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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0:17-25 심판에 대한 애가와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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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경고를 듣지 않던 유다는 결국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에워싸인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짐을 꾸리라 말하고,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멸망의 원인들과 결과를 애가를 통해 그린 후에 여호와를 향하여 긍휼과 간구의 기도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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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7-25(멸망에 대한 탄식) - 구조

10:17-22 피할 수 없는 멸망

  10:17-18 심판의 선고(예언자적 신탁)

  10:19-20 1인칭 탄식

  10:21 재난(심판)의 원인

  10:22 심판의 선고(예언자적 신탁)

10:23-25 간구의 기도

  10:23-24 하나님의 공정을 간구하는 일인칭 기도

  10:25 이방민족들의 멸망 간구

17-25절은 크게 17-22절과 23-25절의 두 단락으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1인칭 탄식(19-20절)을 중심으로 예언자에 의한 심판 선언이 앞(17-18절)과 뒤(21?+22절)를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지혜문학적 색체로 운명의 결정권자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23-24절)와 시편 79:6-7과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이방민족들의 멸망을 간구하는 기도로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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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 22절 심판의 예언이 성취될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심판의 선고). 

유다의 멸망이 임박해서 적군에 에워싸인(포위된) 가운데 있는 이들이 살기 위해서(또는 유배를 가기 위해서)는 이제 짐을 꾸려야 합니다(597년과 587년의 1,2차 유배가 배경으로 보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있는 백성을 멀리 던지실 것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유다 성읍은 황폐하게 되어 승냥이들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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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많은 선지자들과 여러 징조들을 통해서 예고하고 경고한 것을 듣지 않고, 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상태를 개선하지 않는 유다는 마침내 북방의 군대를 통해서 함락의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비록 바벨론 군대가 오는 것이지만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의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이 때에 마지막으로 살 수 있는 길은 유배를 가기 위해서 짐을 싸는 일입니다. 더이상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용서하고 개입하셔서 대적들을 물리치는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헛된 소망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결정하시고 진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괴로운 여정 유배의 생활 속에서 마침내 자신들의 크나큰 과오를 깨닫길 기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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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인의 종말은 어느 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가옵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떠나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늘 깨어서 준비하지 않는다면, 매일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경고하시고 돌이키길 원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는 여정으로 채워가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주께 있음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바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요, 복있는 자의 길이며, 거룩한 백성의 길입니다. 지금 괴로운 유배와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주께서 구원하실 날을 소망가운데 바라보면서 감당할 힘을 간구하며 인내로 경주해 가는 길만이 살 길입니다. 주님의 긍휼에 소망을 품고 나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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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7-18(심판의 선고: 예언자적 신탁) - 묵상도움글

이 단락은 적에게 포위된 예루살렘에게 주는 말씀으로 주전 597년의 제일차 유배 또는 주전 587년의 제이차 유배를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에게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구원 가능성은 없기에 주민들은 점령군에 의한 유배를 대비하여 짐을 싸야 합니다. 야훼의 극적 간섭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헛된 소망에 불과합니다. 바로 야훼께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다윗왕조의 보호자요 구원자셨던 야훼께서 이들의 적이 되어 예루살렘과 유다의 주민들을 멀리 이방 땅으로 내던져 버리십니다. 유일하게 남은 길은 성이 함락되어 황망 중에 사로잡혀 빈손으로 먼 길을 끌려가지 않도록 필요한 물품을 미리 싸놓고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뒤따르는 탄식(19-20절)의 배경 역할을 하는 17-18절의 해석은 특히 일부 어려운 표현들과 문장의 훼손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17a절(“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호하며, 또 ‘짐 꾸러미’로 번역한 ‘킨아’는 구약에서 한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18절의 ‘이번에는’의 연결점도 불분명합니다. 18절의 마지막 문장(“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은 전혀 불완전합니다. 

# 10:22(심판의 선고) - 묵상도움글

17-18절처럼 22절도 19-20절의 탄식상황의 배경 역할을 담당합니다. 17절은 예루살렘의 포위공격을 전제하는데 비하여, 22절은 전쟁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키려 적들이 벌써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적들이 가까이 진격해 옵니다. 이들의 원정 목적은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사람이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다의 성읍들은 폐허가 되어 승냥이(자칼)가 그곳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cf. 9:10[11]). 승냥이로 번역된 자칼은 황무지에 사는 대표적 들짐승입니다. ‘크게 떠드는 소리(라아슈)’는 지진이 난 듯이 땅이 뒤흔들리는, 사람들이 공황에 사로잡힌 큰 소란을 함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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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절 심판은 총체적으로 모든 것에 임할 것입니다(심판의 범위). 

