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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3:19-04:04 이스라엘아 내게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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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긍휼과 회복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택하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를 떠나 스스로 길을 굽게 했습니다. 다시금 돌아오라는 여호와의 초청에 예레미야는 고백적인 참회의 시편을 통해 동참을 호소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돌아오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무엇보다 마음의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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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절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속이고 떠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자녀삼으셨고 아름다운 기업인 약속의 땅(귀한 땅)을 주셨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해서 자신을 떠나지 않길 원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 확실하게 여호와를 속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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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각별히 사랑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배반하고 본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여인처럼 특별한 지위를 주신 여호와를 배반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특별한 지위 곧 자녀됨의 영광을 허락하셨고, ‘아름다운 기업’인 귀한 땅까지 주셨습니다. 즉 약속의 땅에 대한 상속재산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음욕에 빠진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미쳐서 인생의 반려자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것처럼 여호와를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남다른 자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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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양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로 곧 왕같은 제사장으로 택하신 교회입니다. 우리를 대속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면서 약속의 땅을 오늘 선 자리에서 살아가는 일이 우선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속이고 떠날 분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순종하고 돌아가야 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놓치지 말고 충성할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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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9-20(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 - 고발 _ 묵상도움글

1-5절과 동일한 주제를 공통된 표상을 사용해 전개시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아들(또는 딸?)로 삼으시고 다른 많은 자식들로부터 구별하여 그에게 가장 귀중한 상속재산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배반하였습니다. 남자친구와 눈이 맞아 본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여자처럼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 주신 야훼를 배반하였습니다.

19절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아들(딸)로 받아들인 이스라엘을 다른 많은 아들들(다른 민족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시지 않고 남다른 기대 속에 각별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지위(하나님에 의한 선택; 계약의 체결)를 부여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기업’(가장 아름다운 상속재산)을 줄 길을 찾으셨습니다[에스겔 20:6, 15(cf. 신 8:7-10)에 의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베푸는 남다른 애정과 특권에 감사하여 아들이 당신을 따르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순종하리라 기대하셨습니다.

20절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는 완전한 좌절과 실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음욕에 빠진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미쳐서 일생의 반려자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아들의 특권과 가나안 땅을 상속재산으로 주신 야훼를 배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돌아섬으로써 이스라엘은 그분의 남다른 자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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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5절 우리의 범죄와 불순종에도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있는 근거는 주님께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특권을 놓치고 여호와를 속인 이스라엘은 결국 우상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들이 살아야 할 길을 굽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배역한 자식들을 불러 돌아오라하고 그들의 배역함을 여호와께서 직접 고치리라 하십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용어를 12회나 사용하면서 이스라엘이 지금 함께 참회하며 기도해야 할 내용을 참회의 시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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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특별한 자녀이면서 여호와를 속인 결과는 결국 헐벗은 산위에서 애곡하는 인생,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스스로 택한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지 않으시기에 인생 길이 괴로워 지는 것이고(굽어진 길),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여호와를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여호와를 떠난 인간은 스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변하면서 배역한 이스라엘이 돌아오라고 초청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고치시리라 약속하십니다. 구원은 이스라엘이 먼저 회개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벽한 초대에 의해서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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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예레미야는 독백처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드려야 할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12회)은 우리가 주께로오고,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고, 우리가 청년때부터 우리 조상의 산업을 삼킴(곧 우상을 숭배한 역사가 오래됨), 우리는 수치중에 눞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덥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늦었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범죄 곧 바알숭배의 파국적 결과를 바로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산당의 바알제의가 우상숭배의 범죄행위였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불순종이었음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을 예레미야가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돌아온다면 긍정적으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예레미야는 앞 날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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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산(우상숭배), 그곳에서의 애곡, 스스로 길을 굽게하고 여호와를 망각한 이들은 스스로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구주 여호와께서 불러주시고 택해 주시고 순종할 능력까지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고,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기에 범죄하여 불순종하고 스스로 여호와께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서도 우리를 건지시고 고치시고 싸매시며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굽어진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부재와 망각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주되심,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진리의 성령님께서 이를 깨닫고 믿고 순종하게 하심이 함께 이루어져야 우리는 우상의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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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25(이스라엘의 회개와 하나님에게로 돌아옴) - 심판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 묵상도움글

