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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8:13-23 예레미야의 고백 4 ; 여호와께 맡기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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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악한 처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권면을 듣지 않고 가증한 일을 행합니다. 생명의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거절하고 우상을 따라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헛된 것을 섬깁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돌아서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레미야의 말을 상대화하여 수많은 거짓 예언 중의 하나로 폄하하며 무시합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을 여호와께 의뢰하며 공의로운 심판으로 행하시기를 요청합니다.
*
# 13-17절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한 보응은 여호와께서 더이상 그들을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나라를 증인으로 세워서, 정결해야 할 이스라엘이 얼마나 가증한 일을 행하였는지 고발합니다. 자연의 이치에도 거스리는 이스라엘의 행보는 결국 넘어지게 하고, 곁길로 행하게 하고,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여 뭇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흩어버리고 재난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더이상 응답하지 않고 돌아서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열방 가운데 택하여 세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가진 보배로운 소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마땅히 섬겨야 할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과 허무한 것들에 분향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넘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선한 길이 아니라 곁길로 빠져 넘어지게 하는 행위를 합니다. 급기야 이러한 행보는 다른 민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흩어버리고, 더이상 고통 가운데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고 등을 보이고 얼굴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

여호와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고, 여호와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여호와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할 백성이 거룩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렇게 열방 가운데서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길을 보이고 허락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 길을 버리고 가증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도 제 신들을 바꾸는 일이 없거늘 이스라엘은 오히려 여호와를 버리고 헛된 것들을 예배하는 심각한 죄에서 결국 재앙을 초래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결국 이들을 흩으시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시기를 동풍이 하는 것처럼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황무지로 변한 이스라엘 땅은 누구도 거주할 수 없는 땅이 되고 귀신들이나 들짐승이 거하는 두려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동풍으로 함 같이 쓸어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심각한 재앙은 재난의 날에 여호와께서는 응답하지도 않고 긍휼도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배반하였기에 이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등을 돌리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망각한 이스라엘에게 이제 인내와 은총의 때가 완전히 끝나고 환난의 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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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걸어온 바른 길을 벗어나서 닦지 않은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 욕망을 따르는 길은 이정표가 없는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은 휴식이 없는 길이요, 이웃과의 따스한 교감이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욕망이 추동하는 길로 나아간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다른 이들의 비웃음 뿐입니다. 땅은 황량하게 변할 것이고, 그들은 마치 뜨겁고 세차게 불어오는 동풍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원수들에게 쫓길 것입니다.”_김기석목사의 <끙끙앓는 하나님>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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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3-17(자연의 이치에도 거슬리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그 결과) - 묵상도움글

13-17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함(12절)에 대한 야훼의 답변입니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권면과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완악한 마음을 따라갔습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고집스럽게 우상을 따라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태도는 자연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상입니다. 이방나라도 제 신을 바꾼 일이 없는데,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을 버리고 아무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헛것을 섬깁니다(2:11). 이스라엘의 맹목적인 거절에 야훼께서 재앙으로 응답하십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15a절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 곧 우상숭배를 고발하고, 15b-16절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결과를 서술하고, 17절은 간략하게 심판을 선고합니다.

13절 당신의 훈계와 경고를 무시한 이스라엘을 야훼께서 탄식하시듯 고발하십니다. 야훼께서는 신분이 불분명한 ‘너희’에게 – 전후의 문맥에 따르면 아마도 이스라엘에게 – 이스라엘이 저지른 악행과 비교될만한 가증한(끔찍한) 일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명하십니다. 이방민족들과 비교해서도 소름 끼칠만한 죄악을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범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같은 일)은 문맥에서는 11-12절의 내용을, 단락 안에서는 제 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일(15절)을 가리킵니다. ‘가증한 일’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일’(5:30; 23:14)을 의미합니다.

14절 “레바논의 눈이 바위로 덮힌 산기슭에서 사라질 수 있겠는가? 먼 곳에서 흘러 오는 차가운 물이 고갈될 수 있겠는가?”

