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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6:01-15 포학한 성 예루살렘을 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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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학한 예루살렘에 임박한 재앙의 상황을 실제적으로 예언하고, 포학이 가득한 모습들을 제시하며 황폐하게 되리라 선언하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그들을 향해 본노하며 결국 모든 소유를 잃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가증한 일을 행한 그들을 반드시 벌할 것에 대해서도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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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거든 이제라도 여호와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인근에 사는 베냐민 지파에게 피난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들라고 명합니다. 북방에서 큰 파멸을 엿보는 자들이 오는것이 암박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자칭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2)이라고 하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는 포학이 가득한 성(6)일 뿐입니다. 이들을 멸절하기 위해서 이방 왕들이 모의하며 쳐들어 옵니다. 급기야 이들을 여호와께서 지휘하시면서 시간을 막론하고 요새를 헐라고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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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실 때도 만일 전쟁이 임박하다는 징조와 소문을 듣게되면 피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24, 막13, 눅21). 전쟁이 참혹해서도 그렇지만 심판이 분명하다는 것도 함께 강조됩니다. 이제 남유다의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동일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 인근에 살고 있기에 북방에서 오는 군대를 피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을 아름답고 우아한 성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있으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속에서 온갖 포학과 음행과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이제 이방의 왕들이 군대를 몰고와서 예루살렘을 칠 준비를 합니다. 급기야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진두지휘하면서 정오든지 날이 기울었든지 이제 올라가서 그 요새를 헐라고까지 명합니다. 남유다를 향한 심판이 임박했고 분명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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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와 음행으로 가득하고, 정의와 공의가 무너졌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고 탐욕으로 점철된 곳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이 언약이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너무도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곳이, 가장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겨야 할 곳이, 가장 정의와 공의가 바로세워져야 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답고 우아해야 할 예루살렘이 지금 하나님의 심판 앞에 헐려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고를 여전히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감각이 이미 죽어버린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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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가 몸담은 곳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해야 하는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신 교회된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과 정의와 공의로워야 함 앞에서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질병이 오래 되어 아예 아픔과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 스스로 자정 능력 없이 오판한 신앙을 가지고 헛된 확신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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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절 예루살렘은 이제라도 여호와의 훈계를 듣고 모든 포학한 것들을 멈춰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을 에워싼 군대를 향하여 성을 넘을 목책을 만들라 합니다. 예루살렘은 벌받을 성이며 포학으로 가득한 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루살렘 성 안에는 폭력과 탈취로 인한 질병과 살상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를 통한 훈계를 전하지만 그들은 이를 싫어하니 하나님은 심판을 진행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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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학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더 포학한 북방의 군대를 들어 쓰는 아이러니를 보게 됩니다. 더이상 선지자의 말과 하나님의 여러 통로를 통한 계시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포학이 가득한 그들에게 남은 일은 이제 벌 받을 일만 남은 것입니다. 많은 제사장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선지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성이 이렇게 폭력과 탈취를 자행하고 이로 말미암은 질병과 살상이 계속되고 있는지 통탄할 일입니다. 귀를 막고서 여호와의 훈계를 듣지 않으려 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기에 그 끝은 멸망 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땅을 황폐하게하여 주님 없는 땅으로 만들라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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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포학을 폭력과 탈취로 설명하고 그로 인한 결과가 질병과 살상으로 나타납니다. 힘있는 이들의 횡포가 힘없는 이들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군림하면서 그들의 고혈을 탈취합니다. 피폐해진 백성의 삶은 질병과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성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 백성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마침내 이 땅은 황폐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가 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질병과 살상이 가득한 땅이 되어버린 것은 전적으로 불순종하고 어리석으며 무지하고 패역한 이스라엘로 말미암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잘 인도해야 할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지도자들의 타락은 결국 백성들도 무지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려서 예루살렘은 총체적으로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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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둘째치고 오늘 교회의 모습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여호와의 훈계를 즐겨 듣지 아니하고 외부의 공격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스스로 돈과 많은 자원들로 힘이 있는 줄 착각하여 교회 안과 밖의 힘없는 이들을 향한 정죄와 포학을 스스럼 없이 자행하고도 그것이 정의인줄 착각하는 알량한 신학과 대의정치 체제의 책임을 특권과 권력으로 착각하여 서로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정작 하는 일은 폭력과 탈취한 지금을 더 많이 모으고 누리려는 이기적인 모습들이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우린 그런 교단과 교회의 일원으로 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이든 누구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손가락질은 쉽지만 내가 그 길을 바르게 가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더 황폐한 땅이 되기 전에 정의를 세워갈 그 한사람이 되어가는 일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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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8(임박한 예루살렘 침공) - 묵상도움글

