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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5:10-21 예레미야의 고백 2 ; 탄식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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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중보자라도 바꿀 수 없는 긍휼없는 재앙에 대한 선포에 대해 예레미야는 탄식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재앙으로 괴로워 하는 상황을 여호와께 아뢴 것입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강하게 하고 예언한 대로 심판이 진행될 것을 천명하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향하여 속이는 시내같다고 심각하게 말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끝까지 예레미야를 도구로 쓰시며 건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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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절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여호와께 호소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변하지 않는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며 스스로에게 재앙을 선포합니다. 그런 자신의 운명을 어머니께(하나님; 렘 1:5, 어머니하나님이 아닌 어머니같은 하나님) 원망하듯 한탄합니다. 자신은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을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저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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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맡은 자로서 사역을 감당해 가는 예레미야는 회개의 촉구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진행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이들이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다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했다면 굳이 이런 결과를 낳지 않았을 터이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드러내게하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대면하게 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은 죄인들에게는 분노하고 대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반응이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자신의 죄를 가리고 도리어 대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돈을 빌리지도 않았고 꾸어 주어 이자를 받은 것도 아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진심이 오해받고 오히려 저주를 받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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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행한 일이지만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나게 했을 때 그것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심하게 반항하거나 저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곡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풀어 주시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처럼 주님께 호소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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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4절 하나님의 위로는 고난의 때에 함께하시고, 약속하신 말씀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탄식하는 예레미야를 향하여 여호와께서는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두려움과 낙심 그리고 좌절의 상황에 있을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는 그를 강하게하고 복을 받게하고 원수들이 재앙과 환난의 때에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간구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예언하게 했던 말씀대로 하나님은 심판을 분명하게 진행할 것이기에 그들이 소중하게 새악하는 것들이 모두 약탈당하고 대적들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으로 끌려갈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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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속에서 여호와께서 힘 주시는 일만이 우리를 두려움 속에서도 인내로 경주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실패한 인생인가? 저주 받은 인생이 아닌가 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여호와께서는 복을 받게 할 것이라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복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되고 더불어 주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주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임마누엘이 가장 큰 복임을 믿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린 외로운 상황에서도 때가 되면 오히려 그렇게 떠났던 이들이 예레미야가 맞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한 북방의 군대를 꺾을 수 없습니다. 그 때가 되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소유들이 그리고 우상을 섬기며 탐욕의 산물로 모은 것들이 전부 탈취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모으는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은 여호와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행하게 한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의 패역함이 얼마나 여호와를 분노하게 했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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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낙심 될 때에,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할 때에 주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가다가 원치 않는 현실에 봉착했을 때, 믿었던 이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오해받는 현실이 지속될 때에,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닥쳐올 때에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의 진정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문제의 극복은 오직 여호와의 복주심과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 아닌 것에 가치를 두고서 탐욕으로 무엇인가를 모아서 안심하고 안정을 보장받을 것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일찌감치 버리고 주를 앙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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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절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기에 변함없이 사명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응답에 예레미야는 탄원을 쏟아 냅니다.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돌봐 주시며 박해하는 자를 보복하시고 오래참으심으로 멸망치 않게하시오며,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간구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 어디에도 소속할 수 없이 여호와의 분노를 채우고 살아가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과 상처가 더 중해지고 너무 고통스럽기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향하여 심각한 항변을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여호와께서는 물이 말라 속이는 시내처럼 신기루같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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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을 예언하면서도 단 한번도 기적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자신을 왕따하고 대적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런 절망적 현실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는데 결국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여호와께서 오히려 신기루처럼 말라 속이는 시내같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탄원의 끝에 여호와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낸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케 하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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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할 수 있습니다. 탄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국에 원망으로 귀결되어서는 안됩니다. 고통이 가중되어지고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너무 클 때 나도 모르게 여호와를 향하여 원망의 말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고립된 삶의 분노가 너무 커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탄식과 탄원이 너무 과해서 그만 이스라엘이 범한 죄에 가까운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며 맘대로 웅덩이를 파서 다른 물을 두고 교만했던 죄입니다(렘 2장).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신기루같다고 표현하는 말은 결국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상황과 처지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그래서 탄식하고 탄원하는 상황에서도 원망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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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절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헛된 것을 버리고 인내로 경주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멀리 가버린 것 같은 상황도 알고 계시기에 다시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잘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처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금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 함께하심과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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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예언자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의 탄원에 대해서도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도구로 쓰임 받는 중에도 교만하여져서 해서는 안될 언행을 담지 않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한대로 변하지 않는 현실이 지속된다 하더라고 악인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견고한 놋성벽이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대적(악인)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붙잡아 주셔야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시시때때로 탄식과 탄원을 통해 여호와께 간구하므로 여호와로부터 약속과 힘을 얻어 이 사역을 감당해 갈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이지 이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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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을 감당하는 여정 속에서 인내가 요구됩니다. 자칫 욕심을 부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여호와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거나 여호와를 원망하여 가지 말아야 할 길과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품지 말아야 할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그래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무장하여서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이 여정을 완주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의 인도와 구원을 바라며 한걸음씩 인내로 경주해 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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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0-21(예레미야의 두 번째 고백) - 묵상도움글

