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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6:16-30 여호와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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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율법을 따른다면 다시 평강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제의적으로만 나아갈 뿐 불순종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어서 북방 민족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한지 강조하고, 두려워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라 합니다. 그 날이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련을 통해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빚어 보길 원하셨지만 악행이 근절되지 않았기에 마침내 버려진 은과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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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1절 하나님께서 제의에 앞서 정의의 실천 곧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찾고 그리로 간다면 평강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은 거역하고, 파수꾼을 통해 말씀을 전하지만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재앙을 선포합니다. 이는 그들의 생각의 결과이면서 여호와의 말과 율법을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면서도 비싼 제물을 가지고 제의적으로 나오는 이들의 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총체적으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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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찾아야 할 옛적 길과 선한 길은 우선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로도 볼 수 있고, 또한 그곳에서 주신 거룩한 백성의 길 곧 율법의 길(19절)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길로 간다면 심령이 평강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길로 행하지 않습니다. 또한 파수꾼을 세워 나팔 소리를(여호와의 말씀) 부는데도 불구하고 듣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인도에 대한 불순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당하는 재앙은 스스로 자초하고 책임져야 할 재앙이면서(그들의 생각의 결과), 또한 하나님께서 배반한 백성을 징계하고 보복하는 차원(21절의 ‘장애물’)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제의적으로는 귀한 선물과 제사를 준비하였지만 여호와께서 이 번제를 받지 않고 희생제물도 달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에 대한 순종 곧 선한 삶이 배제되고 실천되지 않는 상태에서 드리는 제의가 아무리 귀한 예물을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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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예배자가 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값비싼 제물과 예물을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헛된 예배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제물보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제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형제와 화해하라신 주님의 말씀처럼, 삶에서 먼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자로 거룩하고 흠없는 제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됨은 단지 교회에 소속되고 예배에 충실한 것만 한정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우선 요구되는 선한 길로 행하는 삶을 따르고난 뒤에 하나님께 제의를 드릴 때 이것을 받으신다. 이렇게 믿음과 삶이 일치된 신앙이 신실하고 온전한 믿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의적 종교로 신앙과 예배의 삶을 소극적으로 가까스로 치루듯 예배하고 출석 도장 찍는 식으로 드리든지, 아니면 화려하고 값비싼 제물을 준비하여 내는 것으로 예배하든지 먼저 보시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상에서의 삶이 정말로 그 말씀의 뜻과 율법의 가르침 곧 선한 길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백성으로 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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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예배자입니다. 삶의 자리 바로 그곳에서 먼저 순종의 제사를 드리고 이어서 제의적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 받으시는 분입니다. 신실한 삶이 배제된 종교적 행위(제의적 행위)는 그저 몸짓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 내가 서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
내 영혼 거룩한 은혜를 향하여 / 내 마음 완전한 하나님 향하여 / 이 곳에서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어노인팅 ‘나는 예배자입니다’ 찬양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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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6-21(청종하기를 거절하는 백성)

하나님께서 논쟁의 문학적 양식을 사용해 이스라엘을 고발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지금의 길을 떠나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찾도록 초대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이 초대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16절).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기 위해 파수꾼-예언자를 보내시지만 전혀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지 못합니다(17절). 하나님은 이방민족들을 증인으로 불러놓으시고 당신 말씀과 가르침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18-19절).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야훼신앙을 제의종교로 왜곡시킨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제의적 열심으로 당신을 찾는 자들을 거절하시며(20절) 이들에게 미래가 없는 멸망의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16절 16-1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역사를 되돌아보시며 지금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십니다. 역사를 회고해 보면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지켜주셨던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의 길을 버리고 오래 전에 그분께서 생명으로 인도해 주셨던 ‘옛적 길’(18:15; 시 139:24)을 다시 찾아서 가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찾아 가야 할 길은 아마도 출애굽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cf. 2:2).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뒤를 따른 길이었습니다. 과거의 ‘선한 길’(좋은 데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인식은 미래의 삶에 대한 방향성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짤막한 답변(‘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으로 ‘옛적 길’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합니다(16b절; cf. 2:2-13). 지금의 길이 제공해 주는 눈 앞의 즐거움에 마비된 이스라엘은 ‘너희 자신이 쉴 곳’, 곧 야훼 하나님을 찾아야 할 이유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생명의 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척박한 광야 길을 지나야만 함을 아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대를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cf. 마 7:13-14).

