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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4:13-22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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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 거짓임을 말씀하시고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도 같은 운명임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심판으로 말미암아 망해가는 유다의 참상을 슬퍼하며 유다의 죄악을 인정하면서도 주의 이름과 언약에 호소하며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

# 13-16절 거짓을 예언한 자들이나 거짓 예언을 받아들인 자들 모두 동일한 심판에 떨어집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은 없으며 평강을 있을 것이라 예언합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보낸 적이 없기에 그것은 거짓 예언이며 그들은 거짓 계시, 점술, 헛된 것,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예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에게 칼과 기근이 임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덧붙여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을 받은 이들도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총체적으로 함께 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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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심판 예언과 달리 거짓 예언을 한 이들이 주로 주장한 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상을 빗대어 구원예언자라 칭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이 결코 칼과 기근으로 망하지 않고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거짓 예언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고, 명령도 이르 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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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이 없기에 이들의 ‘계시’(이상)는 거짓이며, 전문적 기술에 의존하는 이들의 ‘점술’은 신뢰할 수 없는 예언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이들의 예언은 실체가 없는 ‘헛된 것’입니다. 자주 우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하는 ‘헛된 것’(cf. 사 2:8, 18, 20; 10:10)은 허황된 거짓 예언을 신뢰하는 자들이 결국 ‘헛것’이 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신탁이 아니기에 이들의 말은 ‘자기 마음의 거짓’일 뿐입니다. 이들은 거짓 예언으로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듣는 자들도 미혹시킵니다. 한마디로 구원예언자들은 여호와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칼과 기근으로 멸망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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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안타까운 것은 이들의 거짓 예언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자신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이 진실인 줄 알고 따랐는데 이와 같이 심각한 것이라면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선느 이들에게도 동일한 칼과 기근이 있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자들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구원예언자들의 강력한 지지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보다 자신들의 욕망과 기대를 만족시켜주는 구원예언자를 좋아했을 뿐입니다. 참된 복음의 은혜와 책임을 바르게 전하는 예언보다 제의 규정 준수만을 요구하며 값싼 구원을 선포하는 부담감없는 예언자들을 더 좋아한 것입니다. 악과 재앙은 동전이 양면처럼 악을 범하면 재앙은 현실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대한 무지가 죄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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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의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영적 분별력을 지도자에게 절대 의존하는 오늘의 성도들입니다. 수년을 신앙생활해도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되지 못하고 어릴 적 신앙만으로 살다보니 중요한 문제들에 봉착할 때마다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르는 영적으로 성인아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목회자 절대 의존적 신앙이나,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종교적 제의적 신앙인으로 전락하고 믿음과 행함 또는 삶이 분리되는 신앙인으로 성장을 멈춘 신앙인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게로 잘 양육되어야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맞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들은 변함없이 주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벗삼아 잘 자라가야 합니다. 

