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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4:01-12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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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떠나 고통당하는 상황을 가뭄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력한 자들도 밭 가는 자도 들집승도 식물도 물이 없어 괴로워합니다. 이 아픔을 본 예레미야는 중보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해도 듣지 않고 정하신 벌을 내리실 것을 천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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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15:4(거절된 탄식과 간구) - 본문개요

14:1-15:4의 개요

a) 14:1-16 탄식과 간구의 거절(I)

14:1-9 예언자의 탄식과 간구(I)

14:1 도입부

14:2-6 가뭄으로 인한 탄식

14:7-9 구원의 간구

14:10-16 하나님의 거절(I)

14:10-12 심판의 필연성

14:13-16 구원 예언의 심판

b) 14:17-15:4 탄식과 간구의 거절(II)

14:17-22 탄식과 간구(II)

14:17-18 고난의 서술: 예언자의 탄식

14:19-22 백성을 대신한 예언자의 간구

15:1-4 하나님의 거절(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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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 여호와를 버리고 떠남의 결말은 기갈과 절망 뿐입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떠난 이스라엘의 상태를 가뭄과 기갈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은 피곤하여 애통하며 부르짖음이 커집니다. 귀족들이 돈이 있어도 물을 얻지 못해 절망하고, 농사하는 자도 물이 없어 절망하며, 들짐승이 풀이 없으므로 새끼를 버리고 헐떡이며 눈이 흐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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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혼동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상징도 됩니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 다른 물을 찾고 다른 근원을 섬기며 다른 길로 행한 이스라엘의 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없는 가뭄과 기근의 상황과 유사해 집니다. 알량한 힘과 지식과 권세로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가뭄앞에 속수무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귀족들(귀인)은 종들을 보내서 물을 구하려 하지만 구할 수 없기에 절망합니다.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린다’는 표현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밭을 가는 자 즉 농사하는 자에게도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내려지지 않는다면 역시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가 아닌 바알이 자신들의 농사에 풍요를 줄 것으로 생각했고, 비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당연히 올 줄 알았지만 이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여호와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당장 가뭄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기대한 우상은 무능, 무응답, 무책임할 뿐이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들짐승들이 자기 하나 목숨 부지하는 것도 어려우니 본능적으로 살려야 할 새끼도 버리고 헐떡이며 눈이 흐려지게 됩니다.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거늘 이를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며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먹이고 양육할 수 있다는 교만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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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천지만물의 운행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가 헛될 뿐입니다. 우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과 권세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병들고 자연재해가 닥치게 되면 인간은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 수 있다는 교만과 배반의 결말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떠났기에 기력이 쇠하여 기갈의 상태에 빠지고, 살아갈 이유와 더 나아지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런 소망을 품을 수 없는 절망에 있거든, 역시 다시 사는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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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2-6(가뭄으로 인한 예언자의 탄식) - 묵상도움글

극심한 가뭄을 탄식하며 도움을 간구하는 1-9절은 전체의 머리글인 1절을 제외하고 2-6절과 7-9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2-6절은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을 휩쓴 가뭄이 초래한 파국적 재앙을 극적으로 기술합니다. 도시와 지방 할 것 없이 가뭄은 전면적이고 치명적이었습니다(2절). 사람뿐만 아니라(3-4절) 들짐승에게도(5-6절) 혹독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귀인들도 돈과 권력으로(3절), 농부들도 경험으로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4절). 우물과 저수지는 모두 말라 물을 찾을 수 없었고, 땅은 오랜 가뭄으로 갈라져 씨를 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들짐승들도 극심한 한발에 생명을 위협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풀을 먹지 못해 젖을 낼 수 없게 된 암사슴은 제 새끼를 내버리고(5절), 비교적 가뭄을 잘 견디는 들나귀도 헐떡이며 쓰러져갔습니다(6절). 가뭄의 묘사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개입하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하나의 시도에 속합니다. 곤경과 환란에 처한 자들은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알기에 그분을 감동시키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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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절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의 유기(遺棄)입니다. 

