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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5:01-09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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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정의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한 사람도 없음을 고발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영적인 무지와 완악함을 고발하면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됩니다. 결국 유다의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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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하나님은 진실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단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이 성읍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거짓 맹세하는 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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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음행과 부패로 물들어 가는 범죄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 유다의 대표적인 도성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만 있어도 예루살렘 전체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의는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온전한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5절에서는 ‘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진리는 왕되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할 수 있습니다(2절의 거짓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결국 정의와 진리의 길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며, 앞서 진실과 정의와 공의(4:2)를 추구하는 삶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사람, 이 세대에 물들지 않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하는 이들(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는데 정작 그들은 말만 그럴 뿐 실제 삶에서는 정의의 열매와 진리의 추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말만 할 뿐 행하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맹세는 가식과 거짓과 헛된 것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각한 상태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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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세대 가운데서도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이를 찾고 계실 줄 믿습니다. 소외된(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이방인, 가난한 이들 등등) 이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고, 탐욕을 따라 바알을 섬기며 돈과 권력과 힘이 최고인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길을 제시해 주시고, 주님을 바라며 살아갈 소망 주신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그것이 진리를 구하며 살아가는 이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우리도 시류에 휩쓸린 거짓 맹세 하는 허다한 무리에 섞인 이들이들일 뿐인가요?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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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절 진리 곧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아는 것 뿐 아니라 행하는 자라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진리를 구하는 이들을 찾지만 예레미야가 보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인에 무감각하여서 아픔도 징계도 회계도 싫어할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비천하고 어리석어서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함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라도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들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걸림돌(멍에, 결박)로 여겨 끊어버립니다. 그렇게 허물많고 반역한 이스라엘을 기다리는 것은 사자와 이리와 표범같은 심판의 도구로 말미암아 죽음과 멸망과 찢김만 기다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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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의 채찍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요동도 반응도 할 수 없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얼굴을 굳게 하여 돌아오라는 말씀에 무색하게 아예 싫다고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멍에와 결박으로 생각하며 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속박으로 알고, 방종으로 치달아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비천하고 어리석기에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아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 먹고 살기에 바빠서 여호와의 길과 법을 아는 일에 게으르고 무관심하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우선순위에 여호와의 길과 법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욕의 산물인 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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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은 여호와의 길과 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보았지만 어느새 그들은 여호와 길과 법에 대해 순종의 길이 아닌 반역의 길로 행합니다. 급기야 여호와의 길과 법을 자신들을 옭아매는 멍에와 결박으로 치부하고 끊어버리기까지 합니다. 비천한 이들과 달리 여러모로 지도자들(상층민, 부유층, 관료나 제사장이나 유지들까지 <> 비천한 자들과 대조되는 자들이다)은 여호와의 길과 법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들은 여호와의 길과 법을 끊어버립니다. 이는 반역에 속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자와 사막의 이리와 표범이 이들을 죽이고 멸하고 찢어버리는 죽음에 넘겨 질 것을 예언합니다. 아무도 이 심판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역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허물(범죄)과 반역(배반)이 너무도 중하였기에 심판 또한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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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잘 아는 자만이 여호와의 징계와 경고와 뜻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모습을 가집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을 지라도 곧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할 지라도 주님을 알아가고 순종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이가 결국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무지하고 다른 주인을 섬기며 살아간다면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 뿐더러 여호와의 길과 법이 아닌 욕망의 포로로, 멸망의 길로, 죽음의 길로 갈 뿐입니다.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아는 일에 곧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로 온전히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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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예루살렘의 죄) _ 묵상도움글

1-2절 하나님의 고발 / 3-6절 예언자의 고발

멸망의 재앙을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부패를 다루고 있는 1-6절은 화자에 따라 두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1-2절에서 야훼께서 1인칭으로 한 명의 의인이 없어 용서받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지만 거짓에 불과할 뿐입니다(2절). 야훼는 이들의 삶 속에 명목상으로만 남아있습니다. 3-6절은 예루살렘의 영적 부패에 관한 예언자의 절망적 탄식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지만 예루살렘은 전혀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교육적 징계가 아무 결실도 맺지 못했습니다(3절). 다수의 무식한 대중들뿐만 아니라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유식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모르기는 한가지였습니다(4-5절).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완악함과 반역에 관해 자신이 경험한 바를 하나님께 여쭈며 재난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시인합니다(6절).