# 14:10-16(하나님의 거절 I : 거짓 예언의 심판) - 묵상도움글

13절 제의종교의 핵심에 속하는 제사의 기능과 그 유효성에 분명한 한계를 그으신 여호와께 예레미야는 또 하나의 축인 예언에 관해 질문합니다. 예레미야는 10-12절에서 선포된 포괄적이며 확정적인 심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예언자들에 의해 오도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확실한 평강’(참된 평안)을 주어 칼과 기근을 보지 않게 해주시리라는 구원예언자들의 말을 믿었을 뿐입니다(cf. 6:14). 구원예언자들과 이들에 의해 현혹당한 백성은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임에 있어 경중이 있는데 어떻게 동일한 운명에 떨어져야 합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11절) 이스라엘을 의해 중보자의 기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14절 거짓을 예언한 자들과 거짓예언에 잘못 이끌림을 받은 백성을 구별하여 심판을 완화시켜보려는 예레미야의 시도는 하나님에 의해 거절됩니다(14-16절; cf. 5:30-31). 하나님은 먼저 구원예언자들의 정체를 폭로하십니다. 평안/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23:25, 26; 27:10, 14, 15, 16; 29:9) 자들입니다. [히브리어 성서는 ‘거짓 예언자’라는 표현을 모릅니다.] 이들은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거나 말하도록 명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보냄을 받지 않았기에 전달하도록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도 이들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간 예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포장된 이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들은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백성에게 예언합니다. 본 것이 없기에 이들의 ‘계시’(이상)는 거짓이며, 전문적 기술에 의존하는 이들의 ‘점술’은 신뢰할 수 없는 예견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이들의 예언은 실체가 없는 ‘헛된 것’입니다. 자주 우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하는 ‘헛된 것’(cf. 사 2:8, 18, 20; 10:10)은 허황된 거짓 예언을 신뢰하는 자들이 결국 ‘헛것’이 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신탁이 아니기에 이들의 말은 ‘자기 마음의 거짓’일 뿐이다. 이들은 거짓 예언으로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다 듣는 자들도 미혹시킵니다. 한마디로 구원예언자들은 여호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15절 여호와께서 당신이 보내지 않았음에도 당신의 이름으로 구원을 선포한 예언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배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심판을 결정하셨음에도 구원예언자들은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13절) 하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외쳤습니다. ‘칼과 기근’은 전쟁을 시사합니다. 구원예언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영적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세대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현실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신앙적 통찰력과 다양한 영적 경험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신앙적 깊이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죽은 전통과 교리신학에 의존하여 구원의 하나님을 앵무새처럼 떠버릴 뿐이었습니다. 거짓을 예언한 예언자들은 그 거짓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습니다(cf. 신 18:20). 칼과 기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이들의 거짓 예언에 상응하여 이들은 칼과 기근으로 멸망 당합니다.

16절 이 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10-12절)과 예언자들의 심판(13-15잘)을 연결시켜줍니다. 거짓을 예언한 자들이나 그 거짓 예언을 받아들인 자들이나 동일한 심판에 떨어집니다. 일반 백성들을 구원예언자들로부터 구별하여 중재하려는 예레미야의 시도가 실패로 끝납니다. 구원예언을 듣고 따른 자들도 동일한 심판에 떨어짐은 이들이 억울하게 오도된 자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청자들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니라 구원예언자들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하는 심판예언자)보다는 자신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주는 구원예언자들을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부족한 행실을 고발하며 책임을 묻는 심판예언자보다 제의규정의 준수를 요구하며 구원을 값싸게 선포하는 부담감 없는 구원예언자들을 더 좋아합니다. 거짓을 예언한 자들과 이들의 거짓 예언에 환호한 자들의 집안이 멸망의 심판이 떨어집니다. 이들의 아내와 자녀들도 모두 죽음에 넘겨집니다.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는 악과 재앙의 내적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악과 재앙은 독립된 두 실체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악을 범하는 순간에 재앙이 현실화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악(라아)에 재앙(라아)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

# 17-18절 거짓 예언자와 무지한 백성 모두 기근앞에 무력할 뿐입니다. 

이제 심판으로 말미암아 펼쳐질 참상은 예언자로 하여금 충격 속에 망연자실하게 하여 밤낮으로 눈물흘리게 합니다. 전쟁의 참상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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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택함과 사랑과 구별하심 속에 세워진 ‘처녀 딸 내 백성’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파국을 맞은 모습은 예언자로 하여금 충격속에 슬퍼하게 합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 백성을 전쟁을 통해서 심판하셔야 하는 그 마음은 심판의 당하는 당사자들보다 더 고통스런 아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특별한 사랑과 은총속에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전쟁을 통해 진행되었기에 그 참상은 칼과 기근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에 선지자와 제사장들 곧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이들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닙니다. 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모습에 대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학으로는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코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쟁의 참혹한 패배로 이것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망하지 않는다고 평강과 구원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던 자들이기에 그들의 당혹감과 무력감은 더욱 절망적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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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이기로 뭉쳐진 신앙과 신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현실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보고싶고 믿고싶고 이해하고 싶은 부분만 담고 있는 신학으로는 우리 하나님의 역사와 심판 그로 인한 현실의 신비를 다 이해하고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안일한 신앙, 무지한 신앙, 얕은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을 통한 긍휼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결국 멸망으로 치닫는 내 백성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유기와 침묵을 오해하며 알량한 믿음과 지식으로 경거망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무지하고 앝은 신앙이 거짓 예언에 부화뇌동하며 닥쳐진 심판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져 갈 뿐입니다.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주님 뜻을 모른채...