개역개정의 번역은 아마도 레바논의 높은 산정상을 덮고 있는 눈이 녹아 들판의 바위 사이를 흐르는 모습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들판의 바위’는 홍수를 전제하기에 본문의 의도에 어긋납니다. ‘들판의 바위’는 ‘산기슭을 덮고 있는 바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전반절은 “레바논의 눈이 바위로 덮인 산기슭에서 사라질 수 있겠는가?”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레바논 산맥의 높은 산들의 정상을 덮고 있는 눈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만년설은 여름에 녹아 흘러내리기는 하지만 사라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은 요단 강의 수원인 헤르몬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가리킵니다. 레바논의 만년설이 녹아 사라져버리거나 헤르몬 산에서 발원하여 요단 강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이 고갈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자연의 순리에도 어긋나는 일이 너무도 일상적으로 벌어집니다. 우상숭배자들도 자신들의 신을 배반하지 않고, 자연도 순리를 따르는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15절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자연의 이치에도 벗어난 부조리한 현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함에도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야훼를 잊어버리고 ‘허무한 것’을 섬깁니다(cf. 2:11b, 13). 우상을 가리키는 ‘허무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실체가 없는 것, 재앙’을 의미합니다. 레바논의 눈이 바위로 덮인 산기슭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차라리 자연의 이치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갑니다. 눈이 레바논 정상을 떠나면 녹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요단 강이 헤르몬 산의 수원을 떠나면 마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생명의 근원을 떠난 이스라엘은 이제 멸망과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길을 가다 걸려 넘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안전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버리고 닦지 아니한 거친 길을 선택합니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길을 버리고 ‘곁길’로 나아갑니다. 가나안의 우상들, 특히 바알을 섬기며 자기의 길을 갑니다. ‘곁길’로 옮긴 히브리어는 원래 .’좁은 길’을 의미합니다. 배반한 이스라엘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가리킵니다. ‘닦지 아니한 길’은 이스라엘이 어디로 난 길인지도 모르며 위험스럽게 길을 가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옛길’의 의미는 모호합니다. 평행되는 ‘그들의 길’은 이스라엘이 예전부터 걸어왔던 배반의 길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또는 6:16의 옛길과 관련해서 반어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한 길’(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야훼께서 이들에게 주신 율법)을 가다 넘어진 [스스로는 넘어졌다고 생각지 않는] 이스라엘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당신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령하시는 야훼보다 자기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편한 우상들을 선택했습니다.

16절 우상숭배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넘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땅도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황무지로 변한 이스라엘 땅은 이제 귀신이나 들짐승이 사는 더러운 곳이 됩니다. 고대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귀신은 파괴되어 폐허로 남겨진 옛 거주지나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를 거주지로 활동합니다. 폐허가 된 지역은 귀신들의 거주지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야기시킵니다. ‘웃음 거리’로 옮긴 히브리어(셔레카)는 조롱과 휘파람의 두 의미를 갖기에 차라리 ‘휘파람거리’로 옮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람의 갑작스런 출현이 귀신을 놀라게 해서 공격을 유발할 수 있기에 놀라지 않게 휘파람을 불어 미리 알려줍니다. ‘머리를 흔들다’도 유사한 기능을 갖습니다. 폐허가 된 지역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거나 휘파람을 부는 방어적 제의의식을 통해 귀신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습니다(19:8; 25:9, 18; 51:73; 왕상 9:8).

17절 요단 동편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동풍이 왕겨나 흙먼지를 날려 보내듯이(4:11; 13:24) 야훼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적들 앞에서 이스라엘을 흩뜨려버리십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대적들에게 붙이셨기에 누구도 안전하게 피하지 못합니다. ‘재난의 날’에 야훼께서 당신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돌렸던(2:27; cf. 32:33) 이스라엘에게 마찬가지로 얼굴이 아니라 등을 보이실 것입니다. 야훼를 잊어버린 이스라엘에게(15절) 이제 인내와 은총의 때가 완전히 끝나고 환난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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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절 여호와의 말씀을 상대화하는 것은 결국 여호와의 주권과 역사를 거절하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눈과 귀를 닫은 이들의 가증함과 패역함은 급기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해지는 예언을 상대화하여 수많은 거짓 예언들 중의 하나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미 자신들에게는 제사장들이 율법을 전하고, 지헤로운 자들이 책략을 내고,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저주하고 그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할 것으로 작정합니다. 

.