17절 위험을 경고하여 주민들로 대비케 하는 파수꾼의 표상이 때로는 예언자에게 적용되기도 합니다(cf. 사 21:6-12; 겔 3:17; 33:1-9; 호 9:8; 합 2:1). 파수꾼-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실존을 위협하는 위험요소들을 찾아내서 이를 경고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예언자들을 보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며 위급함을 알려주셨지만 이들은 예언자의 나팔소리에 귀를 막았습니다(17b절). 이들은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예전의 좋은 길들을 거절하고 멸망의 길로 갔다. ‘할례를 받지 못한 귀’(10절), 곧 거짓된 샬롬의 메시지(5:12, 31; 6:14; 7:4)에 길들여진 귀에 회개를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외침은 허공을 치는 소리였습니다.

18절 16-17절과 20절은 야훼의 대화 상대자인 이스라엘을 2인칭 복수 ‘너희’로 언급하는데 반하여, 18-19(+21)절은 증인을 2인칭으로, 이스라엘을 3인칭 복수 ‘그들’로 언급합니다. 18-19a절에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나라들을 증인으로 불러 세우고 당신의 초대를 완강하게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민족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19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재앙은 이스라엘이 자초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생각에서 자라나온 악한 열매(‘그들의 생각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옛적 길 곧 선한 길’(16절)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제 길을 가다가 결국은 멸망에 도달합니다. 이스라엘의 죽음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과 율법(가르침)보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우선한 배교적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죄악과 배반의 씨를 뿌린 이스라엘은 재앙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20절 제의적 신앙을 비판하는 20절은 현재의 문맥에서 ‘그들의 생각의 결과’의 한 구체적 예가 됩니다. 귀하고 값비싼 시바에서 들여 오는 유향과 먼 땅에서 가져 오는 향품으로 하나님께 분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기름지고 풍성한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굶주려 이를 즐기시겠는가? 귀하고 값진 예물과 풍성한 제사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율법)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탐욕과 거짓을 일삼는 자들(13절)이 드리는 예물과 제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14:12; 사 1:11; 암 5:21). 제의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생활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순종(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이스라엘은 먼저 ‘옛적 길’을 찾아,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시바(스바)의 위치는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주류의 의견은 아라비아 남부에서 찾습니다. 시바는 유향(렘 6:20; 사 60:6)과 황금(시 72:15)과 향료와 보석(겔 27:22)로 유명했습니다. 유향은 제사 때 피우는 거룩한 향을 만드는 주 재료였습니다(출 30:34). 야훼께 예물로 드리는 소제에 첨가되거나(레 2:1) 진설병과 함께 화제(레 24:7)로 드려지기도 했습니다. 대속죄일에는 유향을 피워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렸습니다(레 16:12-13). 향품으로 번역한 ‘(카나 하톱’은 ‘창포’나 ‘향초 줄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유향과 향품은 모두 먼 곳에서 들여오는 귀한 수입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의가 아니라 정의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됨을 교회에 속함과 교회 예배에 충실함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됨과 십자가의 부활을 고백함은 이렇게 제의적인 것을 참된 모습이라 하는가? 제의의 불필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가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을 먼저 따르고 난뒤에 하나님께 제의를 드릴 때 그 제의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실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절 고발(20절)에 뒤이어 심판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 길에 장애물(걸림돌)을 놓아 잘못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지게 하십니다(cf. 겔 3:20; 사 8:14-15). 이스라엘의 멸망(재앙)은 이중적 성격을 갖습니다. ‘그들의 생각의 결과’(19절)라는 점에서 멸망은 이스라엘이 자초한, 책임져야 할 재앙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어 걸려 넘어지게 하셨다’는 면에서 멸망은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에 대한 그분 징계의 보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심판이기에 이 넘어짐에 예외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가족(집안)을, 이웃과 그의 친구는 공동체 전체를 의미합니다. 가정과 공동체가 모두 멸망에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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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6절 슬퍼하고 통곡하라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하시면서 계속 이들을 심판할 도구인 북방의 군대를 군데군데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북방에서 오고 큰 나라이면서 잔인하고 사랑이 없으며, 그들이 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군대입니다. 소문만 들어도 손이 약하여지고 고통과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을 정도입니다. 결코 그들을 대적할 수 없고 피할 수 없기에 다만 그 앞에서 슬퍼하면 통곡할 뿐입니다. 그들은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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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군대의 잔인함과 용맹이, 하나님의 심판의 측면에서는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반드시 이루어지며, 두렵고 떨림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고통이 클 것임을 말하기에 해산의 고통에 비교합니다. 그 앞에서 다만 슬퍼하며 통곡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이 시작되는 상황 앞에서 인간의 어떤 노력과 수고가 그것을 피하고 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고통이 그리 오래지 않길 기도하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깨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북방의 군대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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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무자비한 군대, 임박한 심판, 피할 수 없는 현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며 여호와의 말과 선한 길을 따르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아는일에 무지했고, 진실과 정의 그리고 공의를 행하는 데에 게을렀으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계시와 가르침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떠난 결과로 마침내 당면하게 될 심판의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매순간 매시간 매일 채워가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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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2-26(북쪽에서 오는 파괴자들) - 묵상도움글