1절 하나님께서 복수의 청자들에게 예루살렘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거기에 의인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야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로 인하여 야훼께서 예루살렘 성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다른 곳도 아닌 하나님께서 당신 도성으로 택한 예루살렘에 한 명의 의인이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어느 정도로 부패했는지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한 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 당하는 예루살렘은 열 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 당한 소돔에 대조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의인이 한 사람도 없음은 부패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한 과장법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잃어버린 예루살렘은 더 이상 그분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능성의 차원을 떠나 필연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다투는 긴박한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정의’(미슈파트)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로 5절에서는 ‘법’으로 번역됩니다. ‘진리’(에무나)는 ‘올곧음, 한결 같음’을 의미하며 2절의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정의와 진리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됩니다.

2절 예루살렘에는 물론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행하는 맹세는 그분께 대한 신앙고백이자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4:2).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과 사기를 포장하기 위해서 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거짓과 사기의 조력자로 야훼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들은 야훼의 이름을 부당하게 함부로 부르며(cf. 출 20:7[세 번째 계명]) 이웃을 속였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분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야훼께 제사를 드리지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야훼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1절)가 한 명도 없습니다.

오늘 교회에 교인들에게 칭찬받는 교인과 목사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도 인정을 받을까요? 이것이 일치 된다면 행복하겠지만·· 교인에게 인정받았다고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인정을 하나님의 인정으로 착각합니다.

<예언자의 고발>

3절 예언자는 자신이 경험한 예루살렘의 영적 무능력과 완악함을 탄식하듯 하나님에게 보고합니다. 야훼께서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으시지만(→ 1절) 그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3aa절).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매를 맞으면서도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무감각해졌습니다(3ab절). 예루살렘은 거듭 재난을 겪지만 사태의 심각성과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교육적 징계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의 멸망에 이르도록 치셨지만 예루살렘은 반역을 징계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3ag절). 하나님께서 징계의 강도를 높이실수록 예루살렘의 거절도 더 단호하고 완강해졌습니다. 얼굴을 바위보다 더 굳게 하며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3b절).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징계하여 당신께 돌아오게 하려는 야훼의 시도가 최소한의 결실도 맺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4절 4-5절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다수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지만 상층계급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에 무지하기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 한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리나 광장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지위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바쁜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낮은 교육 수준과 제한된 문화적 혜택을 고려할 때 이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비천하고 어리석은’ 무리들 가운데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1절)를 찾기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층계급에 속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지적으로 유식한 자들이라면 사정이 다를 수 있지 않겠는가?

개역개정의 전반절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는 불충분한 번역입니다. “그[런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가난한 자들이나 그러할 뿐이다). 그들은 어리석게 처신한다” 라고 옮길 수도 있겠습니다.

4절의 재번역 : 그러나 나는, 나는 생각하였다. “그[런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게 처신한다.

