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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7:01-18 예레미야의 고백 3 : 간구와 신뢰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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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판에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새겨져서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여호와께서는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심을 천명하고,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어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으로 생수의 근원을 버린 유다가 수치를 당할 것이지만 여호와를 의뢰하는 이를 구원하실 것이라 고백하면서 여호와께서 피난처이심을 또한 고백합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결국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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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27 단락 구분

17:1-4 지워질 수 없는 유다의 죄

17:5-8 저주받는 자와 복 있는 자

17:9-11 지혜문학적 가르침

17:12-18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

17:19-27 안식일의 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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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죄가 아니라 말씀을 새기길 원하십니다. 

유다의 죄는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과 제단 뿔에 새겨져서 자녀들도 그것을 보고 알게 되고, 유다는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보물과 산당들이 노략을 당하고 쫓겨나서 원수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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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속죄의 뿔인 제단 뿔에 유다의 죄가 기록되게 되었을까? 유다는 자신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죄를 범하는데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제의적 열심과 헌신이면 여호와께서 용서하시고, 급기야 그런 행위가 우선할지라도 자신들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 착각하면서 열심으로 제단 뿔에 헌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드려지는 제의로 자신들의 죄가 속죄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 화인맞은 것처럼 뻔뻔해지게 됩니다. 그러니 속죄의 뿔에 오히려 이들의 죄가 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게 새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들의 행위를 기억할 때에 그들이 우상을 숭배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애써 모은 모든 것들이 노략당하고 심지어 기업까지도 원수에게 빼앗기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은 이제 원수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노를 발하게 하고 꺼지지 않는 심판의 불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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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삶에 반복된 죄악이 무엇인가요? 오래도록 습관화 되고 익숙해 져서 심지어 그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그리고 얼마나 그것이 심각하게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인지에 대한 긴장을 늦추고, 느슨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진 않나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의 행위들이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행심사 하나하나가 수일을 반복하면서 자녀들의 언어와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부모를 생각하 때에 자녀들이 기억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삶의 우선순위에 우리 주님이 계신 것? 매사에 기도로 시작하는 일들, 항상 즐거이 말씀을 묵상하는 일들, 기쁨으로 예배하기를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자녀들은 훨씬 세밀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 지속된 진심이 아니면 자녀들은 금새 물들어 버립니다. 부디 우리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그런 부모,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죄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철된 신앙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그런 부모되길 원합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을 우리 마음판에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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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4(지워질 수 없는 유다의 죄) - 묵상도움글

유다의 죄악은 누구도 지울 수 없게 ‘마음 판’과 ‘제단 뿔’에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습니다(1절). 유다에게 죄는 천성이 되었습니다. 죄악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사함의 증인인 ‘제단 뿔’이 유다의 죄를 고발합니다. 유다는 풍요제의에 빠져 여호와께 등을 돌렸습니다(2절).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제단 뿔에 속죄제의 피를 발랐습니다. 유다의 완전한 부패에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모든 값진 것들을 침략자들에게 약탈물로 내어줄 뿐만 아니라(3절) 이들을 가나안 땅에서 내쫓아 이방 땅에서 원수들을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4절).

