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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3:1-14 사십 년째 조용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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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내가 부르짖은 만큼 응답을 받아 내는 셈이 아니라, 부르짖는 법조차 잊어버린 자리에 먼저 찾아오신 분을 알아보고 다시 입을 여는 데서 깨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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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은 가늠하기 어려운 길이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중년이 되고, 심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한 사람이 배운 일로 평생을 먹고살 만큼의 세월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이 수는 줄곧 좋은 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옷니엘 뒤에도(삿 3:11), 드보라의 노래 뒤에도(삿 5:31), 기드온의 날 동안에도(삿 8:28) 그 땅은 사십 년을 잠잠했습니다. 사십 년은 숨을 돌리는 길이, 밭을 갈고 아이를 키우고 절기를 지키는 길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첫 절에 적힌 사십 년은 읽다가 멈추게 합니다. 같은 수가 이번에는 평온이 아니라 압제의 길이를 재고 있습니다. 이 아침 말씀을 펴 드신 여러분의 하루가 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길이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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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삿 13:1). 사사기를 여기까지 읽어 온 사람은 다음에 무슨 말이 올지 압니다. 백성이 부르짖고,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시고, 그 땅이 잠잠해지는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순서가 깨집니다.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압제는 가장 길어졌는데 백성의 입은 가장 조용합니다. 사십 년이라는 수가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은 기간이 길어서가 아니라, 그 사십 년을 아무도 견디기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픈데 아프다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은 병입니다. 화자는 백성을 꾸짖지 않고 다만 부르짖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 둡니다. 그 빈자리가 어떤 책망보다 날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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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짖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이 책의 심장 같은 낱말이었습니다. 메소보다미아에 여덟 해를 눌렸을 때 그들은 부르짖었고(삿 3:9), 모압에 열여덟 해를 눌렸을 때도 부르짖었으며(삿 3:15), 미디안 앞에서도(삿 6:6), 암몬 앞에서도(삿 10:10) 그러했습니다. 그 외침은 대개 아파서 지르는 소리였고 뉘우침보다 하소연이 앞섰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앞에서는 그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뒷날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한 말이 그 까닭을 알려 줍니다.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 알지 못하느냐는 그 한마디는 이 지배를 이미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는 고백입니다. 고통이 오래되면 질서가 됩니다. 이 대목에서 오래 묵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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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용한 땅에 한 집이 나옵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삿 13:2). 마노아라는 이름에는 안식, 쉴 자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 대를 이을 아이가 없습니다. 이름과 형편이 어긋난 그 집은 그대로 이스라엘의 초상입니다. 더 눈에 걸리는 것은 이 부부도 부르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아이를 달라고 여호와께 울며 기도한 여인이 있습니다. 실로에서 입술만 움직이며 통곡했던 한나입니다. 마노아의 집에는 그런 기도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땅도 조용하고 그 집도 조용합니다. 체념은 이렇게 큰 데서 작은 데까지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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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침묵 속으로 사자가 걸어 들어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삿 13:3).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 오셨습니다. 구원은 부르짖음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 긍휼의 열매임이 여기서 가장 또렷해집니다. 그분은 사람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닫힌 태에 먼저 말씀을 두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십니다.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사십 년의 침묵을 한 번에 지우지 않으시고 한 아기의 울음소리로 실마리를 여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이 바로 이 순서입니다(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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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큰딸이 훈련을 마치고 사역지로 떠나던 날, 저는 담벼락에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스무 해 넘게 교우들을 떠나보낸 이력이 있으니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별은 끝내 익숙해지지 않는다고요. 그 문장을 오늘 본문 앞에서 다시 읽습니다. 익숙해지지 않아야 할 것에는 다행히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익숙해지면 안 되는 다른 것들에는 너무 익숙해진 것이 아닌지요. 응답 없이 오래 끌고 온 기도, 몇 해째 같은 자리에 걸려 있는 교회의 숙제, 고쳐지지 않는 제 성품의 한 군데. 그것들 앞에서 저는 언제부터인가 부르짖지 않고 지냅니다. 묵상은 그 무감각을 건드려 다시 아프게 하는 자리입니다. 견딜 만해졌다는 말이 실은 포기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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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부르짖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오셨다는 사실은 은혜의 근거이지 침묵의 변명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 사십 년은 삼손이 태어난 뒤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사로 스무 해를 지냈지만 블레셋의 손은 그의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을 눌렀고, 이 지긋지긋한 압제가 정말로 끝난 것은 여러 세대 뒤 다윗의 날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부르짖지 않은 값은 그렇게 오래 남았습니다. 사자는 어머니에게 포도주와 독주와 부정한 것을 멀리하라 하시고(삿 13:4), 마노아의 물음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십니다(삿 13:14). 은혜가 먼저였으나 순종은 그날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먼저 오신 사랑은 우리를 앉혀 두지 않고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므로 묵상의 끝은 언제나 오늘의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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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은 사람의 셈으로는 너무 긴 세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긴 침묵의 끝에 사람이 셀 수 없는 것을 놓아두셨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한 아기, 이름도 적히지 않은 한 여인, 안식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던 한 집입니다. 셈으로 재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하나님 손에서 구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십 년을 세어 온 것은 사람이었고, 그 사십 년째 아침에 소라 땅의 밭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이 헤아리고 있는 세월의 길이가 얼마이든, 그 끝에 이미 서 계신 분을 먼저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조용했던 마음이 다시 소리를 얻고, 여러분의 하루가 셀 수 없는 은혜로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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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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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_RpFXmoZE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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