5절 대인(大人)은 필부(匹夫)와 다르리라는 기대 속에 지도자들을 찾아가 보지만 실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기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무리나 배운 지도자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천한 자들’(‘달림’/가난한 자들])에 대칭되어 사용된 지도자들( ‘거달림’/대인들)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으로 지배계층에 속하는 자들(왕의 관료들, 제사장들, 예언자들, 부자들, 유지들)을 포함합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길과 법에 정통한 지식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예언자의 눈에는 한결같이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안다는 자들이 모두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길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소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법을 모르는 자들이나 알고 있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자신의 결정에 따라 산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하나님의 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칭 하나님의 법을 아는 자들이라고 예레미야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과는 비천한 자(가난한자)와 다를 바 없는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은 배울 기회 없어 법을 몰라서 하나님께 등을 돌린 자들 – 5절은 여호와의 법을 아는 자들은 알아서 또 하나님을 등을 돌린 자들입니다. 모르는 자나 아는 자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에는 동일합니다. 일반인은 하나님의 법을 아는 길이 처음부터 사라집니다. 아는 자들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 전반절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관찰과 경험으로부터 필연적 결론을 끌어냅니다. 예루살렘에는 야훼의 의지에 순종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에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는 사나운 야생 동물들의 표상을 사용하여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멸망을 기술합니다(→ 4:7). 숲 속의 사자가 물어뜯고, 사막의 이리가 찢어 죽이며 표범이 성을 엿보다가 나오는 자들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이듯이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모두 죽음에 넘겨집니다. 모든 성읍들이 파괴되어 폐허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허물(범죄)과 반역(배반)이 너무도 중하였기에 심판 또한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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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절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른 역사의식과 윤리적 가치를 따라 살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여호와께서 돌보셨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음하고 창기의 집에 허다하게 모였습니다. 발정난 수말 같이 이웃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버젓이 범합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해서 유다의 범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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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인 타락은 결국 윤리적인 부패로 귀결됩니다.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윤리적인 삶은 헛된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바알 종교에는 ‘윤리와 역사’가 없기에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이 윤리적으로 타락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따르는 이들은 역사 속에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계시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제의 규정과 지침들로 제시하시고 가르쳐 주셨기에 여호와를 따르는 거룩한 백성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가치는 신앙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셔서 오늘까지 인도하셨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하시고 인도해 주셨는데 정작 그런 은혜로 부요케 된 이후에는 감사와 합당한 고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허탄한 데 눈을 돌려서 여호와가 아닌 신을 섬기고 신앙과 윤리적인 간음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두루 다니면서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이러한 반역과 패역, 음행과 간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거룩한 백성이 부정을 저지른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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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은 은혜의 경계입니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은혜와 함께 회복된 관계속에서 이제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신부로 살아가기로 계약한 우리가 그 약속을 깨뜨인다면 그 삶에 어찌 평안과 안전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긍휼과 상과 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복을 세어보면 주님의 자녀로서 받은 사랑과, 주께서 공급하시므로 필요를 채우시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하신 은혜와,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우리에게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을 소망가운데 알게 하신 것은 일평생 주를 위해, 주를 따라, 주를 바라고, 주를 믿으며, 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이유로 이미 넘치고도 넘칩니다. 오늘 나를 살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하나님이 벌과 심판을 초래하는 삶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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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9(예루살렘의 타락) _ 묵상도움글

예루살렘의 불의를 고발하는 7-9절은 주제에 있어 1-5절에 일치합니다. 앞 단락이 징계를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부패와 타락을 종교적인 면에서 고발한다면, 이 단락은 좀 더 윤리적인 면에서 그 파렴치를 고발합니다. 종교적 부패가 필연적으로 윤리적 부패를 가져옴을 보여줍니다. 야훼를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윤리적 삶은 헛된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바알종교에는 ‘윤리와 역사’가 없었기에 우상숭배자들의 윤리적 타락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야훼 하나님은 처음부터 역사 안에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해방자(출애굽)로 계시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의규정뿐만 아니라 윤리적 가르침을 주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역사의식과 윤리적 가치는 신앙의 본질적 일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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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길이요 삶의 이유이시며 

정의와 진리를 행하는 이를 찾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자녀와 백성답게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길과 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비천하든 부요하든 어떤 상황 처하더라도

항상 주의 길과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날마다 주와 동행하고 소통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를

즐거이 행하는 복있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주께서 대적들을 도구로 쓰게 해서

벌과 보복을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마음을 시원케하고 주의 뜻을 이루며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바르게 알 뿐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사랑의 주님처럼 

그렇게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오직 주를 따라 주만 바라며

배부르고 부요케 되거든 그것을 허락하신 주를 따라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또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으로

올곧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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