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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09:17-35 욥의 탄식(歎息) 4 

*

욥은 까닭없이 당하는 자신의 고난에 대한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억울하지만 하나님은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시니, 세상이 악인이 득세하고 재판도 굽어진 것 같은 현실도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정죄에 대한 주권도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판결을 두려움 없이 진행할 도움의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

# 17-24절 욥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고 죄인처럼 다루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왜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는 욥에게 고난은 까닭없는 고난이었습니다. 

*

# 25-35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 징계와 연관이 있는가? 징계와 상관없이 고난이 주어지는가?

이는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

  1. 욥기는 지혜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숙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곧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성품과 계획과 사명들을 깨다는 것, 우리 삶의 원리와 세상의 이치와 만물의 질서들을 아는 것이라고 해서 부지런히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왔습니다.
    인생의 연륜이 쌓이고 배운 것이 쌓이고 뭔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면 금새 우리의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만큼 우리 안에 뭔가 배움이 채워져서 지혜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럼 뭔가 하나님과 세상 이치를 다 아는 것 같은데, 실제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아는대로, 생각한대로, 배운대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고, 정반대인 경우나 예측할 수 없는 경우들이 일상다반사인 듯 합니다. 그래서 훨씬 더 불합리한 경우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바로 그럴 때 나는 그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그런 이웃을 향해 어떤 태도로 판단하고 처신하느냐는 것입니다. 

  3. 지난 며칠 동안 욥기를 묵상해 오면서 금새 제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욥의 이야기에 대해서 너무도 부족하고 아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2장의 천상 회의에서 하나님과 참소하는 사탄의 이야기를 우리가 알아도 이렇게 욥이 당하는 고통의 크기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4. 장례식에 오고, 갑작스레 큰 슬픔을 당한 욥을 위로하기 위해 온 엘리바스의 확증편향적인 언행과 빌닷의 독설을 보았습니다. 어찌 그런 생각과 말을 할까? 이건 무레함을 넘어서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더 후벼 파고 결국 욥도 동일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누구보다 욥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이 거듭될수록 욥의 죽어 마땅한 죄와 자녀들이 그리된 원인을 그들이 잘못해서 의당 받을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5. 그런데 그네들의 생각과 말이 오늘 우리의 언행에 그리 멀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6. 고통 앞에 선 우리 자신이,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선한 이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중에 고통 당하는 자의 현명한 지혜가 무엇인지 아주 조금 나눌 수 있길 빕니다. 

  7. 하나님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욥의 고통의 이유를, 그리고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서 욥의 죄를 찾으려 애쓰는 것은 지혜서인 욥의 이야기를 엉뚱한 정죄의 도구로 매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8. 욥은 지금 영문도 모른체 까닭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고, 진상도 제대로 모른채 친구들로부터 규범적인 지혜로 온갖 비판과 독설을 받으며, 상처위에 곪아버린 곳들이 터지고, 그의 마음까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동하고 있습니다. 

  9. 그래서 참다 참다 격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기를 힘썼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 수록 욥의 표현도 많이 격해집니다.
    그런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한 이야기를 트집잡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1) 그렇다면 왜 엘리바스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욥처럼 고통을 받지 않는가?
    (2) 18절에서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라고 주장하는데, 천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낱 인간인 엘리바스가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엘리바스 자신은 천사보다 더 지혜로운 존재라는 말인가?
    (3)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21절)”고 한다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가? 인류 역사상 사망한 모든 사람은 지혜가 없어서 죽은 것인가?

  10. 욥은 지금 까닭없이 이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우리도 모르게 혹시 욥이 우리가 모르는 죄를 지은게 아닐까? 이미 당해 버린 그의 고통에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는 과정에서 그의 언행에 문제는 없을까 하는 것을 찾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청천벽력같은 고통을 당한 이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응했고, 우리 스스로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도 함부로 그렇게 판단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1. 오늘 말씀은 욥이 친구 빌닷의 독설에 대한 반응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친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했고,
    하나님의 세운 물리법칙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12. 그런데 그런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너무도 오래 지속되고 있기에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억울하지만 하나님은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시니, 세상이 악인이 득세하고 재판도 굽어진 것 같은 현실도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정죄에 대한 주권도 여호와께 있다고 말합니다. 

  13. 그런 하나님 앞에서 욥은 위기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께서 이제 보니 온전한 자나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심지어 세상이 악인들의 손에 넘어가서 이러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다 이해할 수 없기에 더 괴롭습니다. 

  14. 28절)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지나고 있는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헛될 수도 있다는 생각 앞에서 하나님이 정하기로 작정하신다면 이렇게 고난이 올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욥은 절망합니다. 

  15. 그러니 욥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판결을 두려움 없이 진행할 강력한 판결자를 바랍니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온전한 판결자라야 지금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친구들과 자신 사이에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없는 이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억울함을 풀어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6.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 세상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17. 이유없는, 까닭없는 고통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지속되고 있습니다.
    너무 아프고 억울하고 답답할 수 있습니다. 

  18. 나보다 먼저 이런 답답함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쳤던 욥을 보면서
    그리고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보다 훨씬 더 큰 답답함과 고통을 당하시고 위로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19. 이 잔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 그러나 내가 마셔야 한다면 마시겠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했던 그 고통을 감수하시고
    마침내 나를 중보하시고, 마지막 날에 나를 변호하셔서 하나님나라의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 되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20. 이후로도 계속 친구들과의 논쟁 속에서 우리가 익히 알아온 이야기들로 욥의 고통을 해석해 가겠지만, 이유없는 고통 다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욥의 깊은 사유들과 몸부림과 언행을 보게 될 것입니다. 

  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신앙하며 우리 삶을 살아갈 이유들을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이 우리가 익히 알아왔던 대로도, 그리고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도 진행된다 하더라도

  22. 변함없이 주어진 오늘 하루도 중보자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주님만 바라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로운 믿음으로
    내게 주어진 삶과,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좋은 친구로
    주님이 주신 이 사명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실 수 있길 빕니다. *

*

#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는 나의 억울함을 아시오매

주와 나 사이의 중보자 되신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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