이 단락은 4장에 수집된 말씀들처럼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에 의한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내용상 4:29-31에 직접 연결될 수 있습니다. 멸망의 위기를 면해보려는 예루살렘의 모든 외교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적은 예루살렘의 공격을 결정하고 성으로 올라가 포위합니다.

1절 4:6에서 유다 사람들은 적의 침략을 피해 시온으로 대피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예루살렘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못 됩니다. 적의 공격이 초읽기 단계에 들어갔기에 살기 위해서는 포위당하기 전에 성을 떠나야 합니다. 에브라임 산지와 예루살렘 사이의 지역에 살았던 벤야민 사람들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의 위험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피난처를 찾았지만, 북방에서 ‘재앙과 큰 파멸’이 오기(1:14; 4:6) 전에 서둘러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대략 19km,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8km정도 떨어진 곳이며, 벧학게렘(과수원 집[느 3:14])은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5km정도 떨어진 라맛라헬(Ramat-Rachel)에서 찾기도 하지만] 그 위치가 아직까지 불분명합니다. 드고아와 동사 ‘[나팔을] 불다’(티크우) 사이에서 언어적 유희(word play)를 읽을 수 있습니다.

2절 야훼께서 직접 예루살렘을 파멸시키십니다. 북쪽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적은 야훼의 심판의지를 집행하는 그분 손에 들린 도구일 뿐입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은 시온의 특권과 영예를 표현합니다. 시온은 야훼께서 당신 현존의 처소로 선택하신 도성으로, 그분의 구원과 축복을 풍족히 경험하며 번영과 영예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야훼께서 하락하신 시온의 특권이 시온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습니다. 시온은 야훼께서 현존하시는 곳이기에 그에 걸맞게 처신해야 했습니다. 시온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불의를 행할 때 그의 특권은 징벌의 수위를 더 높일 뿐입니다.

3절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이 적에 의해 포위공격 당하는 모습을 비유로 기술합니다. 목자들이 꼴이 풍족한 좋은 목초지를 찾으면 그곳에 장막을 치고 머물면서 양떼를 먹이는 것처럼, 대적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예루살렘 주변에 주둔하고 성을 에워쌉니다. 침략군은 부대를 나눠 각자에게 맡겨진 지역을 책임지고 성을 함락할 때까지 공격합니다. 목자들은 왕과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4절 공격을 준비하는 명령으로 진영이 소란스러워집니다. “그를 칠 준비를 하라”는 “그를 거슬러 전쟁을 거룩하게 구별하라” 하고 문자적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계획하신] 거룩한 전쟁의 시작이 선포됩니다. 예전에 당신 백성을 억압하는 이방 민족들에 맞서 전쟁에 직접 참여하셨던 야훼께서 이제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적과 함께 하십니다. 원정군은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공략하기 위해 서둘러 준비를 갖춥니다. ‘정오’는 뜨거운 시간으로 출병에 적합한 시간이 아니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을 점령하려는 자들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외적 환경도 이들의 진격을 지체시키지 못합니다.

5절 준비가 길어져 벌써 저녁이 되었지만 이들은 출정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군대를 이동하기에 매우 불리한 밤도 이들의 진격을 막지 못합니다. 이들은 어두운 밤에 되었음에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을 징계하시기 위해 야훼께서 불러 올린 군대이기에 한낮의 뜨거운 열기나 밤의 어두움도 이들의 앞길에 장애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들은 요새를 파괴하고 성을 점령하자고 전의를 불태우며 피곤함이나 두려움 없이 전진합니다.