절망 속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향하여 간구합니다. 먼저 우리의 죄악과 타락함과 범죄함이 분명하지만 주의 이름을 위해 일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소망이되시고 구원자이시기에 우리를 거류하는 자와 나그네처럼 대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놀란 자처럼 급기야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처럼 응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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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민족의 절망적 상황을 간과하지 않고 동일 운명체로 생각하며 중보하며 간구합니다. 유다의 죄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7절). 또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확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고난 당할 때에 구원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깨어질 것 같은 절망적 상황이 지속되고 마치 자신들이 걸하고 나그네와 같은 상황에 유기되어 있으니 다시 응답해 주시라는 간구를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응답하시지 않지만 여전히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임을 고백하면서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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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과 타락과 범죄함이 많은 유다는 기도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까지 빠졌지만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소망을 품고 중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상태를 말씀앞에서 진단하는 일과,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바르다면 여호와의 침묵 속에서도 여호와를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의 유기이지만 아직 기도할 수 있다면 소망은 남은 것입니다. 아직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니 유기(遺棄)의 상황에서도 주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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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9(백성을 대신한 예언자의 간구) - 묵상도움글

예언자는 극심한 가뭄을 바라보며 탄식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과 자신을 일치시키면서(‘우리’)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백성 편에 서서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는 중보기도의 중지를 명령 받고 있지만(cf. 7:16; 11:14) 자기 민족의 고통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포를 거절한 자들의 생존을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여호와 앞에 서서 도움을 간청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보냄을 받은 자로 청자들과 구별 되지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청자들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7절 가뭄으로 인한 극심한 재앙을 탄식한 후에(2-6절) 우리-공동체는 당면한 고난에 개입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7-9절). 우리-공동체는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한다”(cf. 사 59:12)는 죄가 너무 명백해서 고발을 위해 다른 증인을 내세울 필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백성의 죄악은 너무 노골적이었기에 변명의 여지도 증인을 내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백성의 삶 자체가 이들의 죄를 진술해줍니다.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배반이 일시적인 탈선이 아님을 알기에 ‘하나님 백성’을 위해 개입해달라고 간구하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범죄한(계약관계를 완전히 파괴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을 간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의 동기는 오직 여호와에게서만 찾아질 수 있기에 공동체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합니다(→ 21절; cf. 겔 20:9; 시 25:11; 79:9; 109:21 등등). 여호와께서 죄의 고백을 받아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 개입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언약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간구합니다. 이웃백성이 볼 때 능력이 없어 자신을 섬기는 자를 구해주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욕을 먹습니다.

8절 우리-공동체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합니다. 공동체는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로 부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소망이 되시는 분이며, 고난을 당할 때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출애굽 이후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구원자’로 계시하셨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에서 이를 거듭 경험했습니다. 공동체는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에 근거해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그분의 침묵을 탄식합니다. 탄식시에서 ‘어찌하여’(라마)는 비난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개입을 촉구하는 의문사로 사용됩니다. 과거에 그처럼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셨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지금은 이처럼 모르는 척 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마치 남의 땅에 거하는 이방인처럼, 단지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여인숙에 들어온 나그네처럼 무심하게 이스라엘을 대하실 수 있습니까? 당신 백성이 재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전혀 못 본 척 하시는 하나님께 공동체는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느냐?’ 하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9절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는 여호와의 침묵을 그분의 무능력으로 탄식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의 용사로 이스라엘을 재난에서 구출해주셨던 그분께서 이제는 마치 구원해 줄 힘이 없는 용사처럼, 능력을 상실한 용사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무능력에 대한 탄식은 조롱이나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그분의 개입을 촉구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왜 구해줄 힘이 있으시면서도 가만히 계십니까? 용감하게 전쟁터를 내달리는 용사처럼 이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옵소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당면한 고난에 개입하시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공동체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계약관계에 의존하여 그분의 도움을 촉구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심’(cf. 호 11:9)은 당신 백성을 위해 그 가운데 현존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함축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는 소유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공동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지만 그래도 그분께 속한 그분의 백성임을 주장하며, 지금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시길 간청합니다.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소유권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시지 않길 간구합니다(cf. 12:7). 이스라엘의 운명이 여호와의 은총에 달렸음을 알기에 그분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던 개인적 관계에 호소합니다.

