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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08:01-22 빌닷의 독설(毒舌, uniqueness)과 독재(獨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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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향해 격한 표현을 써서 말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거친말(거센 바람)을 할거냐고 정의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잘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선조들에게 지혜를 배우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희망이 없고, 순전한 자는 버리지 않고 악인은 버림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빌닷의 독설(獨說, 독특한 설교)이 욥에게는 독설(毒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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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설(毒舌) : 남을 사납고 날카롭게 매도(罵倒)하는 말.

# 독설(獨說) : 독특한 설교

# 독재자(獨裁者, dictator) : 홀로 말하는 자

#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 : 도적 지배체제 ; 집권자 혹은 집권 세력이 나라의 자원과 공적 자금을 사금고처럼 여기면서 국가 권력과 조직을 이용하여 사익 추구에 매진하는 권위주의적 부패 정권을 이르는 말 = 독재자

# 규범적인 지혜와 반성적(회의적) 지혜를 보면서 그 자체는 옳고 그름이 아닌 다양한 지혜인지라 구구절절 맞는 표현인데, 그간 이러 말씀들을 설교하면서 적시적소에 적시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지혜롭고 좋은 말이라도 그것이 상처를 주는 독설(毒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단락별 명제로 제시된 지혜도 규범적인 지혜이니 틀린 말은 아닌 모두 맞는 말이지만 욥의 고난을 설명할 수도 없고 위로를 주기는 커녕 오히려 독설(毒舌)이 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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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고 죄를 미워하십니다. 

수아사람 빌닷은 욥에게 언제까지 이런 거친 말들을 할거냐고 대뜸 다그칩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자녀들을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버리신것이라고 단정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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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고통에 수일동안 함께했고 엘리바스의 말에 대해서도 들었다고 전제한다면 이제사 말을 여는 것도 조심스런 언행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욥의 말을 거칠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모두 맞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아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욥의 고통스런 상황이 너무도 크기에 억울한 마음과 고통으로 한 말만 가지고 그렇게 말이 거칠어서 거슬린다고 했을까?(욥은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을 터뜨린다고 말했습니다 7:11). 하나님은 정의를 굽게 하지 않으시고, 전능하신 이가 공의를 굽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1-2장에서 우리는 사탄의 참소에 욥의 고통을 허용하시는 장면은 저라도 왜 그러셔야만 했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잃고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 그들이 죄값을 치른거라고 말하는 것은 이건 어마어마한 폭력입니다. 누구도 상중에 이런 말을 하지도 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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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감정을 잘 다스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점잖게 말하고 감정적 언행들을 잘 제어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 또한 보통 일은 아니더군요. 욥의 잘못을 찾으려고 하면 빌닷의 말을 통해서 욥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하나님도 온전하다 인정한 욥의 이러한 반응을 거센 바람같다고 하는 표현은 적절하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광대하신 하나님을 내가 아는 지식과 상황의 틀에 가둬서 한 면만을 부각시키는 일들이 있는데, 이 또한 빌닷이 지금 인용하면서 욥의 자녀들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와 죄의 결과를 거두절미하고 모든 맥락을 무시하고 들이대므로 과녁이 완전 빗나가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도,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도 우리는 많은 부분들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해석하고 수용하고 감내하며 그렇게 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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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절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신을 찾고 기도하며 청결하고 정직한 자를 돌보십니다.

만일 욥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청결하고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도우시고, 가정이 평안하게 하실 것이며, 지금은 작지만 차차 창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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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청결하고 정직하게, 거룩하고 신실하게,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를 돌보시고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시는 분이 맞으시고, 그 시작이 미미해 보일지라도 점점 더 큰 은혜로 채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소위 우리가 예수믿으면 만사형통하여 부유한 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빌닷이 간과한 것은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또 전지(全知)하신 분이라 이미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욥의 간구를 듣지 않으심도 아니고, 욥이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아십니다. 그렇게 욥의 가정이 의로운 처소, 곧 거룩한 가정이라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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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속에 있는 이에게 기도가 부족하다거나, 기도해 준다거나, 그리고 더 거룩하고 정직하게, 더 열심히, 더 많이 헌신하면 하나님이 가정에도 자녀에게도 사업에도 복을 주어 나중에 더 창대하게 된다고 말하고 설교하고 액자까지 만들어서 준 구절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오며 응답을 받은 과거, 현재, 미래형도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지 않는 특별한 경우들이 또 한편 허다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만 기도할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의 정성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것이 키를 한자도 더할 수 없는것처럼 의를 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포기하는 것도, 그리고 노력 조차 하지 않는것도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영적 지적 수준들과 현제 처한 상황과 맥락들을 고려하여 고통 당하는 이에게 시의적절한 권면을 행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지혜를 간구합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청결과 정직이 하나님의 은총의 전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전제조건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그것을 행하면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결과 정직, 거룩과 의로움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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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절 조상들이 터득한 지혜를 배워 합니다. 우리의 앎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이 터득한 지혜를 배우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르쳐 주고, 그 사유(思惟)한 지혜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너무  짧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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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경험과 연륜을 통해서 체득된 것이기에 오래되고 많은 수록 더 지혜로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잠언과 욥기에서는 그래서 어른, 늙은이는 통상 지혜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나이가 작고 젊은 이들일 경우에는 경험과 연륜이 부족한 만큼 지혜도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당연히 역사와 전통이 중요한 지혜를 담고 있지만 우리가 지난 짧은 역사를 보면 분명 그 안에는 잘못된 지식과 지혜를 확신하는 것을 통해서 독선에 빠지거나 많은 희생을 치뤄낸 역사들을 봅니다. 무엇보다 오늘 전통이라는 관습을 따라 교회와 사회가 얽매이고 보수를 넘어 극우화 되어가는 현상은 전통의 외골수적인 부분 때문입니다. 확신과 신념은 다름과 변화에 대해 틀리고 왜곡되고 부정된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거부하기를 넘어 정죄하고 배제해 버립니다. 이러한 행태는 더 현명하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지리멸렬(支離滅裂) 일이나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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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서 세상의 지혜를 배우고, 역사를 배우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혀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안다)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어른을 공경해야 하고,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렇게 배운 지혜로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향해서도 지켜야 할 것과 버릴 것들 그리고 붙잡아야 할 것을 분명하면서 지혜롭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아무거나 모든 일에 모든 것에서 그렇게 해서는 위험합니다. 변화와 성숙에 있어서 전통 위에 세워져 가야 하는 것도 있지만, 거대한 방향과 흐름에 있어서 아주 작은 부분의 변화와 선회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문을 여는 것에 있어서 세상을 오래 살아온 이들은 경험을 통해 우려되는 결과가 크고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결사반대합니다. 그렇게 좌우, 신구의 갈등은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타협과 양보가 불가한 상태고 극에 달하고 상대방에게 씻기 힘든 상처와 골을 만들어내고 맙니다. 