6절 야훼께서 마치 야전지휘관처럼 공격을 진두 지휘하십니다. 나무를 베어내고 예루살렘 성을 공격할 수 있는 둔덕(목책)을 만들라고 군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십니다. [‘목책’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높은 곳에 자리잡은 성을 공격할 수 있도록 그 주변에 성과 대등한 높이로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높은 둔덕을 가리킵니다.] 성을 부서뜨리고 함락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야훼께서 적이 되셨기에 예루살렘에게는 멸망 이외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6b-7절은 야훼께서 적을 불러 예루살렘을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조사해보니 ‘오직 포학한 것’뿐입니다. 강자들이 폭력과 불법으로 약자들을 억압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집니다. 예루살렘은 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7절 예루살렘에서 불의와 불법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에 속합니다. “샘이 자기 물을 솟구쳐 내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은 자기 악을 솟구쳐냈다.”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예루살렘에서는 악이 흘러나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악은 본성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총체적으로 속속들이 부패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들리는 소리는 ‘폭력과 탈취(파괴)’의 소란뿐입니다. 폭력과 파괴가 판을 치는 예루살렘에서는 이웃을 해하거나 남의 물건을 약탈하는 일은 일상사에 속합니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은 폭력과 파괴로 생긴 ‘질병과 살상(상처)’뿐입니다. ‘폭력과 탈취(파괴)’를 일삼으며 서로에게 ‘질병과 살상(상처)’을 입히기에만 열심인 예루살렘은 악의 도성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8절 갑자기 회개를 권면하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야훼께서 마지막 순간 한번 더 예루살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예루살렘은 너무 늦기 전에 그분의 교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기회마저 놓쳐버리고 악에서 떠나기를 거절한다면 야훼께서 예루살렘에게 더 이상 애정을 베푸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야훼와 갈라서지 않으려면 그분의 마지막 권고와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인적이 없는 폐허로 만드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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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2절 여호와께서 분노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경책하는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때 남김없이 다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듣지 못합니다. 심지어 이렇게 전하는 말씀을 자신들에게 하는 욕으로 여기고 즐겨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반역입니다. 이 일은 총체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분노는 남녀노소르 막론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어서 이제 유다의 모든 소유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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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삶의 자리에서 거룩한 백성의 삶을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 아닌 것을 주인삼고 자신들의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총체적으로 타락해 갔습니다. 그들을 깨우기 위해서 세운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오히려 평안한 때에 심판을 예언한다고 오히려 그것을 욕으로 여기며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해서 듣지 않는다면 더이상 회복할 길이 요원한 것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살게 하는 말씀을 욕으로 여긴다니 생명을 전하는 말씀에 대한 모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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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의 경책 하시는 말씀에 대한 반응은 메신저를 위협하고 비방하는 것도 아니요, 나와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회피하는 것도 아니요, 듣기 싫은 이야기라고 욕으로 폄하하는 것도 바람직 한 반응은 아닙니다. 마음의 할례 곧 자신의 탐욕을 내려놓고 가감없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용했어야 합니다. 핑계와 지식과 이유와 거부반응이 더 많아지고 길어질수록 이미 그 안에는 불순종과 불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불순종은 여호와의 분노를 낳고 마침내 우리가 소유한 많은 것들을 타인의 소유가 되게 합니다. 자기가 수고한 땀의 열매를 얻고 누리고 물려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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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5절 백성들의 탐욕과 종교지도자들의 거짓 행함의 가증한 일이 결국 여호와의 벌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의 탐욕과 종교지도자들(선지자, 제사장)의 거짓은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닙니다. 백성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탐욕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말씀을 맡아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한 나라로 살게 해야 할 제사장과 선지자는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거짓 예언을 일삼고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채워가는 형국입니다. 이 가증한 일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기에 하나님은 그들이 마침내 엎드러져 벌을 받아 거꾸러지리라 선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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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으로 가득찬 이들은 권력자나 피지배자, 유식한 자라 무식한자, 무자나 가난한 자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들의 탐욕에 점철된 신앙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고하여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짓을 행합니다. 그러니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이 총체적으로 심각해 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고 탐욕에 물든 판다을 하게 되니 이들의 모습은 백성들의 완악함을 더 강화시켜 버립니다. 샬롬(평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을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문제가 없다하고 잘 될 것이라 하면서 그 심각성을 깨우지 못합니다. 멸망이 다가오고 있지만 여전히 만사형통(萬事亨通)을 주장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사람들의 귀에 좋은 이야기를 합니다. 말씀을 맡은 자들의 이러한 타락은 심각한 수준에 이릅니다. 


