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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7:30-8:3 우상숭배의 가증함과 심판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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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하게 하나님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또는 예레미야)는 예레미야(또는 청자)에게 머리털을 베고 통곡하라 합니다. 그들의 악행이 성전과 골짜기에서 자행되었고 자녀를 불살라 드리는 끔직한 만행도 서슴치 않고 있는 현실은 더이상 언약을 지속할 수 없어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진행될 것이며 심지어 남아 있는 자들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원할 정도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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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절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어제 누락된 부분)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머리털을 베고 우상숭배하던 산들위에서 통곡하라 명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여호와의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은 이 세대를 끊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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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고 기회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듣지 않고 오면하고 배반하며 반역했던 이스라엘, 언약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오래도록 참으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토록 완고하게 거절하는 이스라엘의 멸망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머리털을 미는 일은 슬픔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나실인 같은 이들에게는 모든 기한이 다 되었을 때 행하는 일들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마침내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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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통곡해야 할 곳은 벗은 산입니다. 이 산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던 곳입니다(3:21). 자신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바로 그곳에서 심판을 맞게 된 것입니다. 더이상 돌이킬 기회가 없고, 철저하게 스스로 자초한 길이라는 것을 알라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이 세대는 바로 자신들을 여기까지 지키고 보호하시며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 여호와를 배반하고, 심지어 반역하여 다른 헛된 우상을 섬겼으며, 제의적인 열심으로만 자신들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삶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지 않으므로 소외된 이들을 향해 자행한 심각한 폭력과 착취를 행한 이들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이 패역한 세대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심판하시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이 세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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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잃어 버린 이 세대를 향해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렘 2:31)고 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오늘 예레미야를 묵상해 가면서 오늘 이 세대를 향하여 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의 현 주소도 몰락해 가는 남유다의 상황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돈의 우상 앞에서 화려한 제의와 거대한 예배당에서 축척된 돈과 세력들이 권력이 되어서 주님의 주권을 어느새 탐내고 섬겨야 할 지도자들이 군림하려 들고, 지도자들의 죄악은 관대하며 가리기에 급급하고, 교회의 문턱은 높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공의와 정의는 굽어진지 오리이며, 행해지는 섬김은 기껏 세를 불리기 위한 낚시밥같은 사기에 가깝고, 오직 더 크고 더 많이 모르려고 혈안이 되어서 정작 내부의 부정부패에는 눈과 귀가 멀어버린 세대입니다. 주어진 힘으로 세상에 군림하려 하고,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향하여 장벽을 쌓고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면서 정치 권력에 빌붙어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청탁과 아부는 기본이고, 역사에 대한 무지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적 적폐에 대해서 기만적 용서를 들먹이고, 왜곡되고 편향되고 고착되어 시대에 뒤쳐지고, 시대의 문제에 제대로 응답해 주지 못하는 케케묵은 신학과 교리에 스스로 갖혀서 조그마한 안경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리 만무함에도 마치 자신들이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형국입니다.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못한 신앙, 전통에 갇히고 시대에 뒤졌으며 현실 문제에 응답해 주지 못한 얇팍한 신학, 청산되지 못한 역사 속의 죄악들을 포장하여 부끄러운 자화상을 가리기에 급급하여 역사적 부름과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역사에 대한 무지, 배움을 멈춰 버리고 수 십년 동안 앵무새처럼 외계어를 남발하면서 자유케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니라 겁박하고 협박하여 옭아매게 하는 율법주의와 구원주의의 세속화된 복음, 신본주의를 외치지만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며 탐욕에 똘똘뭉쳐진 가짜 복음을 부여잡고 조그마한 이슈와 시대의 바람에도 휘청거리는 교회들의 모습이 바로 남유다의 현실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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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통곡하면 거대한 공룡같은 이 세대의 침몰을 조금이나마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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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1절 잘못된 성전에 대한 열심은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악행으로 귀결 될 수 있습니다. 

