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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5:20-31 지각없는 백성, 무너진 공의, 타락한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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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군대를 통한 심판과 포로가 될 것이라는 선고를 내린 이후,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배반한 어리석은 백성들의 문제를 다시한번 언급하고, 백성 가운데 가득한 악인들의 죄악으로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것을 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타락에도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는 것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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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음이 창조의 질서를 교란시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다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에 순종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배반하고 반역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가벼이 여기면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급기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역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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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예레미야같은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내진 예언자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야곱 집(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포함한 전체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미 불순종과 반역으로 눈과 귀가 아둔해진 까닭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결국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음으로 전락합니다. 사나운 바다도 여호와께서 한계를 지어 삼은 모래를 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다도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데 이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지어 반역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말미암아 추수 하며 사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심지어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고 거절하며 막아서는 데까지 이릅니다. 이스라엘의 허물과 죄는 축복의 통로로 부름 받은 사명을 망각하고 급기야 자신들에게 오는 선물마저도 왜곡하고 거절하는 패역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마침내 지금 당하는 재앙은 결국 축복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거절한 결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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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탐욕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의 힘의 한계, 지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생명의 한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자연의 순리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창조주의 통치를 거역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자연재해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창조의 질서와 추수할 수 있는 축복의 선물들마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지와 어리석음과 패역한 허물과 죄악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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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계를 분명히 직시하고, 헛된 탐욕으로 눈과 귀가 멀게 하지 말며, 자연의 순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뜻을 기억하여 더욱 온전히 순종하고,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임을 알고 합당하게 감사하며, 나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축복을 가로막는 일이 없기를 간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 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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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0-25(어리석고 지각 없는 백성)- 묵상도움글

하나님께서 어리석고 무지한 야곱/유다의 불순종을 자연의 순종에 비교하여 책망하십니다. 인간을 압도하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자연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유다는 자신의 창조주이시며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서워함이 없이 그분께 등을 돌립니다. 급기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복종이 창조의 질서를 완전히 교란시킵니다. 이스라엘이 땅의 축복을 받지 못함은 이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20절 개역개정은 명령을 받는 자로 예레미야를 생각하며 단수 ‘너’로 수정하여 읽지만, 히브리어 성서에는 복수 ‘너희’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복수의 사자들을 이스라엘에게 파견해 당신 의지를 전하게 하십니다(cf. 4:5aa). 사명을 위임 받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야곱 집(2:4)과 유다로 보냄을 받습니다. ‘야곱 집’은 이미 멸망한 북 왕국보다는 전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병행하는 ‘유다’는 하나님 백성 중에서도 특별히 남 왕국 유다에게 주어진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책망의 대상이 일차적으로는 유다 사람들이지만 이전 북 왕국에 속했던 주민들도 포함됨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 21-22절에서 하나님은 복수 2인칭을 사용하시면서 유다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cf. 신 29:3; 사 6:9-10; 겔 12:2). 이들의 눈은 겉에 드러나는 것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들의 귀는 듣기에 좋은 소리만 골라 듣습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역사를 배후에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이들의 눈에 역사적 현실은 정치적-세속적 사건의 현장일 뿐입니다. 이들의 귀에 예언자의 선포는 비현실적인 말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어리석고 지각 없는 백성’입니다.

22절(비유) 어리석고 무지하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그분 앞에서 떨지도 않습니다. 피조세계도 창조주가 정해놓은 질서를 인정하고 복종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분에게 최소한의 경외심도 표하지 않습니다(→ 잠 1:7).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적 힘을 자랑하는 바다도 그분이 정한 경계를 준수하며 그분께 복종하지만(cf. 시 104:9; 욥 38:8-11) 이스라엘은 창조질서를 확정하신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자신을 절대화시키려는 교만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분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친구처럼 대하는 우리이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 경외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경외심이 없기에 진지함 없고, 예배도 형식화 됩니다. 예배가 경외를 갖는다면 시끌벅적하고 우습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배가 공연화 된 부분에 있어서 이 경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랑도 일방적으로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서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도 시끄럽게 드립니다. 예배는 어떤 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내용은 형식과 어느 정도 일치 되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 쉽지 않습니다. 오늘의 예배에 경외심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23절 22절에서 당신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23-24절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개역개정은 22절에 일치시켜 23-24절도 2인칭 ‘너희’를 첨가해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실망감에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신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납니다. 이들은 완고하게 반항하는 백성입니다.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은 이들이 단호하고도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났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대적자로 삼고 저항했습니다.