이들의 가증한 모습은 일상 속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진행됩니다. 그러니 그들의 탐욕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죄를 범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해 집니다. 이렇듯 수치를 모르고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 뒤에 남은 결과는 하나님의 벌로 멸망당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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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맡은 자들의 오판과 무지와 탐욕은 그것이 미치는 영향이 교회의 생명을 좌우합니다. 탐욕과 거짓은 거룩한 공동체와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고, 시대를 옳게 분별하며, 지금 우리 자신의 문제와 대안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탐욕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힘써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부여잡고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도자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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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15(징계를 불러오는 백성의 완악함) - 묵상도움글

야훼께서 3인칭 복수의 인물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9a절을 제외하고 - 때로는 9a절을 9b절에 일치시켜 예언자에게 주는 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 본문은 야훼와 예언자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9b절에서 야훼께서 예언자에게 (다시) 사역에 나설 것을 명령하시고, 10-11aa절에서 예언자는 야훼께 자신의 이전 사역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탄식합니다. 11abb-12절에서 야훼는 예언자에게 다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심판의 신탁을 선포하도록 명령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담당한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13-14절이 야훼의 말씀인지 또는 예언자의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5절에서 야훼께서는 ‘가증한 일’을 범한 제사장과 예언자를 고발하며 이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9절 MT에 따르면 전반절의 주어(‘그들’)와 후반절의 주어(‘너’)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3인칭 복수)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남김없이 거두어드릴 것을 말씀하시고, 뒤이어 ‘너’(2인칭 남성 단수)에게 포도나무 가지에 손을 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전반절과 후반절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안 됩니다. 때로는 양자를 조화시켜 이스라엘은 먼저 ‘그들’에 의해서 추수(심판)을 당하고 일부가 남게 되며(5:10), 예언자는 이 남은 자들을 다시 살펴보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본문을 얼마간 무시한 이해입니다. 본문을 정확히 읽어보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일부를 남겨두지 않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남김없이(‘말갛게’) 거두어 들입니다. ‘남은 자’마저 심판을 당하기에 완전한 멸망을 의미하게 됩니다.

후반절의 하나님 명령은 아직 포도나무에 포도송이들이 달려있음을, 남은 자들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자가 포도나무 가지들을 잘 살펴서 잎사귀 아래 숨어있는 포도송이도 놓치지 않고 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포도나무 가지들에 손을 거듭 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당신의 포도원에서 자라는 포도나무 가지들(cf. 5:10)을 살펴서 좋은 열매가 맺혀 있는지 조사해보라고 명령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뭄이나 병충해로 큰 피해를 입어도 포도나무의 일부에서 결실을 맺기도 하기에 유다 사람들 가운데 숨어서 ‘정의를 구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5:1)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임무가 예언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멸망선언 다음에 주어지는 남은 자들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문맥에서 9절 후반절의 이해는 10절(+11b절)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손을 펼쳐 자세히 살펴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예언자는 아무도 자신의 선포를 듣지 않는다고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아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cf. 5:1-5). 예루살렘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부패했습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9b-10절은 내용상 9a절에 선행합니다. 곧 유다가 완전히 멸망할 수밖에 있는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예언자의 선포를 비웃으며 거절했기에 유다는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후반에서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10절 하나님의 명령에 뒤이어 나오는 예언자의 답변(10-11aa절)은 차라리 체념적이며 절망적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경고해야 그들이 알아듣겠습니까? 예언자는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지만 단호한 거절을 제외하고는 청자들에게 어떤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예언자가 아무리 선포하고 경고하여도 이스라엘의 ‘할례를 받지 못한’ 귀에는 전혀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계약 백성의 증표로 몸에 할례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계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께 복종을 거절합니다. ‘마음의 가죽’ (cf. 4:4)을 베지 못한 이스라엘은 예언자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단지 경멸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만 아는 자들에게 예언자의 심판선언은 비웃음거리 또는 스캔들에 불과했습니다.

