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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9:17-26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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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곡하는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서 통곡하게 하여 지금 시온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또 슬픈 노래로도 가르치라고 합니다. 지금 사망이 문앞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참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지혜와 용맹과 부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것이어야 하며, 여호와의 벌을 피하려면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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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0절 지혜는 슬픈 노래와 현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완악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심지어 죽음의 재앙이 전면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백성에게 곡하는 (지혜로운) 부녀들을 불러서 이들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상황을 깨닫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입의 말쓰을 받을 수 있도록 애곡하면서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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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는 망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거처가 헐림으로 인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완악하고 무지한 백성은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곡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애곡하게 하여 상황의 심각성을 가르치도록 합니다. 심지어 슬픈 노래를 가르쳐서라도 깨닫게 하라고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 강퍅해지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현실의 심각한 상황을 깨달을 만한 감각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들, 상식 이상의 특별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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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귀에 들리는 애가들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또한 죽음의 재앙이 너무 전면적으로 엄청나기에 기존의 곡꾼들로는 충분하지 안기에 사람을 보내서 부르고, 심판이 임박했기에 빨리 와서 애곡하라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또 함께 슬퍼해도 않을 만큼 강퍅하고 냉랭하고 무감각한 시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적 감각과 하나님의 사인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민감함, 그리고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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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2절 어리석음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곡하는 지혜로운 부녀들이 가르친 슬픈 노래의 내용들입니다. 죽음이 도적처럼 와서 자녀들과 청년들을 멸절하려 합니다. 사람의 시체가 분토같이 들에 떨어지고, 추수 뒤의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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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곧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처럼 임합니다. 아무도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으며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은밀하게 침입하는 죽음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합니다. 궁궐도 그리고 자녀들도 거리의 청년들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죽어간 시체가 허다할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거두는 사람이 없어서 들판의 거름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불능의 파멸적인 재앙에 떨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결국 자녀들과 청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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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도적과 같이 올 것이며 아무도 그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징조들을 통해서 경고하면서 그 날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아무도 모르지만 남유다의 심판은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예고하고 깨우치고 가르쳐 주시기에 피할 기회도 돌이킬 기회도 살 수 있는 기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경고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어리석음은 자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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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7-22(애가를 불러라) - 묵상도움글

하나님은 2인칭 복수의 청자 ‘너희’에게 여자 곡꾼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십니다(17절). 청자 ‘너희’는 애가의 대상인 예루살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자 곡꾼은 초상집에서 상주를 대신하여 슬퍼하며 우는 여자들로, 죽은 자의 영을 다루는 장례의식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이기에 지혜로운 여자들입니다. 

18절은 여자 곡꾼을 불러오는 목적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곡을 해서 상주들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눈꺼풀이 눈물에 젖게 합니다. 1인칭 복수 ‘우리’는 공동체와 고난을 같이하는 예언자의 연대성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백성의 완악함을 고발하며 심판을 선포하지만 백성의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지 않습니다. 

19절은 공동체가 애곡 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시온이 황폐해지고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집들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땅을 떠나야 합니다. 

20절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자 곡꾼들에게 전합니다. 이들은 제 딸들에게 애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죽음의 재앙이 너무 전면적이고 엄청나기에 기존의 곡꾼만으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모든 여자들에게 애가를 가르쳐 이들을 장례의식에 동원해야 합니다. 

21절은 곡꾼들이 부르는 애가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죽음이 몰래 창문을 넘어 들어와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에 비유됩니다. 어느 누구도 은밀하게 침입하는 죽음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합니다. 궁궐이나 호화 주택에 사는 귀족들이나 거리의 어린아이들이나 광장의 젊은이들이나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죽음에 넘겨집니다. 

22절은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선포하라고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체가 마치 추수꾼이 이삭을 베어 묶어 밭에 놓아둔 곡식단처럼 쓰러져 있습니다. [곡식단을 곡간으로 거둬들이기 전 단계만을 비교합니다. 추수꾼이 곡식단을 거두지 못하고 버려두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무도 시체를 거두는 사람이 없어 들판의 거름이 됩니다.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어 거리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불능의 파멸적 재앙에 떨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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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4절 지혜로운 자의 자랑은 여호와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인줄 아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합니다. 정말 자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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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은 자신들의 지혜와 힘과 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신의 힘과 건강을 자신하며 자랑하지만 어느 날 생명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과 생명은 오로지 여호와로부터 기인한 것인ㄷ 그것을 주신 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언제까지 소유할 수 있을지, 그리고 정작 자신이 모은 그것을 자신이 사용하거나 자녀에게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그것을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러한 것을 자랑한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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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아는 자가 참 지혜자입니다. 또한 여호와에 대해서도 자신의 욕망의 투영으로 만들어진 우상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경험한 것을 통해 바르게 알게 된 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 행하시는 분이며 이를 기뻐하시는 분임을 아는 자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며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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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아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지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결단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더불어 역사와 삶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활동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 곧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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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싫행하시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 당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실천했다는 자랑은 교만 또는 자기만족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자랑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애와 은총의 모습으로 우리를 향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거리입니다. 이는 실천적 신앙의 강조가 어느 순간 내가 주어가 될 수 있고 그것이 자칫 자신의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자랑하게 될 수 있습니다. 진짜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결정권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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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3-24(참된 자랑에 관하여) - 묵상도움글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이 단락은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살길을 찾을 수 있을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지혜와 힘과 부’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모방하며 살아야 합니다.(모두 지도자에게 하는 말이다. 지혜로운 자는 정치가를 말한다.)