예레미야는 예언자적 환청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화를 듣습니다(3:21-25[-4:2]). 21절은 도입부로 이 단락이 재난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울부짖는 탄식 상황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2a절에서 하나님은 애원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고, 22b절에서 탄식자들은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긍정적으로 답변합니다. 23-25절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탄식합니다. 먼저 23-24절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빠져들었던 바알숭배가 거짓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우상을 숭배한 결과로 재산과 자녀들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 바알숭배가 초래한 현재의 수치를 받아들이면서 죄와 불순종을 고백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23-25절은 이스라엘에게 구원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그분께서는 저들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21절 예언자는 예언자적 환청(幻聽)을 경험합니다. 한 때 바알을 찾아 오르내렸던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애원하며 울부짖습니다. 기대하였던 풍요와 축복대신에 재앙이 이스라엘을 덮쳤습니다. 재앙의 구체적 내용은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24절로부터 전쟁에 의한 재난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헐벗은 산’은 사람들이 우상을 찾아 산을 끊임없이 오르내렸음을 시사해줄 뿐만 아니라(→ 2절), 우상숭배가 가져다 준 저주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재앙의 신학적 원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굽은 길을 가며 그들의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가야 할 길을 벗어나 우상을 숭배하고 계약을 파기한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22절 하나님은 탄식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배역(배반)한 자식들’이라 부르시며 이들에게 돌아올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등을 돌렸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분의 ‘자식들’이며, 하나님은 ‘그들[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나님’(21절)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잘못을 치료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cf. 호 14:4). ‘돌아오라’는 야훼의 명령에 이스라엘은 두 부분으로 이뤄진 고백으로 화답합니다(22b절; cf. 신 6:4; 수 24:18). 처음 부분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옵니다”(여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께로 나왔습니다)는 ‘돌아오라’는 그분의 명령에 일치합니다. ‘배역함’의 죽을 병을 앓고 있는 이스라엘은 의사이신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의 처방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결정권자이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며 그분 앞에 섭니다. 두 번째 부분은 배역한 이스라엘이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근거를 보여줍니다.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의존하여 그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신 분이시기에, 집을 떠난 아들이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가는 것처럼(눅 15:11이하), 멸망에 떨어진 이스라엘은 그분께로 나아갑니다.

21-22a절은 심판 받은 자들에게 구원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는지에 대한 답변입니다. 21절에 기술된 탄식과 간구가 현실로 나타났을 때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훈계와 경고를 거듭 들으면서도 이를 거절하다가 멸망에 떨어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저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실까? 이스라엘이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받아주실까? 이혼을 한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다시 처음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율법적으로 금지되었기에(→ 1절) 통상적인 사고에 따르면 배반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회복은 ‘이미 상실해버린 가능성’에 속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럼에도 화해하고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긍휼)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파국이 왔기에(계약이 파기되었기에)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고 해서 구원의 길이 열리지는 않습니다. 구원의 문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초대에 의해서 열립니다.

23절 23-25절에서 이스라엘은 탄식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23a절의 히브리어 문장 구조가 모호하지만 그 내용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바알에게 드렸던 풍요제의가 ‘헛된 일’(거짓)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풍요로운 결실을 바라며 울창한 산에 있는 푸른 나무 아래서 바알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떠드는 것’뿐이었습니다. ‘떠드는 것’은 제의적 소란을 가리킵니다. 술과 음악과 춤에 취하여 떠들썩하게 우상을 섬겼지만 기대하였던 풍요대신에 재앙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바알제의의 헛됨을 깨달은 후에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23b절) 하고 참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24절 이스라엘은 바알숭배의 헛됨과 거짓을 고백합니다. ‘부끄러운 그것(수치)’(tv,Bo 보솃트)은 ‘바알’을 대신하여 사용된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바알숭배가 이스라엘에게 수치스러운 짓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가져다 주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알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써 장만해놓은 재산을 빼앗아갈 뿐이었습니다. 풍요를 기대하며 바알에게 수많은 소와 양들로, 때로는 어린아이들로 희생제사를 드렸지만 바알은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를 의미하는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2:7)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뿌리깊은 불치의 병임을 보여줍니다. 가나안에 들어와 알게 된 바알을 열심으로 섬겼지만 바알은 희생제사로 드리는 소와 양과 아이들을 받아먹기만 했습니다. 바알숭배는 기대하였던 땅의 풍요와 자손의 번성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숭배자들을 수치에 빠뜨릴 뿐이었습니다.