유다 자손이 여호와 앞에서 행한 악행은 먼저 여호와의 집에 가증한 것을 두어서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자녀들을 불에 살라 드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께서 원치 않은(명령, 마음, 생각도 하지 않은 것임을 강조해서) 일을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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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골짜기마다 높은 산마다 여호와를 예배한다고 하면서 어느새 그곳에서 원래 바알을 숭배하던 문화에 물들어 버립니다. 풍요를 바라며 풍요 제의를 따르게 되었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헛된 우상으로 대체해 갔으며, 그곳에서 바알의 제의를 따라 음란한 행위들을 서슴지 않았기에 여호와의 집을 더럽히고 그들 자신들도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한다고 사당을 지었지만 이는 여호와께서 명한 것이 아닌 이방의 문화를 따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경악할 일은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지도 않았고 여호와의 마음에 생각지도 않은 자녀들을 불살라 드리는 인신 제사를 드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미 여호와께서는 제의의 규정들을 철저하고 세세하게 명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배려와 여러 사정들을 고려했으면서도 이방제의와는 철저하게 구별된 규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방 제의를 드리는 문화와 접촉해 가면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규례를 따라 단을 쌓아 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중심으로 제의도 열심도 제물도 변질되어 간 것입니다. 잘못된 성전 신학에 잘못된 제의와 열심이 급기야 자녀를 여호와께 드리면 더 복을 얻을 줄 착각하면서까지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이교적인 가증스러운 일들이 여호와의 집에서 행해지고 있는데에 경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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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2:29 에서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뒤에 대체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러한 말을 문자 그대로 이행해 버린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열심이 말씀에 대한 무지로 엉뚱한 행위들을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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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6:6-8(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은 당시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고민하다가 자녀를 드리는 것을 최고로 여기며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뭔가를 드려서 하나님을 만족시켜 좋아하실 수 있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다가 왜곡된 곳으로 빠진 것입니다. 글서 모든 것을 다 드렸다고 하면서 자기 경건을 과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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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간증들도 하나님께 다 드렸더니 하나님이 더 주셨다고 말하면서 신앙을 장사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욕심이 많아서 결코 돈으로 우리를 꼬드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지나친 열심을 조장합니다. 그런 열심이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은 오로지 제의적 행위적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닥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내가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많이 주시지 않는가?로 변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드리면서 그 이상을 기대하면서 드리게 됩니다. 주의 전을 향한 열심이 자기 과시나 자기 경건을 드러내는 데까지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헌신고 열심도 드림도 모두다 주님께서 정말로 원하시고 받으실 만한 것으로 드려야 하며 무엇보다 거룩한 산 제물 곧 삶의 자리에서 바른 길과 행위로 말미암은 산 제물이 중요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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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34절 말과 생각 그리고 행한대로 심판 받으니 마침내 땅이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심판의 날이 되면 그들이 그토록 사려고 헛된 제의와 행위로 열심을 품었던 바로 그곳이 오히려 죽음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토록 모으려고 했던 많은 것들을 자신들이 먹지 못하고 다 빼앗겨 다른 이가 먹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는 기쁨 즐거움 잔치가 사라지고 황폐하게 되리라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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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의 잉태, 죄의 장성함 그리고 사망에 이름이 탐욕의 멸망 공식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족하려했고, 여호와가 아닌 것을 향해 제의를 열심했으며, 여호와 아닌 것을 여호와로 섬기면서 헛된 것들을 얻으려고 헛된 것에 열심으로 예배한 것입니다. 생명없는 것에 대한 그들의 열심이 결국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그 우상을 숭배하던 바로 그곳에서 엎드러져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하나님과 단절된 말로로 가게된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진 것은 들짐승의 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마치 탐욕으로 점철된 채 모으기에 급급했던 모든 것을 다 쓰지도 못하고, 자녀들에게 물려주지도 못하고 배앗기고 잃어버리고 급기야 죽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고 버림 받았기에 더이상 기쁨과 즐거움은 사라질 것이며, 신랑 신부의 축제가 끊어지니 자녀생산이 멈출 것이며, 사람이 없는 성과 거리는 황폐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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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이 아니라고 했고, 그렇게 행하면 망한다고 했으며, 악행의 말로가 사망이라고 경고한 음성에 귀기울이지도 않고 완고하게 살아간 이들의 말로는 모든 기쁨과 즐거움과 희망이 사라져 버린 황폐함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우리 삶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지, 그것의 근원이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만일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찾을 수 없거든 그만큼 우리가 주님의 길로부터 멀리 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쌓아가는 말과 마음의 생각과 묵상이, 그리고 행실들이 결국 내일의 땅에 열매를 맺을 지 황폐함을 낳을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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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3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철저하게 행해질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대적들이 죽은 이들의 뼈를 끌어 내서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일월성신의 우상앞에 펼쳐지게 할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고 결국 그대로 썩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혹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차라리 죽는 것을 더 원할 정도로 비참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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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에 탐욕을 따라 생사화복을 주리라 믿고 섬겼던 그 우상은, 죽음을 막을 수 없었고, 죽음 이후의 모든 상황에 대해서도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을 만큼 거짓되고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뼈를 끄집어 내서 내어 널어도 그 우상들(일월성신은 결국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스스로도 그리고 그것들을 섬기던 이들에게도 결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죽어간 이들이 철저하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보게 되는 살아 있는 자들은 비록 심판에서 죽음을 면했지만 포로로 살아가는 그 삶은 차라리 죽는 것을 더 원할 정도로 비참하고 고통스러울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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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은 피조물이며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해코지도 무엇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심각한 것은 일월성신 이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돈의 우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주권을 휘청거리게 하고, 탐욕을 부추기고, 법과 정의를 굽게하고, 교회를 부정하게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해야 할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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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0-8:3(우상숭배와 살육의 심판) - 묵상도움글

