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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4:05-18 임박한 심판은 너희의 악행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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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라는 여호와의 부름에 끝내 응답하지 않으면, 마침내 비극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나 모든 것을 사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루살렘은 마음의 악을 씻어야 했지만 결국 악한 생각으로 여호와를 거역하는 길로 행했기 때문에 이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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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임박한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에 나팔을 불어 재난과 큰 멸망 곧 하나님의 심판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라 하고, 유다 백성은 애곡하며 지체하지 말고 피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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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은 전쟁과 심판의 신호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면서 긴박하게 처신해야 할 것들을 여러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외치라, 모이라, 들어가자,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말라). 신호를 보내는 것은 적어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하는 소리에 여호와께로 돌이키지 않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은 결국 심판의 도구를 들어서 진행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다시한번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이스라엘이 돌이키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늘 진노중에도 궁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강퍅한 이스라엘 패역한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긍휼을 외면합니다. 북방, 사자, 재난, 큰 멸망, 나라들을 멸하는 자, 황폐, 맹렬한 노 등의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인 북방에서 온 대적의 무자비함을 짐작케 하는 표현들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이스라엘의 악행은 결국 스스로 길을 굽게하여 심판을 자초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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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돌이키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패역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외침에도 깨닫지도 듣지도 돌이키지도 않는다면 더이상 하나님이 주신 기회 마저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오래참으심의 끝을 마침내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과 긴박함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나팔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이 세대를(이 민족의 교회를) 향한 나팔소리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지금 우리가 긴박하게 피하고 세우며 모이고 지체없이 들어가서 외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회개하려거든 여호와께 돌아와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흔들리지 말고,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어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이 이 민족 교회의 희망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미 지도자들은 강퍅하여 이러한 나팔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고 볼 수 있기엔 그 눈이 너무 어두워져 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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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는 때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낙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슬퍼하여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속였다고 탄식합니다(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맨 마지막 부분에 도움글을 첨부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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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위기의 상황에 대하여 신앙(학)적인 대응책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야하고, 위기의 상황들에 대한 문제들과,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것이 주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부지런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아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소에 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감이 진행되어야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평소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닥쳐오고 나서야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찾다가 이해할 수 없어서 놀라고 맙니다. 도무지 싸울 수 없는 대적들을 보고 두려워하고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신학으로 예루살렘이 있는 성전이 결코 망할 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놀라고, 선지자는 자신들이 예언한 대로 평강이 아니라 재앙이 닥친 현실에 깜작 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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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미야는 탄식하면서 이렇게 된데는 여호와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다고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시켜서 평강을 말하게 했는데 결국 칼(전쟁)로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표현이며,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예레미야의 신앙고백이 담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참으시면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깨우시고 돌이키도록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충격적인 선포를 통해서도 깨우길 원하시는데 예레미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여호와를 향하여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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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분의 통치방식과 내용들을 성경이 말하는 부분까지, 주님이 계시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데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영역을 넘어서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섭리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부분입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며 우리를 향한 계획이 생명 곧 살리시고 회복 시키시려는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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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10(재앙의 선포) _ 묵상도움글

야훼께서 재앙이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음을 당신 백성에게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5-7절). 그분은 마치 적들의 침략을 미리 감지한 파수꾼이 주민들에게 경고를 발하여 다가오는 위험을 대비시키는 것처럼 당신 백성에게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사자들을 통해 알려주십니다(cf. 겔 33:2-7). 이를 통해 그분은 당신 백성에게 파국적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유다가 심각한 경고의 음성을 듣고 당신께로 돌아오길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지를 깨달은 예언자도 자기 백성에게 탄식하며 부르짖도록 권면합니다(8절). 재앙이 임하고는 있지만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면’(14절)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 ‘그 날에’로 시작하는 9절은 새로운 단락이지만 주제의 유사성에 의해 앞 단락에 연결됩니다. 야훼께서 보내신 적들 앞에 유다의 지도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뿐입니다. 적들에 맞서 싸워야 할 왕과 지도자들은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위기의 신학적 원인과 대응책을 알려주어야 할 종교지도자들도 당혹감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10절에서는 재앙에 떨어진 유다의 운명에 관해 예언자가 탄식하듯 야훼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는 야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속였다고, 전쟁이 목전에 이르렀는데도 구원예언자들을 통해 거짓 평강을 선포하도록 하셨다고 비난합니다.