이 단락은 양식에 따라 유다의 죄를 고발하는 1-2절과 심판을 선포하는 3-4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발할 때는 유다를 3인칭 복수 ‘그들’로 부르지만, 심판은 2인칭 단수 ‘너’를 사용하면서 직접 유다에게 선포됩니다. 고발은 죄의 내용보다 그 심각성과 철저성에 초점을 맞추고, 상응하여 심판도 영원한 징벌로 그 강도(强度)가 최상급으로 높여집니다. 3-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1인칭으로 말씀하십니다. 1-2절의 화자로 예언자도 가능하지만 3-4절에 일치시켜 전체를 여호와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3-4절은 대체로 15:13-14에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야 할 마음에 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와 관련된 것들만 나옵니다. 마음은 히브리인에게 생각과 사고와 결정의 의지 기관입니다. 그 마음이 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획하고생각하는 바가 다 죄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제단 뿔은: 속죄의 기능을 가진 중요한 것입니다. 그 제단 뿔이 유다의 죄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제단 뿔이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유다의 죄가 제단 뿔이 기록된 것은 유다가 열심히 짐승을 잡아 제단 뿔에 발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그들은 떠듭니다. 그들의 제의 종교가 결국 죄를 범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피가 너희를 고발합니다. 네 마음이 고발하고 너희가 열심히 잡아 피를 덧칠한 제단 뿔이 너희의 죄를 고발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변명의 여지도, 멸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제단들과 아세라들 : 이를 고발하는 풍요제의입니다. 그래서 3절에 산을 의인화 합니다. 많은 풍요제의가 산에서 벌어집니다. 그래서 제의적으로 산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3절에서 산이 대표격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3절후반과 4절에 세 가지 죄악에 대한 심판 : 1)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재산과 보물들, 풍요를 기대하며 열심히 오르내린 산당들도 폐허가 될 것입니다. 2)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소유권을 주장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겠다는 것입니다. 3)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서 원수를 섬기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유배지에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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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하나님은 행위보응의 원리를 따라 저주와 복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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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 같이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사는 것 같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능력이 많고 힘이 세고, 권세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키를 한자도 더할 수 없고, 그의 생사화복은 그가 가진 그 무엇으로도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한계가 있는 인간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이들은 결국 그 한계에 봉착하게 되어 마치 생수의 근원이 끊긴 나무처럼, 그리고 메마른 황무지에서 살게 될 것이라 저주를 받게 됩니다. 결국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물 대라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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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숭배와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생사화복을 주관할 수 없으며,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에 매순간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도 남유다는 주변의 강대국들도 모두 의지 의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뿐이며, 스스로 한계가 있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그를 의지하는 이들은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난 후에 관계가 어그러지거나 신뢰가 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경배와 신뢰와 믿음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때에라야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해갈하고, 물가에 심긴 나무가 그 부리가 강변에 뻗치니 어떤 더위도, 잎이 가무는 해에도 염려 없습니다. 영원한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의 무한한 공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우리의 생각대로 역사하거나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력과 능력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보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결국은 실망할 수밖에 없고, 낙심할 때가 있고, 한계에 봉착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신앙이 아니어도 인간의 지식과 여타의 능력들로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적복해 가는 그런 시기에 더더욱 하나님보다 더 신뢰할만한 그 의지하고 든든히 하는 것들이 있기에 우리는 늘 깨어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신앙과 삶이, 그리고 믿음과 행함이, 예배와 현실이 주님의 뜻과 나의 뜻이 분리되고, 괴리되어 믿는 것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불일치할 때가 있습니다.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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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8(저주와 축복) - 묵상도움글

17:5-6 저주받은 자

   17:5 사람을 믿는 자

   17:6 저주받은 자의 운명

17:7-8 복받은 자

   17:7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17:8 복받은 자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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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대조적인 두 부분으로 이뤄진다. 5-6절은 ‘사람을 의지하는 자의 저주받은 운명’을, 7-8절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복 받은 삶’을 기술한다(cf. 시 1편). 이러한 두 운명의 대조는 지혜문학에서 자주 발견된다(cf. 욥 11:13-20; 잠 3:25-26; 11:28; 16:1-4; 28:25-26; 29:25 등등; cf. 시 37편; 40:5[4]; 62:9-11[10-12]; 118:8-9; 146:3-5).

왜 죄의 고발 뒤에 이 말씀이 놓여 졌는가?(5~8절) 사람과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자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대립. 이미 심판이 이뤄진 시대에 사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5-8절을 유의해서 읽어봐야 합니다. 물론 렘 12:1-6과 15:15-18에서 예레미야가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의 번영(축복)과 악인의 징벌(저주)에 관한 가르침은 경험세계에서 언제나 분명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악인이 성공하여 번성하는 반면에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경험적 현실과 하나님 공의 사이의 모순에 걸려 신앙적으로 좌절할 때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머리와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분의 공의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 이를 인정할 때에만 그분의 공의는 신앙인에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실존적 근본토대를 제공해준다.

이 세상은 악이 번성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 안에서의 실패와 성공을 말하기에 세상적 가치관에 기준을 둔다.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가 일치되지 않기에 5-8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까지 미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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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절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행실과 행동을 감찰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행위와 행실대로 감찰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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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자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언행심사를 감찰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은 계획하고 결정하는 의지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과 의지를 이미 꿰뚫고 계십니다. 그러니 교활하게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거라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양심에 화인맞지 않고서는 결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니 불의하게 치부한 이의 행위는 결국 그 재물을 모두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일한만큼의 대가를 받고, 모은대로 다 쓰고 누릴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고, 번 사람 쓴 사람 다 따로라는 것도 일반입니다. 남의 알을 주워다 길러내는 자고새의 이야기에서처럼 우리가 부지런히 재물을 모아도 결국 그것을 제대로 쓰는 이는 자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앓고 난 후에 더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을 떠나고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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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과연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진실, 진리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다른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가요? 우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어찌할 줄 몰라 하지만 하나님은 능히 이 모든 일을 감당하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모으고 쌓은 것이 각기 제자리를 찾아가기 전에 선한 일에 쓰임받길 기도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눈은 속이고 가릴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숨거나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질없는 것에 우리의 마음을 쏟고 헛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행실에 있어서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으로 작은 일 하나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길 빕니다. 