25절 이스라엘은 늦었지만 마침내 바알숭배의 파국적 결과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수치스러운 바알을 섬기다가 수치와 치욕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과거의 죄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현재(미래)를 바로 볼 뿐만 아니라(25a절)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25b절).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필연적 결과로 재앙이 임했음을 인정하고 당하는 수치를 받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간결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산당의 바알제의가 우상숭배의 범죄행위였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불순종이었음을 깨닫고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왜 이 파국을 맞이했는지, 처음부터 계속된 우상숭배의 결과임을 인정합니다. 심각한 죄로 직접적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했느냐? 멸망했기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것을 피상적 회개라고 봅니다.

21-25에서 그냥 피상성을 찾기에는 힘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회개를 안해서 징벌을 받아 멸망 했습니다. 호세아 6:1-3이 이성적 제의적 회개라면 답변이 가능한데 이것은 피상적 회개가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진짜 회개가 아니라 예레미야의 환청이라 합니다. 그래서 멸망 이후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앞에 나오도록, 회개하도록, (멸망 이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와도 받아줄 의무가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미늦었기 때문에),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돌아올 때 긍정적으로 반응할 준비가 하나님이 되어 있기에 예레미야가 앞날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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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2 회개는 기도와 예배의 회복뿐만 아니라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돌아오려거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시면서 세 가지 실제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합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라들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고 자랑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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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선택하여 그분께로 돌아가는 결단이며, 과거의 잘못된 ‘가증한 것들’을 지워버리고, 삶에서 실질적으로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이방민족들에게도 그분의 축복이 허락됩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는 두 가지, 첫째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바알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분명하게 선택하고 여호와께 구원을 찾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은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가증한 것(풍요제의의 우상들)을 오나전히 던져버리고, 흔들림없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의 내용은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해야 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통치에 순종하면서 신실하게 처신하면서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질서(정의와 공의)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라들도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가 이방민족들에게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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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나의 주권자임을 인정한다면 이는 기도와 예배의 자리에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에 적용되고 열매맺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의적인 고백과 예배는 시작일 뿐 제의의 열매는 결국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순종하고 예배하고 간구하는 일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삶의 변화없는 예배와 기도, 예배와 기도 없는 삶의 변화 모두 문제가 됩니다. 전자는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고, 후자는 혹여 이기적인 모습으로 얼마든지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 4:1-2(야훼의 마지막 호소) -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_ 묵상 도움글

백성의 탄식과 죄의 고백(22b-25절)에 뒤따라, 제의적 형식에 일치하여, 야훼의 답변이 나옵니다. 1-2절의 히브리어 본문이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건적인 구원선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 개의 조건문을 통해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회개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회개는 a) 하나님을 선택하여 그분께로 돌아가는 결단으로, b) 구체적으로는 과거의 잘못된 ‘가증한 것들’을 치워버리고, c) 삶에서 (맹세를 통해) 실질적으로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이방민족들에게도 그분의 축복이 허락됩니다.

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 가능성을 허락하시며, 이를 위해 이스라엘에게 참된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에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됩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야훼께로 돌아와야 합니다(1a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숭배가 재앙만 가져다 주는 헛것임을 깨닫고 야훼에게서 구원을 찾아야 합니다(→ 22b절). 다음으로 ‘야훼에게로 돌아옴’은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했다면, 그것은 삶의 태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1b절). 이스라엘은 자신을 멸망으로 오도한 ‘가증한 것’(풍요제의의 우상들)을 완전히 던져버리고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혼합주의적 요소를 찾아 모두 제거하고 다시는 방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천이 수반되는 신앙고백만이 야훼의 구원 약속을 현재화시킬 수 있습니다.

2절 세 번째 조건문도 순수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회개한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은 ‘그분의 통치영역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을 의미합니다(cf. 신 6:13, 10:20). 고대 세계에서 맹세는 한편으로는 맹세자가 의지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하는 행위이기에 그 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맹세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어느 신에게 속했는지를 책임적으로 공개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 행위의 증인으로 신을 부르기에 맹세는 맹세자의 삶을 증인이 된 신에게 종속시켜주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야훼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면, 그는 야훼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동시에 자신의 삶을 그분의 통제 아래 놓게 됩니다. 맹세가 신앙고백과 하나님 통치의 인정을 전제하기에 빈말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해야 합니다. 맹세자는 신실하게 처신하며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질서(‘정의와 공의’)를 존중해야 합니다.

