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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23-34 만물의 주, 구원주, 심판주이신 예수님


몰려온 무리를 피해 배에 올라 가다라 지방에 가는 도중 바람과 바다의 요동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언급하며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하자 사람들이 놀라고,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자들을 치료하자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 몰사 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합니다.


# 23-27절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이시며 구원자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몰려온 무리를 피해 배에 올라 바다를 건널 때에 큰 놀이 일어나 위기에 처하는데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예수님은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시면서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합니다. 이에 사람들이 놀라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묻습니다.

*

주님이 가라고 하셨고, 주님이 또 함께 동행합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평탄하지 않고 큰 놀이 일어나 평소 어부들인 제자들도 어찌할 줄 모를 정도로 두려워합니다.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던 주님을 깨우면서 구원을 요청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믿음이 작아 두려워한다고 말씀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가당할 수 없는 위기, 그래서 하나님의 부재같은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불신앙과 원망으로 반응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지금 갈릴리 바다위의 제자들이 그랬으며, 오늘 우리도 잠시 당하는 고난의 여정에서 쉬이 주님의 부재라 단정하며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게된 것을 왜 돌아보지 않느냐고 주님을 원망하며 깨우려 합니다. 주님은 이것이 자신이 함께 있음에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음이 없으므로 두려워한다고 진단한 것입니다. 주님은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십니다. 모든 만물이 주님의 통치와 말씀에 순종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제자들도 주님을 신뢰한다면 주님의 주권과 통치 앞에 순종과 기다림으로 반응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풍랑이 잠잠케 되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제자들이라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 한 데에는 아직 제자로 불릴만한 믿음이 부족한 때문에 마태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은 놀랍게 여기면서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합니다. 뱃사람들도 두려워했던, 그래서 불가항력적인 그 풍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제자들이 그것을 말씀으로 잠잠케하고 통치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놀란 것입니다.

*

출애굽의 그림이 연상되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뒤 곧이어 바로의 군대가 추적해 오는 상황들이 마침내 홍해가 가로막힌 곳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고 원만하며 불평했습니다. 주님이 가라시면, 주님이 함께하시면 만사형통이라고, 자신들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만큼 어려운 현실을 맞딱드렸을 때 당황하며 두려워합니다. 주님이 가라 하셨어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 하더라도 지금 제자가 가야 하는 길은 이와 같이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가야합니다. 우리 삶을 통채로 흔드는 것 같은 위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때에,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주님이 함께하는 여정의 모든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묵묵히 한걸음씩 따라갈 뿐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앞에 주님의 침묵이 마치 주님께서 자신들을 방치하고 부재하신 것이 아닌가 원망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은 모든 생사화복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에 주님과 함께,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라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의뢰하며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을 그대로 감수해 가는 것이 참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것보다 안되는 것이 태반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도 내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의뢰, 의탁,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모든 만물의 주이시며,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는 죄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풍랑이 잠잠해진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적어도 자연을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일들을 목도하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누구이신지 아직 모르고 또 고백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고도 못믿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 길이 주님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 주님은 구원자이시며, 만물의 주이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풍랑과, 혼돈의 일들을 만났거든 주님을 의지하며 인내로 경주해가고 잠잠히 여호와의 하나님 됨을 믿으며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는 자, 제자, 천국백성이 날마다 훈련하고 기억하고 살아야 할 자세입니다.




# 28-32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판주이십니다.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귀신 들린 자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귀신들이 소리질러서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역시 원망하면서 왜 아직 때가 아닌데 와서 괴롭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여 돼지 떼에 들여 보내 달라고 하고 돼지에게로 들어가 바다에 몰사됩니다.

*

귀신 들린 이들이 모습은 결국 악한 것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몹시 사납고, 다른 이들을 향하여 공격하고, 악한 것들에 사로잡히거나 중독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하나님을  떠나 죄에 종노릇하는 하나님이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이들을 만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으며, 지금 이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풍랑이는 바다를 건너 가다라까지 이른 것입니다.

무리를 피하여 간 길이지만 결국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두 사람을 위한 행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곧장 다시 본 동네로 돌아가셨다고 나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너서 여기까지 온 것은 이들을 귀신들의 압제로부터 자유케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신들린 자들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때를 언급하면서 결국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것들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귀신들이 예수님의 통치 앞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도 드러납니다.