# 17:9-11(지혜문학적 가르침) 5-8절 말씀의 보충 - 묵상도움글

17:9-10 행위와 행실에 따라 보응하시는 하나님

   17:9 (예언자의) 질문: 누가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17:10 하나님의 답변: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

17:11 불의한 자들의 일시적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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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절이 현재의 자리에 놓여진 이유는 5-8절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에 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를 떠나 사람을 의지하는 자가 저주를 받고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일반적 가르침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실의 경험하고 자주 충돌합니다. 이 가르침이 제대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누가 사람을 믿고, 누가 하나님을 의뢰하는지 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누가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누구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면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 가에 심어진 나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 속을 살피시고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마다 제 길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으십니다.

9절 개역개정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로 번역한 히브리어 본문은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하게] 병들었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은 계획하고 결정하는 의지의 자리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의 마음보다 더 교활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의사 결정 기관인 마음이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패하였습니다. 교활하여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거짓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후반절의 ‘이를’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면 여호와께 의지하는지 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구별할 수 없다면 행위와 열매의 연관성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을 알 수 없다면 누가 ‘사막의 떨기나무’이고, 누가 ‘물 가에 심어진 나무’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결과를 통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여호와께 축복을 받은 의인들이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호와로부터 저주를 받은 악인들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마음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10절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5-8절에서 말하는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가에 심기운 나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일상적인 경험은 5-8절의 지혜문학적 가르침이 현장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교활한 자들이 때로는 가뭄이 와도 걱정 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저주에 관한 가르침은 그 유효성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회의적 태도에 여호와께서 답변을 주십니다. 예레미야의 이의제기(12:1-2)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한다면[사회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세상의 윤리적 요청이라면] 이 가르침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곳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시는 여호와께서 최종 판단자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집니다. 사람의 마음 속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여호와께서 각 사람이 살아온 길(행위)을 빠짐없이 살피시며 그 행위에 따라 갚으십니다. 의로우신 재판관 여호와께서 주관하시기에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저주’는 언제나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평가는 상대적이고 단편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평가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의 깊은 것까지 보고 판단하시기에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11절 다른 새의 알을 훔쳐서 부화시킨다는 속설을 갖고 있는 자고새의 비유를 들어 재물을 탐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자고새는 때로는 20개 정도의 많은 알을 품는 경우가 있어 생긴 속설 같습니다.] 부화된 다른 새의 알이 때가 되면 품어준 자고새를 떠나 본능적으로 자기를 낳아 준 어미 새를 찾아 가는 것처럼, 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써 모은 재산이지만 이를 평생 간직할 수 없습니다. 한창 때에 (‘그의 중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에 재물은 때가 되면 가짜 주인을 떠나 원래 소유자에게로 돌아갑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한 부자는 그 부를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의 축적을 목표로 살아온 자들은 결국 어리석은 자들로 판명이 납니다. 불의하게 얻은 재물이 때로는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축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지혜로운 자는 불의한 자들의 일시적 성공에 좌절하거나 회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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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8절 여호와께서는 소망이요 생수의 근원되시고 나의 찬송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생수의 근원 되신 여호와를 이스라엘은 버리고 수치를 당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찬송이며, 나를 고치시는 분이심을 예레미야는 고백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난처 되신 주께 피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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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저에게 빈정거리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만 위협하시지, 별 것도 이니지 않으냐! 어디 위협한 대로 되게 해보시지!” 합니다(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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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2-18(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 - 묵상도움글

17:12-13 찬양 형식의 간구

17:14-18 예레미야의 고백

17:14 간구와 신뢰의 고백

17:15 곤경의 묘사

17:16 무죄의 단언

17:17 간구와 신뢰의 고백

17:18 보응의 간구

12절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예언자는 여호와를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로 부른다. 예루살렘 성전신학에 따르면 성전 특히 지성소는 여호와께서 보이시지 않게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그분은 예루살렘 성소로부터 당신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시작부터’는 역사적 시점보다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표현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왕권을 행사하는 신들은 처음부터 신들의 왕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가릿의 바알 신화나 바벨론의 창조서사시 에누마엘리쉬가 보여주듯이 일반적으로 혼돈의 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 다른 신들에 의해 왕권을 인정받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처음부터 왕으로 통치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왕권에는 시작이 없습니다. ‘드높은 보좌’는 왕권의 권위와 위용, 곧 흔들리지 않는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그분의 왕권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습니다.