23절 지혜전통에서 보자면 지혜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혜를 자랑하여, 용사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육체적 건강에서 나오는 힘을 자랑하며,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물질적 부를 자랑합니다. 이들은 ‘지혜와 힘과 부’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며 이를 감사하고 자랑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혜와 힘과 부’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봅니다. 반면에 23절은 지혜전통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간주되는 ‘지혜와 힘과 부’에서 인간의 교만을 봅니다. 사람들은 주신 분인 하나님보다 받은 선물인 ‘지혜와 힘과 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면서도 ‘지혜와 힘과 부’를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자랑스러워하며 이에 의존합니다.

24절 사람이 진정 자랑해야 하는 것은 ‘지혜와 힘과 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앎’은 인식론적 행위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앎’은 고백적 성격을 갖는 지식으로,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결단적 행위입니다. ‘야훼께서 누구이신지’를 아는 자는 역사와 삶 속에 계시된 그분의 활동을 깨닫고,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갑니다.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임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땅에서 ‘정의와 공의’(공정과 정의)를 실행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실천했다는 자랑은 교만 또는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자랑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애와 은총의 모습으로 우리를 향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거리입니다.

실천적 신앙의 강조는 어느 순간 내가 주어가 될 수 있고 자칫 자신의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자랑하게 될 수 있습니다. 행함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다가 예수님에게 고발을 당합니다. 진짜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이 땅에 우리가 하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결정권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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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6절 지혜로운 자는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할례자나 무할례자 모두 때가 되면 벌하실 것입니다. 이방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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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순종이 없는 제의를 거절하셨던 하나님은 할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몸의 할례가 하나님의 징벌을 면하게 해 주는 면죄부는 아닙니다. 몸의 할례는 유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도 행하고 있는 풍습입니다. 이 점에서 유다는 주변의 이방민족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몸의 할례를 받은 이방민족들이 징벌을 받듯이 몸의 할례를 주장하는 이스라엘도 징벌을 받습니다. 정말 유효한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들 모두 동일합니다. 특히나 이방민족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면 구원의 문은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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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이든 세례이든지 그것이 조직화되고 그 조직이 성장하면 제도가 지나칠 정도로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경우들을 봅니다. 조직 유지를 위해서 제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제도화 해가면서 원래의 취지나 목적 그리고 신학적 의미들을 상실하고 하나의 통과의례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들은 제의 자체에 매이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가령 율법에 대해서도 그것을 주신 취지와 목적과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목적을 잃고 형식만 남게 될 경우에 표류하게 되면서 결국 그 안에 이기적 탐욕이 판을 치고서 우상을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온전한 신앙, 날마다 주님 더욱 닮아가는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삶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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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5-26(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 - 묵상 도움글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제의를 거절하시는(6:20; 7:21-23; 14:12) 하나님은 할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몸의 할례가 하나님의 징벌을 면하게 해 주는 면죄부는 아닙니다. 몸의 할례는 유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도 행하고 있는 풍습입니다. 이 점에서 유다는 주변의 이방민족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몸의 할례를 받은 이방민족들이 징벌을 받듯이 몸의 할례를 주장하는 이스라엘도 징벌을 받습니다. 구원사적으로 마음의 할례(4:4; 6:10)만이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들에게 유효합니다. 이방민족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면 이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25절 “보라, [그] 날들이 오고 있다. 야훼의 말씀. 내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을 모두 징벌하리라.” 심판의 날(들)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할례가 여기서는 심판의 표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심판의 날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을 모두’ 징벌하는 날입니다. 심판의 범위가 이방민족들을 넘어 이스라엘에게도 미칩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외적 표지인 할례(창 17장)가 심판 받을 때에 이스라엘에게 어떤 도움이나 특권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할례나 다른 민족들의 할례나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26절 전반절에서 유다와 함께 열거된 그 주변 민족들(유다 남쪽에 있는 애굽, 요단 동편에 있는 암몬과 모압과 에돔, 그리고 이스라엘 북서쪽에 있는 사막에 사는 아랍족속들)은 모두 할례를 받는 민족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바벨론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7장에 의하면 할례는 계약의 표지입니다.] 후반절은 심판의 이유를 말합니다. ‘모든 민족’은 전반절에 이름이 열거된 할례를 받는 민족들을 가리키기에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이방민족들이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민족들에게 있어 육체의 할례는 단지 외적 표지일 뿐, 구원사적 특권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마음의 할례’만 유효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이방민족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편입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마음의 할례를 거절한다면 이방민족들처럼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 거둠의 기도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은 우리를 깨우시려고 경고하시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애가와 애곡속에 있는 이들을 긍휼이 여기며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뜻을 잘 분별케 하옵소서. 

임바간 심판의 때를 깨어 기다리게 하옵시며

우리의 무지로 자녀들과 젊은이들까지 부정한 것을 전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를 아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헛된 지혜와 힘과 부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게 하옵소서. 

형식적인 제의에 빠진 신앙과 삶에서 깨어

마음의 할례 곧 언행일치, 신행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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