15:10 예언자의 원망 어린 탄식

15:11-14 하나님의 응답

15:11 위로의 말씀(예레미야에게 주는)

15:12-14 심판의 선포(유다에게 주는)

15:12 ‘북방의 철과 놋’

15:13-14 약탈과 유배의 심판

15:15-18 예언자의 탄식

15:15-16 간구를 담은 탄식

15:17-18 탄식

15:19-21 하나님의 응답(구원 신탁)

15:19 책망의 말씀

15:20-21 보호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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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말씀 선포의 결실은 없고 대적들만 늘어가는 절망스런 현실 앞에 예언자는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며 스스로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내게 재앙이로다’로 옮긴 ‘오이 리’(cf. 4:31[‘내게 화가 있도다’])는 원래 갑작스럽게 닥친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외치는 소리(의성어)입니다. 예언자는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어머니께 [결국은: 하나님께(→ 1:5)] 원망하듯이 한탄합니다. “나의 어머니, 어쩌자고 나를, 온 세상에 시비를 걸고 말다툼을 벌이는 이 사람을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과 싸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예언자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입니다. 심판을 선고하시는 하나님과 완고하게 등을 돌리고 돌아가기를 거절하는 백성 사이의 양보 없는 대립적 상황 한 가운데 놓여진 예언자의 고뇌와 고통을 보여줍니다. 자기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를 금지 당한 예언자(7:16; 11:14; 14:11; 37:3)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지만 사람들은 조롱과 폭력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예언자는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 같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서 거듭 싸움에 말려들며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로] 저주를 받습니다. 후반절은 현재의 문맥에서 얼마간 이질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언자는 자신은 빚을 놓은 적도 빚을 얻은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마도 예언자는 일상적인 경제생활에서 빌어 온 비유적 표현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자를 매개로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다가 개인적-사법적 싸움에 빠지는 경우는 드문 예가 아니었습니다. 남에게 어떤 나쁜 짓도 행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죄인으로 저주합니다.

11절 11-12절의 본문 전승 상태가 무척 좋지 않기에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재구성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지만 어떤 제안도 추측의 범위를 넘지는 못합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11절은 탄식하는 예언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언자에게 당신의 보호를 약속해주십니다. 그분께서 예언자를 강하게 하여 복되게 해주실 것입니다(11a절). 사람들로부터는 저주를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복을 받습니다. 재앙과 환난의 때에 원수들이 그에게 도움을 간청할 것입니다(11b절).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던 자들이 그를 찾아와서 하나님께 기도해주기를 애원할 것입니다.

12절 예언자는 일관되게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였지만, 여호와께서 이방민족들을 불러 당신 백성 유다를 치시리라는 그의 선포는 백성들에 의해 철저하게 거절당했습니다. 다윗왕조신학과 예루살렘 성전신학을 신봉하는 자들의 눈에 하나님 백성의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요 민족의 반역자였을 뿐입니다.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왕조의 영원한 보좌와 하나님 백성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제의적-교리적으로 이해하며 구원을 자신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맨손으로 ‘철과 놋’을 부술 수 있겠는가? 유다가 어찌 자신들의 능력과 군사력으로 여호와께서 심판의 도구로 북녘에서 불러오는 중무장한 침략군(1:13이하)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13절 11-12절에서 예레미야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던 하나님이 13-14절에서는 유다를 상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예언자와 사사건건 다툼을 벌이며 저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직접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유다가 범한 죄악에 상응하는 대가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재산과 보물을 적들에게 노획물로 내어주실 것입니다(cf. 12:7-8). 북방의 철과 놋(바벨론)이 유다를 유린하면서 값비싼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갈 것입니다(→ 14절).

14절 “나는 너를 [종으로 만들어]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너의 원수들을 섬기게 하리라. 내 분노에 불이 붙어 너희를 거슬러 탈 것이기 때문이다.”