예레미야가 아니어도 자신들에게 언제든지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듣고싶고 필요한 말을 전해줄 제사장, 지혜자,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물과 재물에 눈이 어두운 제사장들, 하늘의 지혜도 아니고 이 땅의 이치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충만해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책략이 최고인 것처럼 착각하는 지혜자들, 자신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고 살아 남을 것이며 자신들에게는 언약궤와 성전이 있기에 멸망하지 않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알량한 신학을 최고인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말을 전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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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맡은 제사장, 지혜자,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원하는 평화와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뜻을 따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욕망의 소리에 부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만 제거하면 더이상 듣기 싫고 불편한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로 치고 예레미야의 어떤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대로 유지되어서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먹고사는 대로, 욕심을 챙길 수 있고, 종교권력과 기득권들 그리고 움켜쥔 모든 것들을 잃지 않고 보존하고 군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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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예수를 제거할 수 밖에 없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상황이었을 테고, 이제껏 한국 교회 주류 교단의 교권 세력이 줄기차게 연명해 온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레미야 때나 예수님 때나 그리고 지금도 이런 일들은 대적들의 인격이나 성품과 무관하게 벌어진다.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존재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는 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를 괴롭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혀로 치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예언자의 말을 상대화시키고 축소시킬 뿐 아니라 성취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는 이유로 마음껏 조롱한다”_김근주목사의 <예레미야 특강>중에서 발췌.

*

# 19-23절 원수갚는 일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우리는 다만 악을 선으로 갚으며 온전히 여호와께 맡기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백 네번째는 저주의 기도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급기야 자신을 죽이려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모든 것을 의뢰하며 기도합니다. 자신은 주의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지금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대적들의 자녀, 아내, 가족들을 향하여 원색적인 저주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자신을 구덩이에 빠지게하고 올무를 만들어 죽이려던 자들의 계획을 주께서 아시니 그 악을 사하지 말고 지우지도 말고 주 앞에서 주의 진노를 따라 철저하게 집행해 달라고 의뢰한 것입니다. 

.

이러한 저주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이러한 저주의 기도는 이곳 뿐 아니라 시편에도 있습니다(35, 59, 69, 70, 109, 137, 140). 이러한 기도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요? 

.

첫째로 예언자는 하나님의 분노를 내면화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여 분노를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분노를 지금 쏟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저주의 기도에 있는 표현들은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것을 분노에 찬 기도에 초점을 맞추면 그 내용에 있어 이것을 대적에게 직접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에 찬 정직한 기도는 기도자 스스로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래서 저주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원수 갚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더불어 참상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대적 세력에서 기인한 것임을 명확히 합니다. 

셋째로 마지막 심판의 때에는 더 이상의 긍휼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실제적 현실에서 예레미야같은 약자들은 이러한 모든 일들이 자신들이 잘못해서 생겨난 자기탓 하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업고, 억울한 일들을 풀어주실 수 있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

저주의 기도는 고난받는 자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 주위의 고난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자리 오른편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간구는 오늘 교회된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해 줍니다. 

.

오늘 우리들을 향한 여호와의 분노의 마음을 읽고 있나요? 원수를 여호와께 의뢰하고 나는 다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나요? 여호와의 긍휼의 한계에 임박하여 아직도 돌이키지 않고 화해하지않고 용서하지 못한 부분들은 없는 건가요? 여호와는 공의와 정의와 사랑을  잘 조화시키는 분이십니다. 

*

# 18:18-23(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 - 묵상도움글

적들의 조직적인 음모에 맞서 예레미야는 최고의 재판관이신 야훼께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보복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예언자의 복수 요청은 아주 노골적입니다. 대부분의 본문이 적들의 완전한 멸망을 탄원하는 부정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자면 본문의 예언자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평정심을 잃은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언자가 고립무원의 절망적 처지에 빠졌음을 시사해줍니다. 적들의 공격은 더욱 집요해지지만, 하나님의 간섭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세 번째 고백(17:14-19)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탄식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문학적 양식으로 보자면 개인탄식시에 속하는 네 번째 고백은 먼저 산문으로 된 18절과 운문으로 된 19-23절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를 박해하는 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18절(cf. 11:19, 21; 17:15; 20:10)은 뒤따르는 탄식과 간구의 배경 역할을 담당합니다. 19-23절은 다시 예언자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19-20절과 격렬하게 적들의 멸망을 간구하는 21-23절로 나눠집니다. 2인칭 독립인칭대명사(‘당신’)로 시작하는 23절의 처음 문장은 신뢰의 고백을 포함합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며

공의와 사랑을 잘 조화시켜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의 선하신 뜻을 따라 가증한 일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여호와를 잊고 허무한데 굴복하는 신앙을 용서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로 행하고

인도하시는 곳에서 거하고

거하는 그 땅이 좋은 열매맺길 힘쓰며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책무를 따라

가감없이 전하고, 제사장, 율법, 전지자로서의 본분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 과정 속에 다가오는 위협과 외로움을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감당하게 하옵소서.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며

원수 갚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기에

여호와께 모든 것을 의뢰하며

인내할 수 있는 믿음 주옵소서. 

주께서 다 아시오니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주를 의뢰하며

끝까지 주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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