뒤따르는 약속의 말씀(2b절)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세계사적 맥락에 위치시킵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자기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이름으로 진실되게 맹세하면 민족들도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는 “하나님 안에서 복을 받고 하나님 안에서 영예롭게 될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가 이방민족들에게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야훼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실현되어 이방민족들도 그분의 축복에 포함됩니다(cf. 창 12:3; 18:18; 22:18; 26:4;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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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절 묵은 땅을 갈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야 여호와께 속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하여 농경사회의 표상을 사용하여 새출발을 위한 경고를 전합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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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악한 행실을 계속하면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분의 꺼지지 않는 진노의 불길에 멸망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근본적이고도 힘겨운 방향전환입니다. 삶에 있어서 기존의 생각과 자세를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생각과 자세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합니다. 마치 묵은 땅을 개간하는 것처럼, 잡초와 돌을 제거하고 굳은 흙을 부수어 주어야 개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을 두려워한다면 가시덤불에 씨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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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은 단순한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 가죽을 벗겨야 합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마음’은 감성의 자리가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결정을 주관하는 기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은 단순히 예배와 추상적인 돌이킴이 아니라 완고한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갱신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단절을 전제한 새로운 출발이어야 합니다. 이 권면의 말씀은 긴급함과 절박성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불길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더이상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악한 행실에서 떠나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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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4(새로운 출발을 위한 경고) - 농경사회의 표상을 사용합니다. _ 묵상 도움글

3-4절은 앞 단락(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화)을 마무리 지으며 동시에 심판을 선포하는 다음 단락(청자: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을 예비해 줍니다. 새 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악한 행실을 계속하면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분의 꺼지지 않는 진노의 불길에 멸망 당할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하나님은 앞 단락과는 상이한 표상들을 사용하며 근본적이며 철저한 방향전환을 요구하십니다. 회개는 과거의 갱신이상으로 완전한 단절을 전제한 새로운 출발입니다.

3절 야훼는 농경사회에 익숙한 새로운 표상을 사용하면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새로운 출발을 권고하십니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호 10:12; cf. 막 4:1-20[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 비유적 명령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감’이 근본적이고도 힘겨운 방향전환임을 보여줍니다. 이미 사용하던 밭이 아니라 아직 한번도 갈아 본적이 없는 처녀지(‘묵은 땅’)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갱신이 아니라 처음부터 달리해야). 삶에 있어 기존의 생각과 자세를 포기하고 전혀 다른 생각과 자세로 새로운 출발을 하여야 합니다. 이 새로운 출발은 처녀지를 개간하는 작업과도 같습니다. 처녀지를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잡초와 돌을 제거하고 굳은 흙을 부드럽게 부수어 주어야만 합니다. 많은 땀 흘림이 없이는 처녀지를 개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는 자와 같다. 이들도 야훼께 돌아오기는 하지만 이들의 돌아옴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과 장애를 극복하려는 수고가 없기에 씨를 뿌려도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제의적 전통에 속하는 할례의 표상을 사용하여 1절의 내용을 반복하십다. 야훼에게로 돌아감은 언약의 표징인 육체적 할례를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계약 백성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충분조건은 아닙니다(cf. 창 17:10-11). ‘마음 가죽’(마음의 표피)을 제거해야만 합니다(cf. 신 10:16; 30:6; 애 2:29).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마음은 감성의 자리가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결정을 주관하는 기관입니다.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제의적 준수나 부분적 개선이 아니라 전인격의 완전한 갱신이 요구됩니다. 완고한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함이 없이는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출발이 불가능합니다. 씨가 싹이 터서 생명을 잉태하려면 마른 땅을 부서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감이 근본적이고도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완고함이 부서져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구원 선포로 마감하는 1-2절과 달리 4절은 불순종의 파국적 결과를 경고하면서 말을 맺습니다. 이를 통해 권면의 말씀의 긴급함과 절박성이 강조됩니다. 누구도 끌 수 없는 야훼의 분노의 불길(7:20; 17:27; 21:12b; 암 5:6; 사 1:31)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는 더 이상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 모습을 거의 다 드러낸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악한 행실을 떠나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5-10절)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야훼의 긴급한 경고를 무시하고 악행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4-6장 심판관련, 5장은 고발에 관련된 말씀이 좀더 많습니다(심판을 선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2-3장 고발

*

# 거둠의 기도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천국백성 삼아 주시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거룩함으로 살게 하여 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을 속이고 떠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을 떠나 애곡하며 스스로 길윽 굽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돌아오라 초청하시는 부름에 응답하여

우리 주 하나님께 구원이 있으니

우리의 범죄와 불순종의 자리에서 온전히 돌이키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명하셨듯이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살아서

열방이 복을 얻게 하옵소서. 

묵은 땅을 기경하듯 완전히 새롭게 행하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여 시험에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오직 마음의 할례를 받아 온전히 돌이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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