*

# 19-22절 거짓 예언자와 무지한 백성 모두 주를 앙망하는 일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망하게 된 유다의 구원을 위해 간구합니다. 여호와께서 치셨기에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또한 여전히 여호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회복 가능성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과 영광과 언약을 통해 구원을 호소합니다. 헛된 우상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라도 주를 앙망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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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절은 서술 의문문(화자가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서술로서의 의문문)으로 이해할 경우에 절망적 현실에 대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치료 불가능하도록 유다를 치셨기에 그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정말적인 상태에서 두려움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20절을 수사적 의문문(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진술이나 명령, 감탄의 효과를 내는 간접 화법)으로 이해할 경우 여호와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고 그래서 아직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묵하고 계신 여호와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릴 수 없으니, 시온을 싫어하시지 않으시니, 비록 시쳤지만 다시 고쳐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치료를 고대하니 빨리 개입해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가지 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한 절망적 상황에서 여호와의 처분만 바라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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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죄를고백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하기에 자신들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하면서 여호와께 범죄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죄악이 심판을 초래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이름과 주의 영광과 세우신 언약에 기초하여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서는 용서받을 만한 것이 없는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했지만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의무에 신실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와를 예루살렘 성전에 현종하시고 언약적 의무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알같은 헛된 우상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없고 하늘 스스로도 비를 내리지 못하고 오직 창조주 여호와만이 결실과 풍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를 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며, 비를 내리게 하시는 창조주의 능력만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이스라엘을 치료해 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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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파멸과 중한 상처의 징계와 심판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한계와 처지, 그리고 죄악과 우상의 헛됨을 깨닫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고백이 예레미야에 국한된 것인지 총체적인지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이 지향해야 하는 고백과 신앙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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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정국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탄핵 정국후의 판결 과정들은 곧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저항하고 있는 당사자들과, 그런 이들에 부역하며 동조하고 있는 추종자들 모두 참으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얼마나 지은 죄가 많은지 다시 구속기간이 연장 되었습니다. 급기야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오는 범죄는 엮이고 엮인 것들이 드러나면서 이전 정부의 문제들까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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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상황들이 우리 교회의 단면들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하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지도자들과, 잘못된 메시지에 동조하여 그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함께 동조 부역하는 성도들이 부패와 멸망의 길로 치닫는 줄도 모르면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병든 교회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메시지 속에 한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다만 아직 파멸과 중한 상처가 드러나지 않고 전조현상만 보여 지기에(어쩌면 암처럼 이미 수술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헛된 우상과 왜곡된 복음과 무지하고 알량한 우리의 신앙에서 속히 바르게 일어날 수 있길 원하며 주님을 앙망하나이다. 

*

# 14:17-22(탄식과 간구 II) - 묵상도움글

17절 서두에 나오는 여호와의 명령은 뒤따르는 예언자의 사적 탄식을 공적 선포로 만들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파국적 재난에 대한 예언자의 반응이 선포해야 할 메시지가 됩니다. 눈앞에 전개된 참혹한 재앙에 충격을 받은 예언자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하며 밤낮으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큰 파멸, 중한 상처’는 전쟁의 참상을 시사합니다. 자기 백성이 전쟁의 패배로 회복불능의 중상을 입었기에 예언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언자의 선포를 거절한,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녀 딸 내 백성’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연대감과 연민이 예언자를 절망적인 고통 가운데 빠뜨립니다.