11절 “나는 야훼의 분노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이를]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너는 길거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의 무리에게 [이를] 쏟아 부어라. 남편도 아내와 함께, 노인네도 나이든 자들과 함께 잡혀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예언자를 절망감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분노를 일으킵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을 거절하고 죽음과 멸망의 길을 고집하는 자기 백성을 바라보며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맹목적 거절에 (의로운) 분노를 느낍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찬 분노를 억누르기에 이제는 너무 치쳤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분노를 ‘야훼의 분노’라고 표현합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상처받은 개인적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엄청난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바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멸망을 뒤쫓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한 분노입니다. 생명을 주려는 당신을 배반하고 죽음을 선택한 자들에게 야훼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예언자도 마찬가지로 분노합니다.

11abb-12절에서 하나님은 회개가 불가능한 이스라엘의 현실에 탄식하며 분노하는 예언자에게 그 마음 속에 가득 찬 ‘거룩한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 붓도록 허락하십니다. 완고하게 당신의 경고를 무시하며 예언자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그분께서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분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장난치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모여 젊음을 즐기는 청년들도(11ab절)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나이든 자나 노인이나 모두 사로잡혀 갈 것입니다(11b절). 생명을 갖고 있는 자들은 모두 전쟁포로가 되어 유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담당하는 어린아이와 청년마저 잡혀가기에 이스라엘에게는 미래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12절 이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살던 집과 밭과 아내도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것입니다(12a절). 생존에 필요한 모든 소유물(재산)을 상실합니다.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는 MT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그들의 집들은 밭들과 아내들과 함께’가 됩니다. 제일 먼저 집이 나오고 밭과 아내는 집에 따린 부분으로 언급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재산권과 소유관계를 반영한 표현입니다. 집이 제일 중요한 재산이고 밭과 아내가 다음에 위치합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세계에서 아내는 남편의 소유로 간주되었습니다(cf. 출 20:17//신 5:21). 이스라엘이 이러한 파국적 재난에 떨어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말씀을 조롱하는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그 땅 주민’)을 거슬러 손을 뻗으셨기에 누구도 도피할 수 없습니다.

13절 13-15절은 8:10-12에서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됩니다. 13-14절에서 하나님은 (또는 예언자는) 10절과는 얼마간 다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십니다.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백성이 모두 소유욕에 사로잡혀 부당하게 이윤을 추구합니다(13a절; → 5:4-5). 탐욕에 있어 권력자나 피지배자가,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가, 부자나 가난한 자가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동체의 연대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이웃은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종교지도자들도 이러한 부패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백성들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법과 길을 바르게 가르쳐야 할 예언자와 제사장이 거짓을 행합니다. 위부터 아래까지 부패의 고리로 한통속이 됩니다. 

14절 오진에 의한 처방이 환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이며 왜곡된 영적 진단이 백성의 내적 완악함을 더 강화시켜줍니다. 샬롬이 없음에도 이들은 이스라엘의 샬롬을 외칩니다. 백성이 죽을 병에 걸렸음에도 이들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처방합니다. 이들의 눈에는 쉽게 치료될 가벼운 상처에 불과할 뿐입니다. 멸망이 다가오고 있지만 여전히 만사형통(萬事亨通)을 떠듭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의 잘못된 처방전에 따라 멸망의 길을 더욱 재촉합니다. ‘평강’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샬롬’은 훨씬 폭넓은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 인간 삶의 이상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 자연과 사회 세력들의 조화로운 일치를 가리킵니다.

15절 이스라엘의 가증한 짓은 일상사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이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탐욕과 거짓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하는 짓이기에 죄를 범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예언자의 외침은 ‘소 귀에 경읽기’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은 전무해졌습니다. 수치를 범하고도 이를 수치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특히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영적 책임이 있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은 멸망의 심판을 선고하십니다(15b절). 

*

# 거둠의 기도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 아버지

시대를 옳게 분별할 뿐 아니라

오늘 교회된 우리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에 비춰서

얼마나 우리가 빗나가고 오판하고 왜곡하는지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을 허락해 주옵소서. 

임박한 심판을 늘 기억하여 깨어 살게 하옵시며

우리 가운데 있는 포학 곧 

모든 폭력과 탈취로 자행되는 일들을 멈추고

주의 교양과 훈계를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귀를 허락해 주시고

모든 세대가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로서의 자부심을 갖되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는 오직 주님의 소유로 주님의 통치를 따라 살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탐욕과 거짓등의 가증한 일들을 버리고

우리 주님 앞에 부복하며

주께서 이끄시는대로 온전히 순종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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