애가(哀歌) 속 당사자가 당한 괴로운 일들이 연이어 고백됩니다. 내 상처(중상), 내 장막(줄), 내 모든 줄(휘장), 내 자녀가 당하고 무너지고 끊어지고 떠나가서 고난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참아야 할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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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행하신 심판에 떨어진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치료가 불가능하고 너무나 심해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파괴된 장막들은 다시 세울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없고, 자녀들은 모두 떠나버려서 재건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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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맞기 전에 돌이켜야 했고, 깨달아야 했고, 끊고 버리고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강퍅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결국 그토록 붙잡았던 헛된 것들은 아무런 힘도 도움도 될 수 없는 심판의 때에 오히려 상처를 당하고 무너지고 끊어져서 의지할 수도 소망할 수도 피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아직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이 고난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거든 재건이 불가능한 상태를 맞기 전에 부정하고 불의한 길에서 돌이켜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이 살 길입니다. 고난의 시간을 자기 갱신의 계기로 삼을 줄 아는 이들이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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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9-20(1인칭 탄식) - 묵상나눔글

야훼의 심판에 떨어진 화자 ‘나’는 자신의 절망적 현실을 비유적 표상을 사용해 탄식합니다.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부상이 너무 심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나 적들의 갑작스런 습격으로 줄이 끊어지고 휘장이 찢겨져 완전히 훼손된 장막보다 더 절망적이다. 파괴된 장막은 수선하거나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나’의 처지는 자녀들이 모두 떠나버려 재건이 불가능합니다.

탄식하는 ‘나’가 누구인지 본문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내용에 따라 (유다를 포함하여) 예루살렘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물론 누군가가 예루살렘이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옮겨놓은 말은 아닙니다. [예레미야서 뿐만 아니라 에스겔서에서도 예루살렘은 자신의 미래적 멸망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 멸망을 내다볼 수 있었던 예언자가 예루살렘의 입장에서 [미리] 예루살렘의 절망적 현실을 탄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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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절 심판은 목자와 양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심판의 원인). 

이와 같은 심판을 맞이하게 된 이유는 먼저 목자(왕과 지도자)들이 어리석어서 여호와를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 떼(백성)들은 그런 목자들을 따라 좋아하다가 결국 함께 멸망하는 길로 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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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은 살아계신 여호와를 의뢰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힘과 지혜와 용맹을 자랑하면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하며 여호와 아닌 것에 소망을 두면서 나라를 꾸려갔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는 형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여호와의 통치에 따라서 행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길이 아닌 다른 헛된 길로 행하였기에 그들에게 형통은 이미 먼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유다의 멸망 곧 양떼의 흩어짐의 일차적 책임을 지도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전횡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무지한 백성들은 그들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지만, 스스로 하나님이 뜻을 옳게 분별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쌓아가는 일에 게을러서(무관심과 강퍅함을 포함하여) 마침내 소경같은 지도자들의 인도에 함께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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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은 둘째치고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바른 말씀에 대한 해석과 이해와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이러한 말씀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부지런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양육해 가는일에 전념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헛된 것들을 가르치고 전파하느라, 그래서 자신의 힘과 명예와 부를 축적 하면서 영적 감각과 정결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에 의존한 결과는 형통의 길이 아니라 불순종과 멸망과 소경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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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떼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잘못된 지식과 지혜로 인도한 목자들을 지지하고 좋아한 것도 양 떼입니다. 그런 지도자들을 찾고 요구하고 지지하며 좋아했기에 잘못된 지도자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만일 찾지 않고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런 이들이 지도자로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좋아하면서 한통속이 되어 간 것입니다. 지도자와 양 떼 모두 책임의 경중은 있겠으나 총체적으로 타락한 데는 결국 함께 망하고 몰락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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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등의 지도자들이 바른 신앙 바른 신학 바른 목회를 말씀에 기반하여 세우고, 목회와 양육과 설교등에 있어서도 바른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터인데 사실 바르게 한다고 하지만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왜곡되고 갇혀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 속에서 배우고 만난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은 결국 성도들이 영양 결핍이나 거짓 가르침에 빠지게하거나 교회 안에 있어도 능력을 잃어버려서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지 않는 이상한 성도들이 양산되는것입니다. 물론 언행과 신행 모두 불일치 되는 지도자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겸손하게 말씀앞에 나아가서 내가 알고 있는 교리와 틀과 선입견을 가지고 듣고 싶어하는 말씀만 들을 귀가 아니라 정말로 내게 필요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들을 수 있는 귀를 열고 들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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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1(재난/심판의 원인) - 묵상도움글

멸망의 심판선언(17-18절)과 심판이 가져온 절망적 현실에 대한 탄식(19-20절)에 뒤이어 그 원인(21절)이 언급됩니다. 20절(장막)의 경우처럼 ‘목자와 양’의 유목민적 표상이 다시 사용됩니다. 목자와 양떼를 구별하여 양떼가 흩어진 책임을 목자에게서 찾습니다. 이스라엘과 근동에서 목자는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혜자들에 속하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묻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따랐습니다. 이들은 야훼의 가르침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에 의존하여 백성을 이끌다가 멸망을 자초하였습니다. 야훼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짐을 당하였습니다. [예언자에게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은 확정된 사실이기에 완료형으로 기술합니다.]

