있겠는가? 기름진 짐승과 거룩한 고기가 네게서 재앙을 비켜 지나가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너는 기뻐 날뛸 수 있으리라.”

수사적 질문을 사용하면서 다시금 하나님 말씀에의 순종이 결여된 제의를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사랑하는 자’(→ 12:7; cf. 사 5:1)라 부르는 그분 백성이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성전을 찾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제 생각에 우선하는 자들은, 그들이 비록 성전제의에 충실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성전제의가 불의한 자들을 재앙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함이 없는 제의는 아무 효력이 없는 사람의 행사일 뿐입니다(cf. 6:20; 7:21-23).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번역이 맞는다면 하반절(‘그렇다면 너는 기뻐 날뛸 수 있으리라’)은 이들의 제의적 신앙을 풍자적으로 고발합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희의 제사를 받으신다면 너희는 기뻐 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너희 생각일 뿐입니다.

16절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대조적으로 비교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은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좋았던 과거가 제의적 경건에 사로잡힌 현재의 잘못을 탕감해주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한 때 하나님과 맺었던 특별한 관계(언약)가 이스라엘의 실존을 무조건적으로 지켜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형식적인 제의에 몰두하는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한 시들은 나무이기에 불에 던져질 뿐입니다. 현재의 문맥에서는 ‘거센 폭풍소리와 함께’로도 번역될 수 있는 ‘큰 소동’(요란한 함성소리)은 징계의 심판이 전쟁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암시해줍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비유적으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 1:2)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시 52:10[8]; 렘 17:7-8)를, ‘의인’(시 92:12-14)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됩니다.

17절 앞의 두 절과 달리 산문으로 된 17절은 동사 ‘심다’에 의해 16절의 나무 비유에 연결됩니다. 이 절은 15-16절에서 선포된 심판의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야훼께서 직접 심은 나무(cf. 2:21; 사 5:2)인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바알을 숭배하여 그분을 화나게 하였기에(cf. 25:6, 7; 32:29, 32; 44:3, 8) 심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 10절)은 이스라엘 전체가 죄악에 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악’과 ‘재앙’은 동일한 히브리어 ‘라아’의 번역이다. 악한 생각과 행위가 악한 결과(재앙)을 가져온다는 히브리 사람인들의 통합적 사고를 읽을 수 있습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 아버지

언약 백성으로서 주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목소리 순종하며 그 명령 따르길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의 길 가기 원합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일들을 끝까지 이루셔서

우리가 지금 주님의 나라 살게 되었는데

날마다 순종으로 아멘하며 영광 돌리지 못하였음을 고백하며

이제는 순종으로 영광 돌리길 또한 원합니다. 

주님의 꾸준한 끊임없는 경계와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거룩한 교회이게 하옵소서. 

언약에 신실하고 

우리 왕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지금도 우리 삶에 잔재하고 있다면

오늘 그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주님 계신 곳 하늘에서 

날마다 우리의 간구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날마다 뵈옵기를 기뻐하는 믿음 주옵소서. 

탐욕에 점철된 수많은 우상들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확신있는 믿음 주옵소서. 

우리의 중보의 능력이 깨어지지 않게 하옵시며

우리 주 예수님의 중보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을

늘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도 주님의 이름에 힘입고

도고할 때에 주께서 들어주시길 원합니다. 

날마다 공동체와 삶과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일치된 예배, 합당한 예배자로 살게 하옵소서. 

원래 우리를 좋은 나무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세워주셨듯이 

좋은 열매 맺는 나무로 살게하시고

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아름다운 나무 되고

사시사철 열매 맺는 푸른 나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열매 맺는 감람나무 되게 하옵소서

잠시라도 왕되신 주님을 거역하거나

주의 분노를 사는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악한 일에 미혹되거나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피할 수 없는 재앙을 부르는 삶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로서의 삶, 복을 부르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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