이러한 일들을 건강하게 배워가는 일들이 절실하게 중요한 이유는, 지금 성경도 옛것과 새것이 혼재된 고전의 기능이 있기에 이를 해석하고 배워감에 있어서도 위에 언급된 일이 비일비재하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알아갈 수록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열린 마음으로 보수 개혁 진보 성숙 확대 용납 수용 감수 이해 배려등도 필요하고, 단호함과 결단과 선택도 필요하고, 그 무엇보다 인내와 기다림도 필요한 듯 합니다. 이러한 때와 시의적절한 판단과 적시적소에 맞는 것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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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9절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길은 마르고 저속한 자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왕골은 진펄에서 자라고, 갈대는 물있는 곳에서 자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이 돋자마자 곧 말라 버립니다. 하나님을 망각하는 자으 길이 이렇고, 저속한 자(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의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의 믿음은 부질없어서 가정이 제대로 서지도 보존되지도 못합니다. 한 나무가 반석에서 잘 자라다가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른체 하는데, 그 후에 다른 나무가 흙에서 날 것이라 합니다. 

19절의 ‘기쁨’은 반어적 어법으로 ‘썩는 것, 파멸, 폐망’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의 길은 결국 폐망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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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인생이 허무하고 폐망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잠언을 비롯한 성경 말씀 여러곳에서 수없이 듣는 명제입니다. 그래서 설령 그 길에서 성취된 열매가 있다 하더라도 금새 부질없어질 것이고, 하나님은 있는 것도 빼앗아 다른 이에게 줄 것이라 합니다. 위의 말씀도, 그런 사건도,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닷이 간과한 것은 지금 욥이 하나님을 망각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닷의 말대로라면 오늘 여기 제대로 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믿지 않는 이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면 그들 모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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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분을 알아가고, 더 가까이 나아가고,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것보다 더 풍성하고 우리의 생각보다 크시고, 우리의 방법보다 더 적절하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방식으로 역사하는 줄 믿습니다. 그런 여정에서는 의심없이 이 사실을 받아드리지만, 욥처럼 까닭없는 고난 속에서는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잘 될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라도 기쁨과 염려 사이의 긴장을 늦추지 못합니다. 주님을 의뢰하는 만큼 누릴 수 있고, 기도하는 만큼 근심을 내려 놓을 수 있다고 믿으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이 모든 규범적 지혜가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해 가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지금 욥은 온전한 자라도 아픕니다. 그래서 고통은 설명도 이해도 아닌 현실이고 다만 그것을 감내해 갈 뿐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생각이 평강인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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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절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인은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니 욥의 입에 웃음을 채우고, 욥의 입술에 즐거운 소리를 채울것이라 축복합니다. 그리고 욥을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고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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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다. 그리고 욥을 향해 응원하고 축복하고 기대하는 것  또한 고마운 일입니다. 더불어 욥을 미워한 이들과 악인의 징계에 대해서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들은 빌닷의 언중유골(言中有骨, 말 속에 뼈가 있다)입니다. 욥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하지도 악하다는 것입니다. 더 아이러니한 상황은 빌닷의 말들이 욥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독설을 뿜어내고 있는 빌닷은 마치 욥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악의적인 듯한 모습도 보입니다. 그렇다면 빌닷은 자신이 한 말에 따라 부끄러움과 장막이 사라지는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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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유머(즐거운 말) 그리고 기쁨과 기분 좋은 말들 시의적절하게 잘 하고 싶습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도, 그리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도 잘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앞에 전제하는 조건들을 말할 때, 어쩌면 그것들이 나의 경험과 지식에서 기인할 때 나도 모르게 나를 판단하는 표현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은 생각의 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빌닷의 말을 독설(獨說)이 되어버린 것은 비록 그는 친구를 위한다고 했으나 그가 배우고 익히며 가진 지혜가 규범적인데 갖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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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청결하고 정직한 이를 돌보시고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지혜로우시고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를 기억하고 주의 길로 행하는 자를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이를 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웃음과 기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지금 나의 믿음과 지혜와 지식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여전히 주를 향한 마음을 잘 지켜 갈 수 있게 하옵시며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시의적절한 언행하는 좋은 이웃이 되기 원합니다. 

제게 그런 좋은 이웃도 붙여 주옵소서. 

그 누구보다 우리 주님이 

선한 이웃으로 임마누엘 하신 줄 믿으며

오늘도 여전히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 주님과 더불어 거하고 살고 있음을 믿사옵고

날로 성숙해지는 지혜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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