24절 창조주의 무한한 능력에 어떤 경외심도 보이지 않는,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결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은 바알의 풍요제의에 빠져 비와 땅의 결실을 바알에게서 구합니다. ‘이른 비’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내리는 가을 비를 가리킵니다. 12월부터 2월까지 차가운 겨울비가 내린 후에 3월과 4월에 ‘늦은 비’가 내립니다. 비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는 가나안에서 제때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좋은 결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추수 기한’은 곡물에 따라 추수기가 달리 정해졌음을 보여줍니다. 4-5월에 보리걷이가 시작되고 보통 한 달 보름이 지나 밀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보리걷이를 시작(무교절)할 때부터 밀걷이를 끝낼 때(칠칠절)까지 대략 일곱 주간이 걸렸습니다.

25절 하나님께서 다시 2인칭 복수를 사용하시며 이스라엘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과 ‘좋은 것’은 야훼께서 정하신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연질서, 구체적으로는 때를 따라 주시는 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실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었습니다. 자연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축복(결실)을 거절했습니다. 땅의 풍성한 결실과 번성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계약을 준수하면) 축복으로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재앙은 이스라엘이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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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9절 하나님은 무너진 공의와 정의를 반드시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가득하여 속임이 가득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악인의 흥왕함이 더해갈수록 악행 또한 심해져서 자기 유익(탐욕)을 위해 고아와 빈민들(사랑으로 돌보고 섬겨야 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대명사)의 송사에 공의와 정의를 저버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죄악에 대한 벌과 보복을 결코 면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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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결과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이는 악인들이 득세하며 불의한 일에 더우 기승을 부리게 합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거짓과 부정 부패를 일삼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착취하는 일도 서슴치 않고 자행 합니다. 이러한 착위레 자신들은 번창하고 부해지고 윤택해 집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복주시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의로운 것에 대한 보응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들의 악행을 멈추지 않고 더 뻔뻔하게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가난한 이들의 송사마저도 굽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사라진 인간과 사회에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처우가 거룩한 나라인지를 판별하는 다림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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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고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따라 고무줄처럼 임의적으로 적용되어서 힘있는 이들은 법 위에 군림하고 사회적인 약자들(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은 법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오히려 희생물로 전락하여 약탈과 착취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회는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악인들의 흥왕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런 자리에 있는 이들은 착각하지 말것이며, 지금 힘없는 이들을 향하여 무례히 행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향한 긍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로운 삶과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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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6-29(이웃을 약탈하는 자들) - 묵상도움글

지금까지는 주로 제의적인 우상숭배가 문제였다면 이 단락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불의를 공격합니다. 제의적 부패와 사회적 불법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극화됩니다. 부를 축적하여 사회적-경제적 힘을 지니게 된 자들은 이를 이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며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킬 뿐입니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고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따라 임의적으로 적용됩니다. 이들이 세력을 더해갈수록 가난한 자들의 법적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됩니다.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과부와 고아의 법적 권리가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강자의 희생제물로 전락한 이들의 원통함을 위해 어느 누구도 애쓰지 않습니다. 이런 불의하고 파렴치한 사회에서 약자의 짓밟힌 권리를 위해 법(정의)의 최후의 수호자인 야훼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26절 하나님은 악인을 나무나 수풀 또는 물가에 그물을 쳐놓고 새들이 함정에 빠지길 기다리는 새 사냥꾼에 비유하십니다. 이들은 우연이나 어쩔 수 없이 악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악을 계획하여 이를 실행한다. 이들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악을 노골적으로 자행합니다.

27절 새 사냥꾼들의 바구니가 새들로 가득 찬 것처럼 악인들은 속임수로 얻은 재물로 자기 집을 가득 채웁니다. 이들은 사기와 불법과 폭력으로 빼앗은 재물로 부자가 되어 권력을 획득합니다. 순진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불법으로 쌓아 올린 경제적 부로 사회적-정치적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들은 경제적-정치적 유력자가 되어 불의와 불법으로 손에 넣은 부와 권력을 법적-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킵니다. 악인들이 마치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들처럼 번창하고 부유해집니다. 무죄한 이웃을 희생시켜 자신의 사리사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능력으로 간주되는 사회가 됩니다.

