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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3:23-40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들 2 ; 거짓 예언자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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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말씀을 도둑질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치시겠다고 거듭(30,31,32절)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엄중한 말씀이라고 말하면서 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신탁의 말씀을 전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희화하며 결국 청종하지 않는 이에게 영원한 치욕과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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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4절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사 천지에 충만하신 구원과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까운 데 뿐 아니라 먼 데에서도 계십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낱을 피하려고 해도 숨길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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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것과 먼 데는 단순히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잘 알고, 먼데 계시면 잘 모를 수 있다는 비유라기 보다는, 가까운 데는 구원의 상징으로, 먼 데는 심판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에서 구원의 주이시기도 하지만 먼 데서 심판의 주이시기도 합니다. 늘 가까이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만을 채우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느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종하기보다 자신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고 가까이에서 응답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으로만 믿고 정작 심판의 주라고 하는 사실은 애써 외면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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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은 구원과 심판의 주이십니다. 그리고 천지에 충만하시니 그의 낯빛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어디에도 언제고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가 행한대로 또한 보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부지런히 주님이 가신 길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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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3-24(가까이 계신 하나님 – 멀리 계신 하나님) - 묵상도움글

23-24절이 전후의 문맥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가까운–먼’의 상충적 표현은 자주 야훼의 ‘구원-심판’과 관련해서 사용합니다(cf. 사 55:6; 시 10:1; 22:11; 34:18; 85:9). 여기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야훼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아 온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대한 비판적 교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구원신학은 주류의 신학으로 특히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왕조에 의해 조장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일방적 이해를 거절하고 당신은 구원의(‘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심판의(‘먼 데에 있는’) 하나님임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편에서 저들의 필요를 만족시켜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 백성을 징계하기도 하십니다. 창조주 야훼 앞에서 숨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24절). 누구도 야훼의 눈을 벗어나 은밀하게 일을 꾸밀 수 없습니다.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보시고 아시기에 그분은 때로는 ‘먼 데 있는 하나님’으로, 때로는 ‘가까운 데 있는 하나님’으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구원예언자들에 대한 비판, 하나님을 항상 가까운데, 구속사적 전통으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 먼데(심판) 있는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24절은 거기에 대한 근거 구절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으로 가능합니다. 23:17로 보면 여호와를 멸시하고 완악한 대로 행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 계시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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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2절 말미에 있는 <설교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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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5-32(거짓 예언자들에 대하여) - 묵상도움글

야훼께서 꿈을 계시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당신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자들을 고발하십니다(25-27절). 이들은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라고 떠들면서 자기 생각을 야훼의 계시로 포장합니다(25절). 이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속임수)을 예언하는” 자들입니다(26절).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26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거짓을 예언하는, 제 마음의 속임수를 예언하는 예언자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27절은 바알과의 비교를 통해 꿈의 가나안적 성격을 암시해준다. “그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바알 때문에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주고받는 꿈 이야기들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도록 계략을 꾸밉니다.” 과거에 바알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은 꿈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만듭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꿈 이야기를 하나님의 계시로 떠들며 그분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며 그분을 멀리하게 만든 것입니다.

야훼는 시선을 돌려 꿈을 떠드는 거짓 예언자들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참된 예언자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시며 용기를 북돋아주십니다(28-29절). 꿈을 꾸는 자는 꿈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그 받은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28절).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야훼의 말씀이 알곡이라면 꿈은 겨(쭉정이)에 불과합니다. 겨와 알곡이 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꿈과 말씀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서로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겨(쭉정이)에 불과한 꿈은 알곡에 해당하는 말씀에 어떤 식으로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계시의 수단으로서의 꿈이 근본적으로 부정됩니다. 실체가 없는 꿈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겨를] 태워버리는 불과 같고(cf. 5:24; 15:14; 20:9)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습니다(29절). ‘불’과 ‘방망이’의 표상은 파괴적 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심판의 말씀을 함축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심판의 말씀이 거짓 예언자들을 따르는 유다에 불과 방망이가 됩니다.

야훼께서 꿈을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징계를 선언하십니다(30-32절). 당신의 이름으로 꿈을 이야기하며 서로 당신의 말을 도둑질하는 거짓 예언자들에 맞서십니다(30절). 이들은 서로 동료들의 꿈을 도둑질해서 예언합니다. 이들은 야훼로부터 말씀을 받지 못했음에도 제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고 거짓을 선포합니다(31절). 야훼께서 보내지 않으셨음에도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거짓 꿈과 허황된 말로 야훼의 백성을 미혹하는, 어떤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자들입니다(32절).