9절 서두의 ‘그 날에’는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면, 5-8절에 선포된 재앙이 얼마나 심각하고 파멸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야훼께서 준비한 ‘나라들을 멸하는 자’(7절)은 유다가 대적하기에는 너무 막강한 적들입니다. 유다로서는 멸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침공하는 적들에 맞서 방어계획을 세우고 군대를 지휘해야 할 왕과 지도자들이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자신들의 임무를 전혀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적들의 무서운 기세 앞에서 용기를 잃고 낙담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원을 선포했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이들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내지는 돌변에 아연실색하여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전통적이며 교리적 사고는 눈 앞에 전개된 현실에 어떤 신학적 답변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이들은 당면한 위기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내지 못하고 당혹감에 사로잡혀 황망해할 뿐입니다.

10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속였다고, 칼이 벌써 목구멍을 찌르는데도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고 거짓을 말하게 하셨다고 비난합니다. 예레미야의 비판 대상에 거짓 예언자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함께 포함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언자의 이러한 비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구원을 선포한 예언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믿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레미야는 여기서 전통적 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구원자로 이해하였던 백성들의 비난을 인용하고 있는가? 또는 백성들 편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속이셨다고 말하지 않고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속였다고 말한다. 예레미야의 이해에 의하면, 유다의 멸망을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실행하기 위해 예언자들로 하여금 구원신탁을 선포하도록 속이셨다(cf. 왕상 22:19-22). 바벨론의 위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도록 [거짓된] 구원신탁을 통해 백성을 현혹하도록 유도하셨다. 구원예언자들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고 선포하면서 백성을 멸망으로 오도하였지만 그 궁극적 원인자는 야훼이십니다. 10절은 구원예언자들의 선포에 어떤 식으로 간에 하나님도 책임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들의 활동 배후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치명적 손길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다에 임하는 재앙과 멸망에서 하나님 활동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신 13:3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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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절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계십니다.  

심판의 때에는 광야 헐벗은 산에서 뜨거운 바람이 백성에게 불어 올 것입니다. 이것은 키질하기 위함도, 정결을 위함도 아닌 심판을 위한 강한 바람입니다. 대적은 구름같이, 회오리 바람같이, 독수리보다 빠르게 와서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악을 씻고 악한 생각을 버린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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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행하는 심판은 단순하게 이스라엘 가운데서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는 키질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을 잠깐 징계하여 음행을 버리고 정결하게 하려는 정도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서 강한 바람(군사적 위협)으로 쓸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심판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지금 여호와께서 직접 행하실 일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다면 그것이 멸망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감하면서 그제서야 탄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름같이 회리바람같이 독수리같이 빠르게 멸망의 날은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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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심판이 이미 임박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 심판의 날과, 공동체와 민족적 심판의 날, 그리고 세상의 심판의 날은 결국 개인의 심판의 날(일차적 죽음)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다 가까운 시일내에 우리 모두는 이생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연장이 언제인지는 주님의 주권하에 달려 있습니다.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임박한 심판 앞에서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 날들을 입박한 심판앞에 설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날이 죄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날이 오는 것을 어떤 삶의 내용으로 채우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니 악한 생각을 오래 마음에 오래 머물게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렇게 마음을 지켜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품지 못하고 여전히 악한 생각을 오래도록 품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그 날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기를 소망가운데 바라보면서 오늘의 삶을 무엇으로 채워갈지  우리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고 악한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 말씀을 품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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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절 예루살렘이 선택한 길과 행위가 이 쓰라린 재앙을 초래한 것입니다. 