양떼가 순진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오도한 목자를 지지한 것은 양떼입니다. 지지하지 않았으면 그런 지도자가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되면 결국 한통속이 됩니다. 책임의 경중을 물을 때는 목자와 양을 분리하고, 총체적 타락을 말할 때는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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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4절 심판 속에서 다만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심판의 간구 1)

예레미야는 사람의 길과 걸음을 지도함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징계를 하시되 진노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규례를 따라(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너그럽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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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잠 16:9; 20:24). 사람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종 주체는 아닙니다. 유일한 결정권자이신 여호와께 민족의 운명을 묻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간 교만한 어리석음의 결과는 결국 멸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파국은 이것을 결정하신 여호와에 의해서만 다시 극복되거나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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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면서 예레미야는 간구하고 있습니다. 죽을 죄를 저질러서 징계를 받고 있지만 그것으로 끝내주시고 진노하여 멸망시키지는 말아 달라는 요청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간구이지 이 모든 것에 대한 결정권, 주권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다만 그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면서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드리다가 여호와의 주권을 부인하는 데로 나아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전달하고 기도하며 간구 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거나 강제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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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3-24(하나님의 공정을 간구하는 일인칭 기도) - 묵상도움글

19-20절처럼 23-25절에서 다시 ‘나’(예언자)가 화자로 등장하여 공동체를 대신하여 간구합니다. ‘나’는 지혜전통에 속하는 인간의 운명적 한계에 근거하여(23절)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합니다(24절). 공동체를 대신하는 ‘나’는 간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잘못(범죄의 결과로 주어진 멸망)과 한계(멸망의 필연성)를 인정합니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야훼여, 저는 사람이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님을, 길을 걷는 자가 자기 발걸음을 정할 수 없음을 압니다.” 사람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cf. 잠 16:9; 20:24). 사람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종 주체는 아닙니다. 유일한 결정권자이신 야훼께 민족의 운명을 묻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간 교만과 어리석음의 결과가 멸망이었습니다. 유다의 파국적 운명은 이를 결정하신 분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운명의 주인이신 야훼께 책망의 훈계를 청합니다.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는 “저를 견책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공정으로 하시고”로 옮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애(사랑)에 근거하여 죄악의 결과(심판)로부터 무조건적으로 구속해주실 것을 간구하는 대신에 “공정으로 견책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과 자신의 잘못을 철저한 인정하면서 그분께 미래의 가능성을 부탁합니다. ‘나’는 공정과 진노를 구별하여 전자는 견책과 관련해서, 그리고 후자는 완전한 멸망과 관련해서 사용합니다. 여기서 진노는 심판 받은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하나님의 부정적 작용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공정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공정으로’는 ‘알맞게’를 함축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는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있을 수 없음을 보고 진노대신에 공정으로 채찍질해 주시길,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는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내주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진노는 영원한 멸망입니다. 징계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586년의 징계로 끝내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합니다. 그러나 간구이지 주권자는 여호와입니다.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분에게 전달할 순 있어도 그분을 강제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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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절 심판은 유다와 열방 모두에게 일어날 것입니다(심판의 간구 2)

간구의 내용이 이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족속에게 향합니다. 그들에게 분노를 부어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야곱)을 멸하고 황폐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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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열방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이방민족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삼펴 없애버리고 약속의 땅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속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간구는 결국 유배된 땅에서 다시 돌아올 것을 소망 중에 바라며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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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다고 해도 자신들이 행한 폭력이 정당화되진 않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행한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죄악에 대한 심판 또한 피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들어서 교만과 우상숭배와 정의와 공의에서 멀어진 이스라엘을 치심은 이스라엘이 부끄러운 줄 알아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려 함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도구로 쓰임받은 바벨론은 어느새 교만해져서 자신들의 힘과 용맹과 지혜로 가능한 것인줄 착각하면서 여호와의 주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끝내 벗어나거나 깨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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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5(이방민족들의 멸망 간구) - 묵상도움글

시편 79:6-7에 평행되는 25절은 야훼의 의로운 심판이 야훼를 경배하지 않는 이방민족들에게 떨어질 것을 간구합니다. 이들은 야훼를 모를 뿐만 아니라 야곱(이스라엘)을 삼켜 없애버리고 그의 땅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이 이방민족들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의 길과 걸음을 지도하시며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믿사오며

징계를 통해서라도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자비에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당한 고난을 통해 깨우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옳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고통 중에도 주님 주신 소망으로 잘 견뎌 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와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성도로서의 책임을 소홀함 없게

말씀을 맡은자로서 묵상하는 자로서의 소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므로 말미암아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잘 듣고 행하게 하옵소서. 

말씀위에서 바른 신앙, 신학, 목회 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길과 걸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발걸음과 길을

말씀의 빛이 비추시는 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가운데서도 긍휼과 자비를 

기억해 주시옵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을 때에도

선한게 쓰시는 도구 되도록 정결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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