오늘날 신성모독같은 표현이 구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8-9절은 정당한 표현입니다. 여호와를 움직이지 못하면 극단적 가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여호와를 움직이는 모든 수단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장법 :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어떻게든 하나님을 내 문제에 끌고 오고 싶어하는 다급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움직여서 나의 문제에 끌고오고자 모든 방법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런 기도는 정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심판의 탄식시에서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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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절 절망(絶望)은 문자 그대로 모든 소망(또는 절망;切望))이 끊어지는 것이며 멸망을 말합니다. 

유다 백성은 바른 길이 아닌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여호와를 배반하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죄를 벌하시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여호와의 인내의 끝에서,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되면 그 때는 더이상 금식하며 부르짖고 제물을 드리며 복을 구한다 할지라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계획은 바꿀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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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거룩한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길을 멀리하고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로 행한 것입니다. 그 길로 행하면서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죄악으로 치달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래참으심을 착각하여 죄악을 멈추지 않고 행한 것입니다. 마침내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이제 유다 백성을 벌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금식과 기도와 번제를 드린다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더이상 듣고 받지 않으실 것이며 칼과 기근과 전염병 곧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치는 전쟁을 통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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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絶望)은 모든 소망과 희망과 갈망이 사라진 절망(切望)이며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랑하며 달려가고 있는 길의 방향과 내용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인도하시는 길인가요?

*

# 14:10-16(하나님의 거절 I : 거짓 예언의 심판) - 묵상도움글

하나님과 예언자의 대화형식으로 기술된 10-16절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0-12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죄(위선적 경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13-16절은 구원예언의 문제를 다룹니다. 예레미야의 심판예언에 맞서 구원을 선포한 예언자들(cf. 2:8; 4:10; 6:13-14)과 그들의 거짓 예언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멸망이 선포됩니다. 거짓 예언의 문제는 특히 예레미야서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cf. 23:16-40; 27; 28; 29:15-23).

10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탄식과 간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분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신앙은 위선적인, 신뢰성이 없는 경건입니다(10a절).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는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때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며, 때로는 바알에게로 가며, 때로는 자신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혼합주의에 물든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여호와신앙과 우상숭배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제 발이 가는 데로 갑니다. 하나님은 성실함이 없는 자들의 탄식과 죄의 고백(14:1-9)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cf. 호 6:4). 그분은 이들의 진실성이 결여된 위선적 고백과 간구에 심판으로 응답하십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10bb절). 하나님께 입술의 고백은 죄를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시기에 징계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분께서 책임을 물어 죄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11절 이스라엘의 위선적-혼합주의적 경건을 지적하신 후에 여호와는 예언자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십니다(7:16; 11:14; 37:3). 예레미야는 백성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좋은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주어진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제 발을 삼가지 않는 백성’(10절)에게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성실함이 없이 위선적인 경건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좋은 것(복)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12절 말씀의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금식과 제사에 무조건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제의적 행위로는 그분의 심판의지를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제 발을 삼가지 않는 백성(10절)이 드리는 금식과 번제와 소제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전통적인 제의(예배)행위가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금식하며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는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공동체의 금식은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로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다급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행하는 제의적 의식입니다. 번제와 소제는 하나님의 것(양식)으로 드려지는 제물입니다. 제의적 행위는 그 자체로 효력이 있는 절대선이 아니다.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형성시켜주거나 향상시켜주지 않습니다.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한 사적 관계가 제사를 양자 사이의 적법한 연결통로로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경우에 한해서 제사는 그분께 나아가는 유효한 수단이 됩니다. 혼합주의에 물든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분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진멸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선적 경건을 징계하는 전쟁의 재앙은 예언자의 중보기도를 통해서도, 백성의 금식기도(cf. 욜 2:15)나 희생제사를 통해서도(cf. 6:20) 취소될 수 없는 확정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 거둠의 기도

생수의 근원 되시며 

우리의 소망되시며 고난 가운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악과 타락함과 범죄함

어그러진 길로 행한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속히 이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참된 소망되시는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절망이 더 깊어 지기 전에

우리가 가는 길의 결국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주께만 소망을 두는 인생이게 하옵소서

주님의 침묵이 용서가 아니라 때로 분노이며

심각한 유기의 상황이 지속될 수도 있음을 알고

겸손히 주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공동체의 예배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주께 열납되는

온전한 예배의 삶 살게 하옵소서.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부끄럽지 않게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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