단에서부터 에브라임까지 재앙을 공포합니다(15). 적의 공격이 전령의 보고보다 더 빨리 다가올 것이며, 유다 성읍들을 공격하는 적의 외침이 들리자 마자(16) 곧 예루살렘이 적에 의해 포위를 당할 것입니다(17a). 이렇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한 길과 행위가 자초한 이 일은 그 재앙의 고통에 마음 깊숙한 곳까지 아프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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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부터 이스라엘 전역에 재앙이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이 행한 길과 행위가 적의 침략을 초래한 것입니다. 죄의 결과(열매)는 이와 같이 재앙입니다. 예루살렘이 선택한 길과 행위가 심장까지 파고드는 쓰라린 재앙을 초래합니다. 그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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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되신 주님을 거역하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만날 수도 없고 도움을 얻을 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그 길과 행위가 이와 같은 재앙을 초래한 것입니다. 결국 자초한 이 일로 말미암아 마음에 미치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들을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전에 스스로 범죄한 행위아 초래한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길과 행위가 어떤 방향과 목적과 뜻을 가지고 하는지 주의 말씀앞에서 인도와 조명과 조율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길과 행위가 악함이 아니라 선함을, 고통이 아니라 평강을 지키고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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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1-18(멸망 앞의 예루살렘) _ 묵상도움글

11-18절의 구조는 여러 면에서 단순하지 않습니다. 11aa절의 도입부와 달리 11ab-12절에서는 야훼께서 1인칭으로 당신 백성에게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13절에서는 ‘우리’가 [환상 가운데] 무섭게 쳐들어오는 적들을 보며 급박한 위기를 탄식하고, 14절에서는 아마도 예언자 (또는 13절의 ‘우리’)가 예루살렘을 2인칭으로 부르며 회개를 권면합니다. 15절의 화자는 야훼와 예언자 모두 가능합니다. 16절에서 문체(명령형)의 변화는 후자를, 내용 전개의 연속성은 전자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복수 2인칭의 청자 ‘너희’에게 선포의 사명을 위임하는 16-17절은 야훼의 말씀으로 이해되지만, 18절도 그러한지는 의문입니다. 예루살렘이 16-17절에서는 3인칭 단수 여성으로, 18절에서는 2인칭 단수 여성으로 지칭됩니다. 18절은 예언자가 예루살렘에게 주는 책망의 말로 간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여기서는 문체와 표상의 상이성을 고려해서 11-12절, 13-14절, 15-17+18절의 세 단락으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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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12(예루살렘에 대한 야훼의 1인칭 경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자연현상이 심판의 비유로 사용됩니다.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뜨거운 바람이 하나님의 백성을 거슬러 불어옵니다. 광야의 뜨거운 바람은 요단 동편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 18:17)으로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위협적입니다. 키질이나 정결하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키질을 할 때 바람이 부드럽게 불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데 많은 도움을 받지만, 광야에서 불어오는 동풍은 알곡과 쭉정이를 모두 쓸어가 버리는 파괴적인 바람입니다. 광야의 헐벗은 산에서 불어오는 파괴적인 동풍보다 훨씬 강한 바람이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불어옵니다(12절). 야훼로부터 오는 치명적인 바람입니다. 동풍에 노출된 풀과 꽃이 곧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야훼의 명령에 따라 부는 바람에 노출된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도 마찬가지 운명에 떨어집니다. 야훼께서 직접 당신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야훼의 심판이 폭풍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에 불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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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14(탄식과 권면)

현재의 문맥에서 13-14절은 야훼의 심판(11-12절)에 대한 예언자(우리)의 반응입니다. 야훼께서 준비한 ‘더 강한 바람’은 군사적 위협입니다(→ 6-7절). 예언자는 중무장한 군대를 앞세우고 바람처럼 진격해오는 적을 보고 절망적으로 탄식합니다(13절). 그는 멸망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감하며 “우리에게 화 있도다”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릅니다. 예언자는 ‘우리’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공동체의 운명에 포함시킵니다. 심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지만 그는 아직 구원 가능성이 남아있음을 봅니다.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게 마음에서 악을 깨끗이 씻어내라고 권면합니다(14절). 야훼께서 심판을 선언하셨지만(12절) 완전히 늦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악한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구원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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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17+18(적들의 침략)

적들이 거침없이 신속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끝에 있는 성읍인 단에서 적들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오자마자 벌써 팔레스티나 중부지방인 에브라임 산지에 적들이 침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15절). 적의 공격이 전령의 보고보다 더 신속합니다. 유다의 성읍을 공격하는 적의 외침이 들리자마자(16절) 곧 예루살렘이 적에 의해 포위당합니다(17a절).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이러한 파국적 재앙은 예루살렘이 야훼를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17b절). 야훼께서 당신을 반역한 예루살렘을 징벌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무서운 적을 불러오십니다.