야훼종교에서 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합법적인 매체에 속합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경고하시고(창 20:3-7),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하는 야곱에게 확신을 주시며(창 46:2-4), 솔로몬에게 지혜의 약속(왕상 3:5-15)을 주십니다. 사사기 7:13-14에서는 다른 사람의 꿈 이야기를 우연히 옆에서 듣게 된 기드온은 야훼께서 미디안을 자기 손에 붙이신 것을 확신합니다(삿 7:15). 신명기 13:1-5에서는 예언자와 꿈꾸는 자가 부정적인 문맥에서 나란히 언급됩니다. 창 37:5이하; 40:6이하: 41; 욜 2:28; 단 2:1이하; 3:31-4:34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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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40절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에게 피해야 할 짐이 아니라 영적 부담으로 품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을 ‘엄중한 말씀’이라 하면서 조롱합니다.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지 않은 말씀을 자기 마음에 있는대로 행하면서 부담이 되는 것들을 피합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짐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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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3-40(야훼의 짐) - 묵상도움글

## 23:33-34(‘너희가 짐이다’)

‘짐’과 ‘신탁’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massa를 사용해 야훼의 신탁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고발합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참된 예언자인 예레미야에게 야훼의 신탁을 물어 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심판선고를 부담스런 짐(afm)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특히 예언자와 제사장이 [그의 뻔한 답을 예상하며] 그에게 조롱 삼아 ‘야훼의 (심판의) 신탁/짐’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33a절). 33b절의 개역개정(“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묻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고”)은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여라. 너희가 짐이다. 내가 너희를 던져버릴 것이다. 야훼의 말씀”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야훼는 당신이 보낸 예언자 예레미야의 신탁을 짐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바로 그들이 당신께 짐이 되기에 그들을 던져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야훼께 짐이 되는 존재는 예레미야의 심판선포를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34절). ‘야훼의 신탁/짐’이라며 자신의 말을 마치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처럼 포장하여 선포하는 자들은 그 집안이 함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이들의 거짓 신탁이 이들을 벌하는 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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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5-37(‘야훼의 신탁’에 관한 가르침)

35-36aba절은 야훼의 신탁과 관련된 바른 태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해 줍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야훼의 말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36a절). 이들은 단지 ‘야훼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야훼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고 서로 물어볼 수 있을 뿐입니다(35절). 야훼의 신탁은 특정한 인물에게만 한정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야훼의 신탁에 관하여 물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야훼께서 특별히 택한 자 이외에 ‘야훼의 신탁’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분의 말씀들을 곡해하는 자들입니다(36bb절). 이들이 선포한 야훼의 신탁이 이들에게 짐이 될 것입니다(36ba절). 37절은 35절을 다시 받아 이를 예레미야와의 관계에 적용시킵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야훼의 신탁을 직접 선포할 수 없고, 그분의 신탁이 독점적으로 주어진 예레미야에게 – 유다의 멸망 이후에 이 본문을 읽는다면, 포로기 이전의 심판예언자들에게 - 그분의 신탁에 관해 물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야훼께서 당신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야훼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고 야훼의 의지에 관해 물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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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8-40(야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주는 심판의 말씀)

야훼께서 ‘야훼의 신탁’을 선포하지 말도록 명령하셨음에도 자신들은 ‘야훼의 신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38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것이] 야훼의 신탁/짐[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러므로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누군가를] 보내어 “너희는 ‘[이것이] 야훼의 신탁/짐[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게 하였어도, 너희가 “야훼의 신탁/짐[이다].” 라는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제외한 다른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는 야훼의 신탁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야훼의 신탁을 선포한다면, 야훼께서 당신께 짐이 되는 거짓 선포자들을 잊어버리시고 그들과 그들의 선포를 따르는 예루살렘 성을 들어올려 던져버리실 것다(39절).입니 [‘잊어버리며’를 ‘들어올려’로 옮기는 것이 문맥에 일치합니다.] 야훼께서 이들에게 잊지 못할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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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에 충만하신 주님을 

구원주로만 알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망각하고 살았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계시해 주신 말씀이 아닌데

주님이 주신 것처럼 오용했던 죄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도둑질했던 죄악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합니다.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지 못한 것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의 말씀을 엄중한 말씀으로 잘 듣고

잘 격려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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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문> 예레미야 23:25~32

I. 제목 :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함으로 전하라

(말씀 전하는 자와 교사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설교)

 

II. 도입 이야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돌볼 책임을 맡기셨던 부류가 있었는데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고 보호하며 다스려야 할 ‘왕’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며 제의적인 부분과 삶에 있어서 돌봐야 할 ‘제사장들’과, 이런 왕과 제사장들이 혹 잘못된 길로 나아가거나 왜곡된 가르침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깨워 바른 길을 가도록 하나님의 뜻을 전한 ‘선지자들’로 그 역할을 구분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의 직분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있다. 결국 이들을 신랄하게 저주하고 있는 이유는 지도자들의 타락은 곧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전체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저주의 메시지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III. 배경

