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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4:14-23 해가 부끄러워지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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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아직 남은 밤을 정직하게 견디면서도 마침내 밝아 올 아침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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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났습니다. 낮의 열기는 여전히 억척스럽지만, 새벽 네 시 무렵의 공기에는 분명히 다른 결이 섞여 듭니다. 이맘때 잠이 깨어 창을 열면 아직 사방이 캄캄한데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먼저 웁니다. 하늘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는데 그 소리만 홀로 앞서갑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금 아픕니다. 저 새는 무엇을 보고 우는 것일까. 아직 오지 않은 아침을 어떻게 저리 확신하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저 새가 틀렸다면, 이 긴 밤을 저 혼자 어떻게 견딜까. 이 여름을 지나오며 마음이 시뜻해진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남들은 다 좋아졌다는데 나만 여전히 어두운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분들, 기뻐하라는 말이 오히려 부담이 되어 버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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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도 새벽 전에 우는 새 같은 소리가 등장합니다. 어제 우리가 읽은 24장 앞부분은 온 땅이 뒤집히고 포도주가 끊기고 성문이 부서지는 폐허의 풍경이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꺼진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 갑자기 노랫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사방에서 터져 나옵니다. 서쪽 바다에서, 동방에서, 바다 모든 섬에서, 그리고 땅 끝에서. 놀라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노래를 들은 예언자의 반응입니다. 그는 함께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몸을 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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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4장부터 27장까지를 성서학자들은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 부릅니다. 여기서부터 예언자의 시선은 한 나라의 흥망을 넘어 온 세계의 운명으로, 그리고 역사의 끝자락까지 넓어집니다. 김필회 교수는 오늘 본문의 성격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의 성급한 환호와 예언자의 전율. 노래하는 이들은 아마도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다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격변을 보며 이방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읽어 냈고, 그것이 곧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는 신호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노래한 것입니다. 판단은 반쯤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심판의 저울 위에 그들 자신도 함께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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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14절과 15절의 노래를 우리는 함부로 비웃을 수 없습니다.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사 24:14).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을 보십시오. 성전이 아닙니다. 시온이 아닙니다. 국경 바깥, 흩어진 자들이 남의 땅에서 겨우 붙어사는 자리입니다. 흩어짐은 본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15절을 명령형으로 읽습니다. 동쪽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여라, 바다의 섬들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라. 찬양은 감정이 차오를 때 저절로 새어 나오는 것이기 이전에, 어두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이 대목만 놓고 보면 이 노래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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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사 24:16). 저는 이 '그러나'라는 한 마디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온 세상이 영광을 돌리자고 외치는데 한 사람이 그 노래에 등을 돌리고 자기에게 화를 선언합니다. 쇠잔하였다는 말은 앞 단락에서 땅이 마르고 시들었다고 할 때 쓰인 바로 그 말입니다. 땅이 마르듯 그도 말라 갑니다. 그는 심판의 바깥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의 무게를 자기 몸으로 받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다 아침이라고 외칠 때 아직 밤이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의 외로움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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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란 격렬하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언자의 감정은 개인의 기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참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심한 관찰자가 아니라 상처받으시는 분이기에, 그분의 마음에 접속된 사람은 필연적으로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전율은 그 시각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느끼고 계셨는지를 보여 주는 창문입니다.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이 그 심판을 조금도 즐거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한 사람의 떨림을 통해 새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따로 놓고 저울질하지만, 예언자의 몸에서는 그 둘이 한 덩어리로 뒤엉켜 신음이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 언어에 가장 부족한 것이 어쩌면 이 신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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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17절부터 20절까지는 예언자가 본 것을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 도망하면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면 올무에 걸리는 막다른 길, 열리는 하늘의 문과 진동하는 땅의 기초. 그리고 마침내 이런 문장에 이릅니다.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사 24:20). 우주의 파국을 묘사하면서 예언자가 꺼내 든 비유는 뜻밖에도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와, 밤을 지내려고 얼기설기 지어 놓은 원두막입니다. 별과 지진을 말하다가 갑자기 밭 한가운데 서 있는 낡은 원두막으로 내려오는 이 낙차가 저는 참 좋습니다. 거대한 재앙도 결국은 우리가 아는 삶의 언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마지막에 붙습니다. 그 위의 죄악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무너뜨린 것은 밖에서 온 적이 아니라 땅이 스스로 짊어진 무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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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났다면 오늘 본문은 견딜 수 없는 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이 새로 시작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신다고 합니다.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가 나란히 호명되어 깊은 옥에 모입니다. 그리고 23절이 이 모든 것의 결론을 놓습니다.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 24:23). 달이 낯을 붉히고 해가 창백해지는 이유가 재앙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큰 빛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며 시간과 운명을 맡겼던 해와 달이, 참된 왕 앞에서 제 자리를 찾아 물러섭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왕 되심이 새로 보좌에 올라가시는 사건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변함없는 왕이셨고, 다만 희미하게만 인식되던 그 왕권이 마지막 날에 누구나 볼 수 있게 완전히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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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노래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노래의 주어를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흩어진 자들의 노래가 부족했던 것은 소리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 노래가 결국 우리 편의 승리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도달하는 곳은 어느 민족의 승리가 아니라 한 분의 즉위였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언어에도 이 혼동이 깊습니다. 미워하던 세력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고, 우리 편이 잘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꾸 14절의 무리 편에 서고, 16절의 그 한 사람 곁에는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라고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무너지는 땅 위에 우리도 함께 서 있음을 알고, 먼저 우는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심판을 피한 자리가 아니라 심판을 통과하신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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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기다림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해가 부끄러워지는 아침이 반드시 온다고 믿는 사람만이 오늘의 어둠을 정직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성적표가, 인사 발령이, 진단서가, 잔고가 우리 삶의 마지막 판결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침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오늘의 작은 불빛 하나를 아침이라고 우기게 됩니다. 새벽 전에 우는 새가 아름다운 것은 그 새가 밤을 부인해서가 아니라, 밤 한가운데서 울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의 저녁 식탁에서, 우리 소그룹의 나눔 자리에서, 서둘러 결론 내리고 싶은 마음을 하루만 미루어 보면 어떨까요. 그 하루의 침묵이 누군가에게는 함께 울어 주는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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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새벽은 여전히 깁니다. 그러나 저는 저 먼저 우는 새를 이제 조금 다르게 듣습니다. 저 새는 아침을 앞당기려고 우는 것이 아니라, 아침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밤 속에서도 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노래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어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빛의 이름을 부르는 노래, 남의 무너짐 위에 얹는 승전가가 아니라 함께 무너진 자리에서 올려 드리는 찬양 말입니다. 그 노래가 익어 갈 때, 우리는 해와 달이 부끄러워하는 그 아침을 두려움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밝지 않은 새벽을 견디시는 여러분 모두가, 시온 산에서 왕이 되시는 그분의 얼굴빛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걸어가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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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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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s0yF-plhh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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