전반절의 MT(‘나는 네 원수를 네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지나가게 하리라’)는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MT가 원래적이라면 하나님의 대화상대가 유다에서 다시 예레미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2인칭 복수 ‘너희’가 사용된 후반절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다수의 주석자들은 ‘내가 이르게 하리라’를 ‘내가 너를 섬기게 하리라’로 수정하여 읽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은 유다가 이방민족들과 함께 유배 가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번역이 맞는다면, 유다는 모든 재물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포로가 되어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유다 사람들은 먼 이방 나라로 사로잡혀가서 자신들을 멸망시킨 원수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과 유배는 정치적으로 보자면 강대국의 침략과 탐욕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이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유다의 온갖 죄악(13b절)에 하나님이 분노하셨기 때문입니다(14b절). 전쟁의 파괴와 약탈과 유배는 범죄한 당신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의 외적 현상일 뿐입니다.

15절 예언자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계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12:1) 개입해주시길 호소합니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재앙을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는 전통적 사고에 따르면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당하는 예언자는 하나님께 잊혀진 자였습니다. ‘나를 기억하다’는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cf. 시 25:7; 89:50; 106:4). 예언자는 모든 것을 아시는 최고의 재판관 여호와께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며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해주시길 호소합니다.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는 의로움을 입증해달라는 간구에 속합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하나님께 보복을 호소하는 행위는 법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박해하는 자들이 아니라 박해를 당하는 사람이 하나님 편에 속함을 확증해 달라는 표현입니다(→ 11:20).

16절 15절 후반절에 나오는 ‘여호와로 인한 고난’의 모티브가 계속됩니다. 굶주린 자가 음식을 기쁨으로 받아먹듯이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먹었습니다(cf. 겔 2:8-3:3).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는 신적 체험의 감정적 표현보다는(cf. 18절) 하나님께 대한 신실성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자로서 보내시는 분께 순종하며 전혀 흠 없는 자세를 갖고 살았음을 주장합니다. 곧 하나님으로 인한 고난이기에 빨리 개입해주시길 간구한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는 여호와께 속한 자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의 고난은 개인이 아니라 여호와의 소유인 예언자에게 가해지는 박해입니다.

/ 일컬음을 받는 자 : 개인에게 잘 쓰지 않는 표현을 쓰므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임을 보여주며 호소한다.

/ 기쁘게 말씀 받은 것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지만 가감없이 선포했습니다. 렘은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 고통가운데 말씀을 선포했고, 그런 그의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 없었습니다. 그만큼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했음을 표현합니다. 자신의 순종을 17절에서 보여줍니다.

17절 ‘여호와로 인해 고난’에 관한 예언자의 탄식이 계속됩니다. 그는 삶을 즐기는 자들의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마치 사회에서 축출된 문둥병자처럼(레 13:36), 사회적 친교의 즐거움을 박탈당한 채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cf. 16:1-9). 그의 주변에는 가족도, 친척도, 이웃도, 친구도 없이 오직 대적뿐입니다(cf. 11:18-23; 12:6). 개인적 잘못이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손’ 때문에 예언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됩니다.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해야 하는 예언자적 직분이 그의 개인적 삶을 완전히 희생시킵니다.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는 예언자가 선포한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된 언급입니다. 그는 이웃과 사회에 평강과 축복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뿐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분노를 선포하는 심판예언자로 부름을 받았기에 그의 사회적 고립은 차라리 필연에 속합니다.

18절 예언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계속되는 고통과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처를 탄식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족함이 없는 예언자적 실존(신앙)과 고통스런 삶(실제) 사이의 신학적 모순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 말씀에 순종한 예언자는 그분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즉각적으로 이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속이는 시내, 신뢰할 수 없는 물)에 비교하여 비난합니다. ‘속이는 시내’는 평상시에는 말라있다가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시내를, ‘신뢰할 수 없는 물’(물이 말라서)은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물이 아니라 고여서 변질된 물을 가리킵니다. 여호와는 ‘생수의 근원’(2:13)이 아니라 비가 왔을 때만 잠시 흐르는 시내와도 같습니다. 목이 말라 찾아가보지만 물이 흐른 흔적만 있을 뿐 물은 없습니다. 설혹 물이 있어도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오염된 물입니다(cf. 창 15:6; 사 7:9). 하나님 중심적인 삶과 경험적 현실의 불일치가 하나님 약속의 말씀과 그분의 공의에 이의를 제기하게 만듭니다(cf. 12:1). 예언자의 탄식은 하나님께 대한 고발(비난)로 끝을 맺습니다.