예루살렘과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북방에서 내려오는 적들에 관한 말씀들(4:5-8, 13-18, 29-31; 6:1-5, 22-26) 가운데 마지막 자리에 놓여진 이 단락은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22-23절은 시온에 심판을 선언하는 말이고, 25-26절은 적의 침략에 어떻게 대처할지 권고하는 말입니다. 그 사이에 놓여진 24절은 공동체의 탄식에 속합니다. 22절 처음에 놓여진 사자의 전언양식은 전체 단락을 야훼의 말씀으로 보여주지만, 24절과 26절의 ‘우리’는 예언자의 말로 읽도록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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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30절 연단과 제련에도 악행을 근절하지 않는다면 버려진 은과 같은 신세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여호와의 백성들을 연단하고 제련하는 자로 삼아서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반역한 자,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 놋과 철과 같은 자, 사악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풀무불에 담금질을 해 단련하여 이모든 악한 것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결국 제거되지 않아서 버림 받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찌꺼기)’이라 부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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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여러가지로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와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반역한 자들이며, 하나님과 이웃사이에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이며, 놋과 철처럼 강퍅하고 고집스러운 자들이며, 사악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모두다 풀무불에서 맹렬히 불려 불순불이 제거되어야 하는데, 헛된 일이되어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었습니다. 결고의 말을 듣고 징계를 받았음에도 죄악으로부터 떠나기를 거절하는 이스라엘도 더 이상 새로워질 가능성이 없기에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길 거절하고 자신의 악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은 제련에 실패한 벼려진 은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더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쓸모 없다고 판단하고 버리셨기에 이스라엘에게는 멸망의 심판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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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하나님의 연단과 제련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는 주님이 손길을 연단과 제련의 과정으로 깨닫고 볼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을 갖길 원합니다. 또한 그렇게 깨닫게된 것들로 편협한 신앙을 양산하기보다, 겸손히 수용하고 돌아보면서 참으로 주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안에 제거 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과 습관과 왜곡된 전통들 그리고 개인과공동체에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다 버려야 합니다. 관행과 관습, 전통과 전례라는 이유로 고질적으로 자리하고 있고 도무지 변하지도 바뀌지도 성장하지도 열매 맺지도 못하는 현실, 맛을 잃은 소금처럼 다만 밖에 버려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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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7-30(이스라엘 백성의 시금자 예레미야) - 묵상도움글

본문 전승 상태가 나빠 예언자에게 하는 하나님의 독백인지, 또는 하나님과 예언자 사이의 대화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내용상 그리고 30절의 야훼의 3인칭은 후자를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27절의 화자는 하나님이며, 28-30절의 화자는 예언자가 됩니다. 예언자는 광석에 함유된 금석을 뽑아내어 정련하는 제련자(製鍊者) 또는 정련한 은의 순도를 조사하는 시금자(試金者)로 비유됩니다. 그는 하나님 백성의 시금자로 그들의 행위를 조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마음에서 불순종과 교만(불순물들)이 있는지를 살펴 이를 제거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악에서 백성을 정화시키는 자신의 사명이 헛수고로 끝났음을 알게 됩니다(cf. 5:1-11). 정련에 실패한 광석이 쓸모 없는 돌로 버려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화의 불에도 불구하고 깨끗해지기를 거절한, 깨끗해질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진 이스라엘도 그분에 의해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27절 “시금자(試金者)로 <요새로> 내가 너를 내 백성 가운데 세웠으니 너는 살펴보며 그들의 길을 시험하여라.”

전반절을 MT의 어순을 살려 번역하면 ‘시금자로 내가 너를 내 백성 가운데 세웠다. 요새[로]’가 된다. ‘요새’가 혼자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새’는 본문전승과정 중에 삽입된 난외 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의 의미를 ‘망루’로 잘못 이해한 본문전승자가 1:18과의 연관성을 보고 난외에다 ‘요새’를 써놓았고 그것이 후에 다시 본문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경계의 기능을 담당하는 망루는 요새의 주요한 한 부속 건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시금자로서의 사명에서는 실패했지만 그는 여전히 누구도 침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다시금 사명을 위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그분의 의지를 선포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1장과 달리 여기서는 백성의 영적 상태를 비판적으로 조사하는 임무가 부여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백성 가운데 시금자(試金者)로 세우시고 백성의 길을 살펴보고 시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시금자’는 광석에서 뽑아낸 금속의 순도를 조사하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시금자-예언자로 하나님 백성이 바른 길을 가는지, 그분 말씀에 순종하며 가르침에 따라 사는지를 세세하게 살펴 조사해야 합니다. 시금자-예언자는 그 기능에 있어 파수꾼-예언자(6:17)에 매우 가깝습니다.