<단락의 개요>

   7:30-31 우상숭배의 고발

         7:30 예루살렘 성전의 우상숭배

         7:31 도벳 산당의 우상숭배(31절)에 대한 고발

   7:32-34 (도벳 산당의 우상숭배와 관련된) 심판 선고(I)

   8:1-3 (더 파멸적이며 절망적인) 심판 선고(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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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하나님께서 가증스런 어린아이 희생제사를 고발하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루살렘 남서쪽과 남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다 도벳 사당을 세우고 어린아이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cf. 왕하 23:10). 후반절은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 드려졌음을 보여줍니다(cf. 미 6:7; 삿 11:29-40; 창 22장). 하나님은 분명하게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당신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주장하십니다. 이는 아마도 출애굽기 22:29b에 근거한 거짓된 혼합주의적 주장에 대한 반박인 것 같습니다(cf. 겔 20:26). 일부에서 바알에게 드려졌던 어린아이 희생제사(cf. 렘 19:5; 32:35)를 출애굽기 22:29b에 근거하여 여호와제의에 연결시켰던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이 희생 제사를 드렸는가?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내가 명령하지도 생각지도 않았는데 드립니다. 바알이나 몰렉에 드렸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이와 같은 이교적인 가증스러운 것이 여호와의 종교 안에서 하나님께 행해지고 있습니다.

출22:29, 겔20:26, 미6:6-7

어린아이를 희생제사를 드릴 때 성서적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출22:29에서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라고 말합니다. 뒤에 대체적인 부분을 언급하지만 대속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이행해 버립니다.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성경을 말씀대로 하지 않고 신앙이 좋다고 플러스 알파까지 하는 일이 자주 등장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드리라 하자 일부가 하나님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준행하며 자신의 경건을 과시합니다.

미6:6-7 에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 사람들은 당시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오늘날 교회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고민합니다. 당연히 최고의 신에게 나아가는 일이니 좋은 것을 가지고 나아가려 합니다. 일년 된 숫송아지(최고의 번제물), 수많은 양떼? 아니면 강물처럼 많은 것들? 아니 맏아들을(내 몸의 열매), 자식을 드리면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뭔가를 드려서 하나님을 만족시켜 좋아하실 수 있게 모든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자꾸 왜곡됩니다. 말라기의 십일조?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자기 경건을 과시합니다. 많은 간증들도 하나님이 다 드렸더니 더 주셨다고 장사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욕심많고 돈으로 우리를 꼬드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지나친 열심을 조장합니다. 그런 열심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제의적 행위적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내가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많이 주시지 않는가?로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릴 때 그 이상을 기대하면서 드립니다. 신앙이 없는 이는 차라리 문제가 안되는데 좋다고 하는 이들이 문제가 됩니다. 좋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열심히 자기 과시나 자기 이기적 경건으로 바뀌어가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 합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의 기쁨의 근원되시며

사랑과 섬김과 따름과 간구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그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몸된 교회로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를 세우셨는데

지금 몸된 성전에 세워가는 것이 

혹 가증한 것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헛된 탐욕으로 점철된 잘못된 열심이

주께서 명하지도 않고 뜻하시지도 않은 것으로 쌓아

마침내 참람한 것을 경건으로 가장하여

주님의 진노를 쌓아가지는 않았는지요.

주님 지금 켜켜이 먼지 쌓인 것처럼 쌓아진

교회 안의 적폐들을 분명하게 깨닫고

철저하게 청산해 내는 일을 미루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다시금 공의와 정의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으로

춤추게 하옵소서. 

생사화복이 주께 있음을 고백하면서

이 땅에 살아가는 시간동안

늘 주님의 면전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온전히 주와 동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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