28절 많은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의 부족으로 땀 흘리며 힘겹게 살아갈 때 재물로 집안을 가득 채운 이들의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르고 윤기가 돕니다. 이들의 탐욕은 만족을 모릅니다. 이미 부와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장악했기에 이들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두려움 없이 악을 범합니다. 이들에 의해 사회적 통합을 위한 전제 조건인 재판의 공정성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불법으로 손에 넣은 재물의 맛을 아는 이들에게 이웃은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부패한 재판관들은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의 송사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이들의 법적 권리를 강자에게 팔아 넘깁니다.

29절 하나님께서는 계약 백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결코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부와 권력의 우산아래 몸을 피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대신하여 불의한 부자와 권력자를 징벌하십니다. 26-28절은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불의를 자행하는 특정 집단을 고발하는데 비하여 29절의 징계선포는 백성 전체에게 주어집니다. 공동체의 연대감을 보여주는가? 불의와 부패의 사슬에 포로가 된 사회에서는 희생자들이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전제하는가? 심판이 기본적으로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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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1절 말씀을 맡은 이들의 타락이 백성들의 무지와 멸망을 초래하게 합니다. 

지금 유다 땅에서 자행되는 타락에 대하여 무섭고 놀라운 일(끔찍한 일)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백성들은 이를 좋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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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면서 제사장과 지도자들의 부정 부패를 직시하고 바르게 하나님의 심판과 뜻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들이 오히려 권력자들과 부패한 이들을 옹호하면서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거짓 예언을 일삼고 있습니다. 거짓 우상에게 신탁을 받고, 자신의 생각으로 예언을 포장하는 행위들도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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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을 책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면서 오직 여호와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자족하면서 하나님과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 제사장들이 오히려 말씀을 맡은 것에 대해서 군림하려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뜻과 탐욕에 따라서 왜곡되고 잘못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해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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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심각한 것은 이 백성이 그런 거짓 예언자들과 타락한 제사장들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바르게 전달하며 책망하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값싸게 죄를 용서해주고, 일방적으로 구원을 보장해 주는 그런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더 좋아합니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들과 어리석은 백성이 서로의 탐욕을 만족시키면서 죄로 물든 상부상조를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섭고 놀라운 곧 끔찍한 일들을 총체적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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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모두는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셨을 분 아니라 은혜와 복으로 함께하셨으며, 그것을 또한 나눌 수 있는 이웃들도 붙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의적으로만 신앙을 갖고, 그 신앙마저 탐욕을 이루는 데 수단화하고 필요할 때만 여호와를 찾지만 일상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는 거리가 먼 군림과 착취와 학대를 일삼으면서도 자신들의 배가 불려지고 부해지면 그것을 축복이라 착각하면서 거룩한 길로 행해야 할 책임과 사명들을 외면한체 총체적으로 나락의 길을 가기에 여념이 없는 형국입니다. 언제나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여러 예언자들과 말씀을 맡은 이들과 계시로 들려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결국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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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0-31(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의 과오)-묵상도움글

30절 전체의 장을 마감하면서 유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무섭고 놀라운 일’로 규정합니다. ‘무섭고 놀라운 일’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고도 끔찍스러운 일을 의미합니다. 다음 절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31절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무시됩니다. 야훼 예언자들은 야훼에게서 신탁을 받아 예언하지 않고 거짓 신들(우상들)에게서 신탁을 받거나 또는 자신의 생각을 신탁으로 포장하여 선포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바르게 전달하기 보다는 고객들이 듣기 원하는 신탁을 전합니다. 제사장들은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직무를 수행합니다. 백성이 죄를 깨닫고 그 악한 길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대신에 형식적인 제의(예배)로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전혀 오판하게 만듭니다.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런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은 준엄한 고발자나 책망자보다는 값싸게 죄를 용서해주고 일방적으로 구원을 보장해 주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더 좋아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백성이 자신들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서로를 도와줍니다. ‘무섭고 놀라운 일’을 이스라엘 전체가 즐깁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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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고, 공의로우시며

많은 말씀을 맡은 이들을 통해 우리가 

거룩한 길로 행하길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들을 귀, 보는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자연을 바라보면서 더욱 겸손히 주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도 허락해 주옵소서. 

주님의 축복에 합당하게 반응하길 원하며

주님을 향한 경외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정의과 공의를 행하는데 지혜롭고 부지런하게 하옵시며

말씀을 맡은 이로서의 정직을 회복하며

결코 악인의 흥황함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시대를 옳게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기준과 판단의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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