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22 - 고통의 문제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다 보니 오래 묵었던 것들이 많이 드러난다. 좋은 기억들은 추억이 되고, 나쁜 기억들은 상처가 되고, 모두의 기억은 역사가 되어 있다. 특히 상처가 되었던 일들을 들어 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본능적으로 그런 일들을 잊고 싶어하고 피하고 싶어하지만 한번 들춰진 고통스런 기억은 금새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눈물로 표출되거나 누군가를 향한 분노로 드러내기도 한다.
어릴 적 하동 흥룡에 사시는 고모님이 계셨다. 친지들이 많이 없던 내게 흰머리와 옥색 한복을 입고 가득했던 고모님은 일년에 한 차례 찬바람이 제법 싸늘하던 늦가을 아버님의 기일이 되면 느즈막하게 오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평소 구경할 수 없던 큰 배와 큰 생선을 넣은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꼿꼿한 허리로 오셨던 분이셨다. 부엌 옆으로 난 통로에서 막 추수를 끝낸 휑한 논이 바로 옆에 있던 그 자리에 가져오신 보자기를 풀어 음식을 준비하시는 어머님께 드리고, 허리 춤에서 기다란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여 한모금 깊게 들이마신 후부터는 허스키한 그 목소리로 걸걸하게 욕이 섞인 말씀을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고모님의 욕은 욕이 아니라 한숨으로 들렸다. 어린 나를 안으시곤 내 이름이 아니라 큰 형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7남매를 남겨두고 떠난 동생에 대한 원망과,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어머니와 조카들이 안쓰러우셨고 거기다가 당신을 비롯한 집안이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서 그랬던 것 같다. 기일을 지낸 그 이듬에 설에 형님과 더불어 인사를 가면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내 조카 왔노라고 반가워하시며 또 우셨던 그 고모님이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여전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50을 갓 넘기고 갑작스레 발견된 암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둘째 매형되시는 분은 누님과 오누이 조카 둘을 남겨두고 떠났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어머니를 많이 닮았던 누님이 왜 하필 일찍 아버님을 여의셨던 그런 부분까지 닮아야 했을까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 그 이전에도 어머니를 제일 많이 이해하셨던 누님은 이제 가족 누구보다 더 많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거운 날이면 한켠에서 가슴앓이를 하는 누님을 본다. 가족 모두 말은 안하지만 그 아픔을 가슴으로 품는다. 그렇게 누님은 잘 이겨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설엔 훌쩍 커버린 조카가 가족 모두 모인 곳에서 아빠의 빈자리를 찾아 울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매형이 누구보다 이뻐했고, 조카딸 또한 그런 아빠를 너무도 좋아했었기에 나이가 들어갈 수록 아빠의 빈자리를 더 커보일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부딪히는 어려움들이 들 때마다 얼마나 많이 아파 했을지, 그리고 가슴에 차곡차곡 채워진 상처들이 얼마나 컸을 지 엄마 못지 않은 아픔으로 자리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통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통 속에 나오고 몸에 생채기가 나거나 병이 있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의 말로 인한 고통과 자연환경에서 오는 여러가지 고통들도 있다. 그중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고통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누가 있기 때문에 아픈 경우와 누군가가 없는 빈자리로 오는 아픔들 모두 만만치 않다. 왜 나만 겪는 고통이냐고 많이들 생각한다. 고통스런 그 순간을 당한 이들에게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신음한다. 그럴 땐 어설픈 위로의 말들이 모두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평소에 가진 신념이나 지식 그리고 심지어 신앙마저도 고통을 덜기보다는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내면으로 삭이다 병이 되거나 눈물이 되기도 하고, 외부로 표출하여 누군가를 향하여 그 분노를 쏟아내 원망하는 경우도 있고, 신을 향하여 질문하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없다. 아니 문제와 답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평생 함께 동행해야 할 삶의 한 부분 혹은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한 인간의 여정이 인생 자체라고도 한다. 그런 고통의 경중의 차이를 쉬이 말할 수 없다. 각자가 느끼는 그 아픔의 무게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삭이고 그 고통의 여정 속에 잘 빚어진 사람은 위로나 조언을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다만 고통당하는 이와 함께 울고 가슴으로 안을 뿐이다. 모두가 살아가야 할 고통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의 한계 앞에 겸손히 손을 모으고 남은 여력은 고통하는 이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이며 울며 내 기억 속 고통의 잔재들을 함께 곱씹어 치료해 간다. 그 모든 것을 넉넉히 품어줄 이를 그리워 하면서...
웃는사람 라종렬
광양시민신문 쉴만한물가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