18절은 14절의 경우처럼 다시 2인칭 단수 여성 ‘너’로 청자를 지칭합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을 책망합니다. 예루살렘의 길과 행위가 적의 침략을 초래하였습니다. 죄의 결과(열매)가 재앙입니다. ‘이 일들’은 15-17a절에 나오는 내용을 가리킵니다. ‘악함’은 ‘재앙’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예루살렘이 선택한 길과 행위가 심장까지 파고드는 쓰라린 재앙을 초래합니다. 예루살렘은 파국적 재앙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자초한 일이기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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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심판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나의 주 하나님 아버지

임박한 심판, 유한한 우리의 생명의 한계 앞에서

겸손히 주님이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부디 지도자로서 위기와 문제들을

말씀으로 잘 깨닫고 이해하여 잘 나눌 수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에는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음을 알고

늘 겸손하게 행하게 하옵소서. 

심판의 때에라도 긍휼을 베추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인내로 거룩한 길 가게 하옵시며

살같이 빠른 광음을 아끼며 소중하게 여기며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고, 악한 생각들을 버리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게 하옵소서. 

주께 온전히 순종하는 길과 행위로

삶을 채워가는 마음과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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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속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김필회교수(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의 강의노트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구원예언자들에게 평강을 외치게 해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까? 라고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본문만으로는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왕상 22:19-23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언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참/거짓 예언자로 쉽게 나누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스라엘도 그렇게 간단하게 나눴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언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하러 갈 때 신탁을 의뢰합니다. 그때 예언자들이 한 입으로 승리를 예언합니다. 미가야 예언자만 반대 되는 예언을 합니다. 그러면서 미가야는 자신이 본 환상을 아합과 아합의 예언자들에게 알려줍니다. 왜 아합의 예언자들이 그처럼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에 나가면 승리를 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아합의 예언자들의 예언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예언입니다. 아합을 꼬셔 내서 전쟁에서 죽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 가운데 하나를 보내 그가 거짓 예언자가 되어 거짓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전하는 주체가 여호와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예언을 이해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은 선한 것, 악한 것, 좋은 것, 나쁜 것, 이해할 수 없지만 모두 하나님이 결정권자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합니다. 유일하게 세계 역사를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아합의 운명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래서 아합의 죽음의 음모에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구약 중간기에 신학적으로 걸림돌이 됩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거짓을 조장하실 수 있는가? 그래서 중간기에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은 사탄으로부터라는 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구약에는 사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고유명사로). 역대기에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대부분은 “대적자”로 나옵니다.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악한 것은 사탄이 주관하는 것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럼 이 세상이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낮아지고 사탄이 하나님과 동급이 되는 신학적 가르침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너무 사탄을 강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을 자꾸 높이면 하나님과 맞서는 또 하나의 신이 되어버립니다. 

구약은 한 분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멸망을 결정하셨기 때문에 예언자들에게 구원 선포하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가게 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책임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쾌하게 해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속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까지만 나가야지 그 이상은 이해 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알고 있는 부분은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한가지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 아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되는 지는 다 모릅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여호와께서 속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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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예레미야 13:15-27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멸망과 유배의 원인) 평화의길벗 2023.08.01 26
524 예레미야 13:01-14 내 백성 되게 하려 하였으나 평화의길벗 2023.08.01 16
523 예레미야 12:07-17 보배로운 소유에 대한 심판 평화의길벗 2023.07.30 25
522 예레미야 11:18-12:06 예레미야의 고백 1 ; 악인의 형통 앞에 평화의길벗 2023.07.30 18
521 예레미야 11:01-17 언약을 지키는 것과 깨는 것 평화의길벗 2023.07.29 30
520 예레미야 10:17-25 심판에 대한 애가와 간구 평화의길벗 2023.07.28 27
519 예레미야 10:01-16 창주조 하나님 앞에 헛된 우상 평화의길벗 2023.07.27 19
518 예레미야 09:17-26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평화의길벗 2023.07.26 25
517 예레미야 09:07-16 이 땅이 멸망한 이유 평화의길벗 2023.07.25 22
516 예레미야 08:18-09:06 무너져 가는 동족을 향한 눈물 평화의길벗 2023.07.23 21
515 예레미야 08:04-17 진리(말씀)에서 멀어진 결과 평화의길벗 2023.07.2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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