18절 예언자는 자신의 눈 앞에 전개된 전쟁의 절망적 참상을 고통스럽게 묘사합니다. 성밖 들판은 적들의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의 시체로 넘칩니다. 성안이라 해서 형편이 다르지 않습니다. 양식이 떨어진 성읍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들뿐입니다. 성안이나 밖이나 죽음이 지배할 뿐입니다. [전쟁의 패배를 전제하지만 성의 함락을 시사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주전 597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공격과 관련된 말씀인 것 같습니다.] 후반절은 유배를 전제하는 개역개정의 번역과 달리 전반절에 일치시켜 멸망을 앞두고 있는 절망적 상황의 기술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전달하는 직분을 맡고 있는 자들인 예언자와 제사장이 당황하여 전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들은 눈앞에 벌어진 파국적 재앙을 신학적으로 전혀 감당하지 못합니다. 전쟁의 참혹한 패배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의지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평강의 구원예언을 하나님의 의지로 선포했던 자들이기에 이들의 당혹감과 무력감은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19절 여호와의 징계로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17-18절) 공동체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합니다. 전반절에 사용된 의문문의 형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실적 의문문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절망적 현실의 기술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자신에게 임한 엄청난 재앙에서 여호와의 단호한 심판의지를 보며 탄식합니다. ‘버리다’는 원래 ‘거절하다’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거절한 것처럼 그분께서 유다를 거절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남달리 받은 시온이 그분을 싫어한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시온을 싫어하셨습니다. ‘주의 심령’은 여호와 자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치료가 불가능하도록 유다를 치셨다. 후반절은 8:15의 반복이다. 평강을 바라지만 좋은 일이 없습니다. 치료받기(평강)를 기대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의사이신 여호와께서 때리셨기에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상황은 전혀 절망적입니다. 소망은 완전히 사라졌고 죽음의 두려움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전반절의 세 질문을 수사적 의문문으로 간주할 경우 : ‘우리-공동체’는 여호와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다고, 아직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침묵하고 계신 여호와를 움직여 공동체의 절망적인 현실에 개입시키려 합니다. 유다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모든 관계를 끊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시온을 싫어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치셨으니 당신이 고쳐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두려움 가운데 치료의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빨리 개입해서 치료해주시옵소서.

20절 탄식에 뒤이어 죄의 고백이 뒤따릅니다. 죄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해당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통로가 차단되었기에 교제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조상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죄악이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21절 7-9절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공동체는 여호와의 개입과 구원의 동기를 그분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거듭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기에 용서를 청할만한 아무런 자격이나 공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개입을 간구하며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 목소리에 청종하길 완고하게 거절하였기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 쪽에서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사악함과 죄악을 잘 아는 공동체는 ‘주(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림을 받는, 곧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공동체는 유다와 시온의 심판(멸망)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주의 영광의 보좌’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19a절을 함께 고려할 때 ‘주의 영광의 보좌’는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또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전통적인 예루살렘 성전신학에 의하면 지성소에 있는 두 그룹의 편 날개는 여호와의 보좌와 통치를 상징합니다. 여호와는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당신 백성과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cf. 암 1:2).

공동체는 [얼마간 예기치 않게]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21b절) 하고 언약에 근거하여 구원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의무를 파기하였지만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의무에 신실하실 것을 촉구합니다. 공동체는 여호와를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 현존하시는, 언약적 의무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22절 공동체의 탄식은 여호와의 창조능력에 대한 신뢰의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바알과 같은 헛된 우상들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늘이 제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여호와만이 결실과 풍요에 절대적인 비를 주실 수 있습니다. 22절은 비의 모티브를 통해 19-22절을 처음 단락인 14:1-6에 연결시켜 줍니다. 비를 내리게 하시는 창조주의 능력만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이스라엘을 치료해주실 수 있습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주의 이름을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세우시고

영원한 언약을 허락해주신 하나님 아버지

거짓된 평강 예언을 하는 것에 혹하여

여호와의 뜻을 외면하고

우리의 이기를 따라 말씀을 곡해하여

묵상하고 전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마음의 거짓으로 설교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인양

기만했던 죄악들에 대하여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여 주셔서

징계의 채찍을 통해서라도 돌이키길 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깨어나

우리 주님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악과 죄악을 깨달으며

허락하신 주의 이름과 영광을 바르게 알고

주께서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여

신실하신 주님이 자녀답게 살게하옵소서. 

헛된 우상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오직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우리 주만 앙망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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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01:01-10 왕을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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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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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5:01-14 꾸준한 예언 끊임없는 불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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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3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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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4:01-10 두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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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2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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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3:23-40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들 2 ; 거짓 예언자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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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1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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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3:09-22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들 1 ;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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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0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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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3:01-08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6 ; 여호와 우리의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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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9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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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2:20-30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4 ; 하나님 아닌 것을 더 사랑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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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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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2:10-19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3 ;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이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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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6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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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2:01-09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2 ; 정의를 저버린 자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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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1:01-14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1 ;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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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5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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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0:07-18 예레미야의 고백 5 ; 여호와의 함께하심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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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9:14-20:6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와 바스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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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3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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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9:01-13 깨진 옹기같은 유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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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2 by 평화의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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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8:13-23 예레미야의 고백 4 ; 여호와께 맡기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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