19절 19-21절에서 여호와는 바로 앞 18절에서 제기되었던 비판을 전혀 무시하면서 예언자의 탄식에 답하십니다. 19절의 답변은 12:5의 경우처럼 책망과 훈계의 성격을 갖습니다. 여호와는 예언자의 탄식과 불만을 불신앙과 헌신의 부족으로 평가하십니다. 그분은 쓰라린 경험과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예언자적 자의식을 거의 상실한 예레미야에게 당신께로 돌아와서 신뢰를 회복하도록 책망하십니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의 히브리어 본문은 “네가 돌아오고자 한다면 내가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당신의 공의에 회의하는 예언자에게 단호하게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예언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 공의에 대한 신뢰이지 이해가 아닙니다. “네가 돌아오고자 한다면 내가 너를 돌아오게 하여”는 하나님께로 돌아옴이 사람의 임의적 결단에 속하는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그분의 허락과 관여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용납하셨을 때에만 그분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자신을 부르신 분 앞에 설 수 있으려면 소명의식과 신뢰감에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하거나 불만을 제기함이 없이 보내신 분께 의지해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에 회의적인 예언자에게 조건적 약속을 줍니다.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헛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예레미야의 피상적 이해와 이의제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쓸데없이 불평불만을 떠들지 말고 주어진 말씀을 충실하게 선포해야만 다시 하나님의 입이 될 수 있습니다(cf. 출 4:16).

/ 흔들리는 예레미야의 모습에 위로를 받습니다. 40여년을 사역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현실을 맏딱뜨리는 예레미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 삶의 결과들 앞에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더욱 겸손히 이 일들을 묵상해 가야 합니다. 

20절 예언자에게 보호와 승리를 약속해주는 20-21절은 내용상 1:17-19절의 반복입니다. 당신의 공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예언자를 단호하게 책망하셨던 여호와께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탄식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예언자의 소명을 다시 확인해 주시면서 그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견고한 놋 성벽’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싸움을 걸어도 이기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예언자와 함께 하면서 그를 어려움에서 구출해 주실 것입니다. 예언자의 앞길이 여전히 험난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보내신 분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보냄을 받은 자를 보호해주십니다.

21절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악한 자들과 무서운 자들의 손아귀에서 예언자를 구출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에 의한 구원은 예언자의 의로움을 보여주는 최종적 증거입니다. 악하고 포악한 자들에 의해서 예언자의 목숨이 위협에 처하게 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악한 시대에서 그분의 의지를 선포하는 자에게 좌절과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음모와 폭력이 예언자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막아주지는 않으십니다. 단지 쓰러져 좌절하지 않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도움을 주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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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복의 근원 되시며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재앙같은 현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리가 고통스러워 인내하지 못하고
주님을 향하여 원망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주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인도와 구원이 늘 우리에게 있으니
변함없이 주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오해와 대적 속에서도
주께서 가라신 그 길을 올곧게 갈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 주옵소서.
속이는 현실이 지속되더라도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면서
헛된 것들을 버리고
악인들의 길에 동화되지 말고
견고케 하시는 주의 능력을 덧입고
오직 주님을 앙망하면서
이 구원의 길, 말씀의 길을
인내로 경주해 가게 하옵소서. 



  1. No Image 06Sep
    by 평화의길벗
    2023/09/06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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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02:26-35 공의가 이루어지는 나라

  2. No Image 06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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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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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02:13-25 왕권에 대한 반역은 파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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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5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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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02:01-12 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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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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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1:38-53 아름다운 소식을 즐거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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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3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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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01:28-37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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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1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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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01:11-27 선지자 나단의 지혜

  7. No Image 31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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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31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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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01:01-10 왕을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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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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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5:01-14 꾸준한 예언 끊임없는 불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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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3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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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4:01-10 두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

  10. No Image 22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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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2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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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3:23-40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들 2 ; 거짓 예언자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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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1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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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3:09-22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들 1 ;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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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0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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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3:01-08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6 ; 여호와 우리의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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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9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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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2:20-30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4 ; 하나님 아닌 것을 더 사랑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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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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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2:10-19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3 ;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이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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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6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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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2:01-09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2 ; 정의를 저버린 자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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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1:01-14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1 ;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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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5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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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0:07-18 예레미야의 고백 5 ; 여호와의 함께하심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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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4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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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9:14-20:6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와 바스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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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9:01-13 깨진 옹기같은 유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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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2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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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8:13-23 예레미야의 고백 4 ; 여호와께 맡기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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