귀신은 두 사람을 무덤 사이에서 살게 합니다. 살아 있으나 산 것이 아닌 죽은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생입니다. 몹시 사나와서 아무도 이들이 있는 길로 지나갈 수 없는 지경입니다. 주님의 품을 떠난 인간이 유한한 자원앞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끊임없이 부족한 자원을 채우려고 하다 결국 이웃의 것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키는 상황도 결국 하나님의 진노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니다.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선 눈 앞에 있는 것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이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끌려가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들, 무엇에든지 중독되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몸과 마음들, 부질없는 것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 모두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단의 종노릇 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군대귀신과 돼지떼의 수장이 홍해사건과 유사하게 그립니다. 마태는 출애굽의 모티브를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더 중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악한 영에 사로잡힌 우리를 해방하고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단의 종노릇 하던 나(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 그리고 여전히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자유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의 노예가 되어서 끌려가듯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시고 허락하시는데, 왜 우리는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매이고 붙잡혀서 끌려가듯 살아가고 있을까요? 진리되신 주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사단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었으며, 이제 이러한 것들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주님이 주신 진리의 길, 자유의 길을 누리며 전파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길 원합니다.



# 33-34절 예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돼지 떼가 몰사되자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가서 이 모든 일들을 주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시 또 예수님을 만나려고 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합니다.

*

귀신 들린 두 사람은 더이상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치유된 것을 보았다면 사람들은 이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주인들에게 가서 그대로 알립니다. 주님을 만난 이들에게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달은 바를 부지런히 증언하는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종말의 심판 주이심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때가 아닌데 왔다고 돼지떼에게로 들어가도록 간구합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이의 행동이 아닙니다. 결국 이 귀신들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알고, 심판 주라고도 알고 있지만 그를 아는대로 믿지 않습니다.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지 않음을 봅니다. 이렇듯 귀신도 아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많고, 귀신처럼 알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의 증언에 사람들은 예수닝믈 만나려고 와서 봅니다. 증언을 듣고도 이들은 결국 치료받은 두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잃어버린 돼지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계산하면서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합니다. 앞서 삶의 우선순위를 언급했는데, 지금 마을 사람들에게는 구원주도, 만왕의 왕도, 하나님의 아들도, 심판주가 주인이요 왕이 아니라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귀신 들린 자를 치료한 주님을 그 지방에서 떠나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시는 분이신대, 탐욕스런 인간은 그런 인간보다 부질없는 물질이 자신들의 주님인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주님의 증인입니다. 보고 듣고 깨달은 바를 그대로 살고, 또 다른 이들을 향하여 우리 삶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증언에 반응해야 하는 이들은 소식을 듣는 자들입니다. 이왕이면 바른 예수, 바른 복음, 바른 믿음의 길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본 대로, 들은 대로, 깨달은 대로, 배운대로 증거하십시오. 주님께서 증언하는 자의 발걸음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영혼의 치유와 해방보다 자신들의 소유가 주님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며, 주님의 피값으로 산 예수님 짜리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 한 이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렇게 새피조물된 우리들, 새 생명을 얻은 우리들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할 진대, 어찌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런 생명을 주신 주님을 자신들의 소유와 맞바꿔 버리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 땅에 부질없는 것들로 가장 귀한 우리 주님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든 소유든 사람이든 그리고 그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오늘 다시금 주님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길 빕니다. 어제는 우선순위, 그리고 오늘은 주님의 자리를...



# 기도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의 여정에서 만나는 여정에서도

고난과 핍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넉넉히 인내로 경주하며 이길 수 있는 믿음 주옵소서.

주님의 침묵과 부재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릴 줄 아는

굳건한 믿음도 주시옵소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옵소서.

우리의 경험속에 역사한 일들을 경험할 때마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과 귀와 열린 마음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더 굳건한 믿음 갖게 하옵소서.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믿고, 깨달은 만큼 더 신뢰하고 순종하는

온전한 믿음도 주시옵소서.

주님이 삶의 우선순위에 있음을 기억할 뿐 아니라

주님의 자리에 그 어떤 것도 두지 않는

지혜로운 믿음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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