13절 예언자는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부르며 그분께 대한 의지적(依支的)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이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분이십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돌아선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합니다. ‘수치’는 참된 하나님을 떠난 자의 운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를 떠나 거짓 것을 의지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얻지 못하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흙에 기록이 되다’는 독특한 표현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하세계에 등록되다’ 또는 ‘죽을 운명이 되다’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병행하는 표현 ‘수치를 당하다’는 차라리 덧없음과 허무함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해석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생수의 근원’인 여호와를 떠나서는 수치와 멸망과 재앙만 기다릴 뿐입니다(cf. 2:13).

14절 개인탄식시의 경우에서처럼 예레미야의 고백도 찬양이 곁들인 치유(cf. 시 6:2; 41:4)와 구원(cf. 시 6:4; 7:1; 22:21 등등)의 간구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로 인해 받은 예언자의 상처(cf. 15:15-18)는 여호와만이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를 선포했기에 당하는 고통이라 예언자는 세상으로부터 위로를 받거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신 분 이외에는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고, 또 도와주려 하지도 않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에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대한 신뢰와 그분의 개입에 대한 기대가 함축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당신을 찬양할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구원 능력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찬양을 받으시는 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 분만이 찬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능력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 강력한 기도입니다. / 3-40년동안 유다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를 조롱하는 사람들. 청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심판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는 거짓 예언자 아니냐? 이정도 되면 예레미야도 선포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로 몰리지만 빠져나갈,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심지어 멸망하기를 바라는 나쁜 놈이라 생각합니다.

15절 예언자의 탄식과 아픔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언자의 선포는 청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거절당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cf. 사 5:19; 겔 12:21이하) 하며 예레미야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적 기원을, 예레미야의 ‘예언자 됨’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전통적인 구원신앙에 젖어있는 이들은 예레미야의 심판선언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예레미야의 선포는 여호와께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당신 백성을 멸망시키실 수 있겠는가? 네 말을 믿고 싶으니 네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하나님 백성의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16절 백성들은 심판선언을 재앙을 바라는 예언자의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원하고 있다고, 속으로 원하니까 말할 때마다 ‘파멸과 멸망’을 외치는 것(cf. 20:8)이 아니냐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을 향한 백성의 악의에 찬 고발에 직면하여 달리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고, 공의로우신 재판관 여호와께서 판결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예언자가 무엇을 선포했는지는 여호와 앞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재앙의 날’을 간구하지 않았음은 여호와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부당하게 혐의를 뒤집어쓴 예언자는 자신의 의로움을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17절 다가오는 재앙의 날을 확신하는 예언자(cf. 12:3; 18:23)는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시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1:17의 우리의 번역이 맞는다면 예언자가 담대하지 못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드십니다.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두려움이 된다’는 말은 예언자의 사역이 여호와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언자는 선포된 심판이 실체화되는 날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피난처가 되실 것을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세상에서 부당하게 억눌리며 고난을 당하는 자들의 피난처이시기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는 여호와의 보호와 의로움의 인정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의인을 환난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피난처 여호와께서 예레미야가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했음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사역 : 너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겠다.

18절 이 재앙의 날은 예언자의 의로움을 증거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에 대적들은 치욕을 당하고 무서워 떨게 됩니다. 예언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배나 되는 멸망’(갑절의 파괴)으로 그들을 멸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다시금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복수의 요청이 감정적 앙갚음에서가 아니라 법리적 논박의 결과에서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백성에 의해 거절당하고 탄압을 당할 때 그 예언자의 신적 정당성은 선포의 성취로만 확증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예언자에 의한 보복의 간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 그들이 틀렸고 내가 하나님이 보냄 받았음을 입증해 달라 나를 박해를 당한자로 놀라게 하고, 나를 놀라게 하지 마옵소서 : 이것이 중심 내용이다. 

*

# 거둠의 기도
나의 힘이 되시며

마음을 감찰하시고

나의 모든 것되시며 

환난 날에 피난처요, 위로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반복된 죄로 말미암아 

신앙의 후예들에게 믿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전수됨을 용서하옵소서.

사람이 아닌 주님만을 의지하여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길 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사람이 아닌 주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하여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되길 원합니다. 

나의 찬송이시며 나를 고치시는 분이시니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케 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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