* 문맥적 배경 : 20장은 제사장 바스훌을 저주하고 있고, 22장에서는 열왕들의 이름을 들어 고발하고 있고 결국 그들의 비참한 결과들을 기록하며, 이제 23장에서는 선지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모두 죄악에 대한 고발과 심판을 선언하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 본문의 배경 : 23장 안에서는 1~8절에서는 의로운 가지에 대한 예언으로 참된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9~12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타락상과 그 결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13~15절에서는 사마리아 예언자들과 다를 바 없는 예루살렘 예언자들을 고발하면서 16-22절에서는 그런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들의 예언의 기원과 내용과 행태에 대하여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그들은 여호와께 듣지 아니하고 제 마음에 있는 것을 가르치고, 예언의 내용에 있어서도 평안을 선포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지도 않으며, 잘 모르면서도 말하고 열심을 품는 자들이었다. 23-24절은 그런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하여 천지에 충만하신 여호와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 본문의 내용 : 본문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예언하는 행태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25-27), 그런 가운데서도 말씀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명하고, 여호와의 말씀의 심판의 능력에 대해서 언급한다(28-29절),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을 향하여 징계하실 것을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선언하면서 그들의 예언이 백성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음을 고발한다(30~32).


IV. 핵심질문

하나님을 진노케한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 행위의 행태와 목적 그리고 그러한 예언이 미치는 결과는 무엇인가? 거짓 예언자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고 가르치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하는가?

 

V. 메시지

1. 거짓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한다(25-27절)

꿈에 대한 이해 : 야훼종교에서 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합법적인 매체에 속한다. 꿈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경고하시고(창 20:3-7),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하는 야곱에게 확신을 주시며(창 46:2-4), 솔로몬에게 지혜의 약속(왕상 3:5-15)을 주신다. 사사기 7:13-14에서는 다른 사람의 꿈 이야기를 우연히 옆에서 듣게 된 기드온은 야훼께서 미디안을 자기 손에 붙이신 것을 확신한다(삿 7:15). 신명기 13:1-5에서는 예언자와 꿈꾸는 자가 부정적인 문맥에서 나란히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는 매체로서 꿈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경로를 이용하신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히1:1). 바울 사도도 유럽지역 선교를 위해 꿈에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것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을 신약에서도 기록하고 있다(행16:9~10).

그런데 바로 이 꿈을 통한 계시가 비판을 받고 있다(25). 앞서 23-24절에서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그러나 멀리 있는 하나님(심판의 하나님)도 되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결코 숨을 수 없고, 다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포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예언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거짓으로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 행태에 대해 하나님은 분명하게 알고계심을 말씀한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인 꿈을 통해서 예언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의 간교한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것인양 꿈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26) ‘마음의 간교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욕망과 뜻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꿈을 해석하고 전하는 것 곧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28절의 성실함과 대조되는 말이다. 꿈 자체는 바른 해석이 전제되지 않을 때는 왜곡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그것을 해석하고 난 뒤에는 더더욱 인간의 탐욕이 짙게 묻어 나는 해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들은 심지어 서로 그 꿈을 말하면서 잘못된 꿈 해석에 대한 것을 서로 정당화하고 잘못된 확신에 따라 선포하기까지 했다. 또한 남들도 그렇게 하니 자신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도, 모두가 그렇게 하니 자신도 문제가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고, 남들 다 하는 생각이니 자신들도 맞다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잘못된 결말에 대하여 하나님은 27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므로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이름을 잊어 버렸듯이 이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풍요와 다산을 위해서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면서 참된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거짓 예언자들의 간교함과 탐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왜곡된 가르침은 왜곡된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거짓 예언자들의 잘못된 예언으로 말미암아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각하게 되고 만다. 더불어 그들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된다. 이와 같은 결과는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이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거짓 예언자의 거짓된 예언과 탐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망각하게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욕망이 투여된 꿈을 ‘비젼’으로 둔갑시켜 행하고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자신들의 욕망의 성취도구로서 말씀 혹은 하나님마저도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는 형국이 허다하다. 그것은 철저하게 지도자 개인의 탐욕으로 기인한 것임에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 미혹되어 파멸로 나아가고 있다.

 

2. 거짓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30-32절)

거짓 예언자들의 이와 같은 행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분명한 심판의 의지를 30, 31, 32절에서 세 번이나 “내가 치리라”를 반복하며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고발한 거짓 예언자들의 죄목은 모두 세 가지다.

첫째 죄목은 서로 여호와의 말을 도둑질하는 죄이다(30절). 자신들의 권위를 스스로 높이고,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들이 취한 태도는 서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나누고 그것을 도둑질 한다. 내가 여호와께 받은 말씀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주신 말씀을, 그것도 다른 이들도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무분별하게 해석하며 왜곡되고 잘못된 서로의 말을 도둑질한 것이다. 오늘 내가 받은 말씀이 나와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신들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골라서 귀에 듣기 좋은 것으로 도둑질해서 전한 것이다.