28절 28-30절에서 시금자-예언자는 자신이 조사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참담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모두 고집 센 반역자들이요 비방과 타락을 즐기며 돌아다니는 자들입니다. 전반절과 후반절에 한 번씩 사용되고 있는 ‘그들은 다’는 유다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났음을 보여줍니다. ‘심히 반역한 자’는 고집불통의 반역자를,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는 이리저리 다니며 남을 헐뜯는 자를, ‘사악한 자’는 멸망을 가져오는 부패한 자(사 1:4)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27절)이라고 부르는 자들 가운데서 그분을 두려워하며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놋과 철’은 하나님 백성의 완고함과 공격적 성품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 1:18에 비춰볼 때 예레미야와 백성의 대비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쇠기둥과 놋성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시고,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놋과 쇠로 만들어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에게 고집 세게 반역합니다.

29절 “풀무[불]이 맹렬하게 지펴지고 불에 납이 다 타버립니다. 헛되이 녹이기만 했을 뿐, 나쁜 것들이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세계에서는 풀무에 광석을 넣고 화학 물질을 첨가한 후에 불을 지펴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은을 얻었습니다. 풀무 불을 더욱 세게 지펴 뜨겁게 하지만 금속과 불순물이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떤 이유에선가 광석에서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광물이 헛되이 녹이기만 했을 뿐입니다. 정련(精鍊)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돌이키려는 하나님과 예언자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좌초합니다. 예언자는 강도를 높여가며 이스라엘의 부패를 고발했지만 전혀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들어 치셨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더욱 완고하게 저항했습니다(5:3). 하나님과 예언자는 헛수고만 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본질에 속함이 들어났습니다. 불순종과 배반이 죽기 전에는 제거할 수 없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속성이 되었습니다.

30절 풀무 불에 들어갔지만 은을 뽑아내는데 실패한 광석은 쓸모 없는 돌로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경고의 말을 듣고 징계를 받았음에도 죄악으로부터 떠나기를 거절하는 이스라엘도 더 이상 새로워질 가능성이 없기에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거절하고 자신의 악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은 제련에 실패한 광석처럼 ‘내버린(버려진) 은’일 뿐입니다. 야훼께서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쓸모 없다고 판단하고 버리셨기에 이스라엘에게는 멸망의 심판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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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선한 길을 허락하시고 나팔소리로 깨워서

거룩한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시고 

그런 주님을 알아가고 묵상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의보다 먼저 삶에서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고

주님의 찾으시는 예배자로

어디에 있든 바로 그곳에서 예배자로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그 어떤 예물 보다 순종의 제사를 합당하게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깨닫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오랜 전통과 전례와 관행과 관습이라는 이유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그대로 안주하지 아니하고

바로 고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신실하게 행하게 하옵소서. 

단련하는 주님의 손길을 따라

버림받은 은이 아니라 보배로운 소유로 변화 성숙되는

그래서 정금같이 되는 역사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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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예레미야 13:15-27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멸망과 유배의 원인) 평화의길벗 2023.08.01 26
524 예레미야 13:01-14 내 백성 되게 하려 하였으나 평화의길벗 2023.08.01 16
523 예레미야 12:07-17 보배로운 소유에 대한 심판 평화의길벗 2023.07.30 25
522 예레미야 11:18-12:06 예레미야의 고백 1 ; 악인의 형통 앞에 평화의길벗 2023.07.30 18
521 예레미야 11:01-17 언약을 지키는 것과 깨는 것 평화의길벗 2023.07.29 30
520 예레미야 10:17-25 심판에 대한 애가와 간구 평화의길벗 2023.07.28 27
519 예레미야 10:01-16 창주조 하나님 앞에 헛된 우상 평화의길벗 2023.07.27 19
518 예레미야 09:17-26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평화의길벗 2023.07.26 25
517 예레미야 09:07-16 이 땅이 멸망한 이유 평화의길벗 2023.07.25 22
516 예레미야 08:18-09:06 무너져 가는 동족을 향한 눈물 평화의길벗 2023.07.23 21
515 예레미야 08:04-17 진리(말씀)에서 멀어진 결과 평화의길벗 2023.07.2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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