둘째 죄목은 여호와의 말씀을 사칭한 죄이다. 그들은 혀를 놀려서 여호와가 자신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입만 열면 떠들고 다니면서 자신들의 탐욕과 생각으로 간교한 말을 하면서도 여호와께 받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칭하면서 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을 자신들 생각과 마음대로 조정하고 제한하면서 자신들의 생각과 같다고 착각한 것이다. 지금도 설교라고,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여호와로부터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으로부터 복사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지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죄목은 거짓 꿈을 예언하고,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죄이다. 자신들의 거짓 꿈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예언하는 것도 모자라, 이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도 미혹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내가 그들을 치리라 세 번 언급하면서 심판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예언의 출처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하나님께서는 보내지도 말씀하지도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보내지 않았고, 명령하지 않았다.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백해무익한 자들) 제사장과 왕들을 깨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유익은커녕 백해무익한 존재들이 되고 있다. 차라리 그런 자들이 없었다면 백성들은 더 온전한 길로 갈 수 있었지만 오히려 거짓 예언자들이 걸림이 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백성을 이끌어 가므로 말미암아 백해무익한 거짓 예언자들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 되는 것이다.

오늘도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인터넷과 여타의 기술이 발달되어 타인의 저작권들을 쉽게 도용하거나 복사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기에 더욱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말씀을 맡은 이들에게는 깨어 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위나 위치로 인하여서 입버릇처럼 아멘을 유도하고, 헛된 자만을 방조하면서 미혹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더더욱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문제성과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무수한 말씀이 온갖 메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뿌려지고 전해지고 선포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별하는 기준은 모호해지고 모두들 제귀에 듣기 좋은 대로 수용하고 전하고 살아가는 형국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3.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는 성실하게 말하라(28-29절)

거짓 예언자들의 이와 같은 행태와 대조적으로 본 절 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받은 예언자에 대하여서도 권면하고 있고, 더불어서 거짓 예언자들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들은 이들에게 하나님 뜻에 대하여 분명하게 다시 계시한다. 28절 전반부의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거짓 예언자인지 참된 예언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거짓 예언자라면 앞부분과 이어서, 그리고 참된 예언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인 꿈이라고 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불어서 ‘성실’이라는 단어를 통해 당대 ‘거짓’과 대조하여 강조하고 있다.

세 가지 의문문은 자기 꿈을 하나님의 꿈처럼 말하는 자들과 말씀을 직접 받은 이들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대조하며 하나님께서 결코 묵과하지 않고 심판하실 것에 대한 의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격을 언급하며 드러내고 있다.

첫째 질문은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는가?”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분명히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현재 악인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그 대가를 치르게 되고, 결국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둘째 질문은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이다. 불은 통상 심판의 상징으로 쓰인다. 이러한 선언은 참선지자들에게는 불변하는 진리를 강조하고, 거짓 예언자들에게 불은 자신들을 심판할 도구를 연상케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불같다’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셋째 질문은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방망이 같다고 하는 것은 결국 여호와의 말씀이 심판의 도구로도 선포되고 실행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신들을 멸망하게 하거나 심판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자행하는 거짓 예언의 행태에 대하여 신랄하게 교정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제 하나님은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 성실함으로 말하라고 말씀한다(28절). 이 단어를 사람에게 적용할 때에는 그의 말과 사상과 행동이 진리의 지배를 받는 자임을 말하고 하나님께 적용할 때에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표현한다. 결국 여기서는 ‘진리’ ‘진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거짓됨과 왜곡과 가감함이 없는 받은 그대로의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메신저의 자세여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과 같다(요4:24)

지금 말씀을 받은 대로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알고 깨닫고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고 적용하며 전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가? 말씀에 증거한 대로 구원의 하나님 뿐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가감없이 전하고 있는가? 또한 말씀을 받은대로 그 하나님을 신앙하며 그 앞에서 신실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III. 결론

거짓 예언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익하고, 하나님께는 더더욱 백해무익한 종이다.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무익한 지도자, 무익함을 넘어서 해가 되는 지도자에게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 죄질이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동기와 근거와 내용은 정말로 살아계신 주께 받은 것임을 확신하는가? 무엇으로 분별하는가?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나라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가? 돌아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호와의 이름이 백성들에게 기억된 바 되길 원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항하여 말씀을 통해서 그 마음을 전하시는 분이시며, 그 말씀을 통해 때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만일 그 말씀을 도둑질하거나 거짓을 전하는 자가 있 다면 치시는 분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 앞에 선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듣고 전하는 메신저로서 합당하게 반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품고 살아야 할지 날마다 성실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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