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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3:1-18 칠십 년 뒤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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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내 인생의 배가 끝내 어느 항구로 돌아가려 하는지를 정직하게 묻고, 언젠가 허물어질 부두에서 눈을 들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한 분의 품에 닻을 내리며, 그분이 다시 찾아오시는 날 내가 실어 온 모든 짐이 누군가의 밥과 옷이 되기를 소망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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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이 코앞입니다. 낮의 열기는 여전히 맹렬하지만, 해가 기울면 바다 쪽에서 슬며시 바람이 밀려옵니다. 광양 앞바다의 밤은 이맘때가 가장 환합니다. 컨테이너 부두의 크레인들이 불을 밝히고, 거대한 배들이 소리 없이 들어와 짐을 부리고 또 떠납니다. 저 불빛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밥과 잠과 꿈이 오가는지를 생각하면, 항구라는 곳은 참 뭉클한 자리입니다. 이 늦여름을 건너고 계신 분들, 오래 항해하고도 아직 정박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서걱거리는 분들, 애써 실어 온 짐을 부릴 곳을 찾지 못해 서성이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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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폭풍이 아니라고. 폭풍은 어떻게든 견디면 지나갑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그 폭풍을 다 견디고 돌아왔는데, 돌아갈 항구가 사라져 있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사 23:1). 지중해 서쪽 끝까지 다녀온 원양 상선들이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간 기항지인 깃딤, 곧 오늘의 키프로스 섬에서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습니다. 우리 항구가 사라졌다. 배는 무사한데 집이 없습니다. 짐은 가득한데 부릴 곳이 없습니다. 평생을 벌어 돌아왔더니 정작 쉴 자리가 없어진 인생의 허망함이, 이 짧은 한 구절 안에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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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는 고대 지중해의 심장이었습니다. 앞바다의 섬에 쌓아 올린 성벽은 함락 불가능의 대명사였고, 백향목과 자주색 염료와 유리를 팔아 온 세상의 부를 끌어모았습니다. 성경은 그 도시를 "면류관을 씌우던 자"(사 23:8)라고 부릅니다. 자본이 왕관을 만들던 도시였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신탁이 놓인 자리입니다. 이사야 13장부터 이어져 온 열방을 향한 긴 선고의 행렬은 칼로 세운 제국 바벨론에서 시작해 돈으로 세운 제국 두로에서 끝납니다. 무력과 자본, 인간이 스스로를 높이는 두 방식이 신탁의 두 기둥으로 세워진 셈입니다. 두로의 무너짐은 한 항구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 전체가 심판대에 서는 신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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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도시를 향해 하나님이 내리신 첫 명령은 뜻밖입니다.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사 23:2). 두로의 정체성은 소리였습니다. 흥정하는 소리, 짐을 부리는 소리, 셈을 맞추는 소리. 그 소리가 곧 그 도시의 생명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십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침묵이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로 초대되는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으로 강제되는 침묵입니다. 스스로 잠잠해지기를 끝내 배우지 못한 자는 언젠가 잠잠해지도록 만들어집니다. 이어 예언자는 이 도시의 실체를 한 문장으로 벗겨 냅니다. 나일강 유역에서 거둔 곡식이 그대로 두로의 소득이 되었고, 그렇게 두로는 열국의 시장이 되었습니다(사 23:3). 두로는 씨를 뿌린 적도 밭을 갈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만 중간에 서서 옮겼을 뿐인데, 그 차익이 땀 흘린 산지의 소출보다 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가 입을 엽니다.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다"(사 23:4). 고대 시돈의 주화에는 '시돈 사람들의 어머니, 두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머니라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자기 입으로, 나는 아무도 낳은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없는 것이 없는 도시였지만 생명을 낳은 적은 없었습니다. 유통했을 뿐 잉태하지 않았고, 옮겼을 뿐 길러 내지 않았습니다. 이 불임의 고백을 기억해 두십시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이 문장이 조용히 뒤집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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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앞에 두고 예언자가 던지는 질문이 앞부분의 정점입니다.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사 23:8). 대답은 곧바로 주어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정하셨으니,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23:9). 여기 '존귀한 자'의 히브리어 뿌리는 '무겁다'이고, '멸시를 받게 한다'의 뿌리는 '가볍다'입니다. 한 절 안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이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참된 무게는 오직 하나님께 있는데, 두로는 그 무게를 상품의 가격표에 옮겨 붙였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알렉산더 대왕에게 붙잡힌 해적의 대답을 전합니다. 왜 바다를 어지럽히느냐는 황제의 추궁에 해적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온 세상을 어지럽히면서 황제라 불리고, 나는 작은 배 한 척으로 그리하니 도적이라 불릴 뿐이라고. 그리고 그는 정의가 제거된다면 왕국이란 거대한 강도떼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두로의 죄는 무역이 아니었습니다. 무역이 신이 된 것,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의가 장부의 숫자 아래 묻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규모가 커지면 약탈도 문명이라 불립니다. 예언자는 그 이름표를 떼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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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장면은 압도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사 23:11). 바다는 인간의 통제가 끝나는 자리였습니다. 두로는 바로 그 바다를 자기 성벽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다 위에 손을 펴십니다. 사람이 마지막 보루로 삼는 그 자리가, 실은 하나님의 손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자리였습니다. 시돈을 향해서는 더 아픈 말씀이 이어집니다.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사 23:12). 위기가 닥치면 사람은 더 멀리 도망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채 옮겨 간 자리에는, 같은 불안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안은 장소를 바꾸어 얻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바꾸어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의 곡소리가 다시 울리며 시가 닫힙니다. "너희의 견고한 성읍이 파괴되었느니라"(사 23:14). 사람이 쌓은 요새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같은 이사야가 조금 뒤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가난한 자의 요새라고 부릅니다. 이 시는 결국 요새를 바꾸라고 우리에게 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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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났다면 이 장은 그저 서늘한 장송곡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은 계속됩니다.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사 23:15). 칠십 년은 한 왕조의 수명이고 한 사람의 일생입니다. 그러니까 두로에게 내려진 마지막 형벌은 파괴가 아니라 망각이었습니다. 무역 도시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래처가 이름을 지우면 그 도시는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두려운 것은 실패가 아니라,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비유는 더 쓸쓸합니다. 손님이 끊긴 늙은 기생이 수금을 들고 거리로 나가 옛 곡조를 부르며 다시 기억되기를 구하는 모습으로 두로가 그려집니다. 학자들은 이 두 줄이 당시 실제로 불리던 유행가의 한 대목이었으리라고 봅니다. 예언자는 저잣거리의 노랫말을 그대로 가져와 무너진 도시의 이름표로 붙여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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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로 그 쓸쓸한 자리에 한 문장이 놓입니다.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사 23:17). '돌보다'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성경에서 두 방향으로 쓰입니다. 벌하러 찾아오시는 것도 이 말이고, 은혜로 찾아와 살피시는 것도 이 말입니다. 아이를 주시려고 사라를 돌보신 일도, 애굽에서 신음하던 백성을 돌보신 일도 같은 단어였습니다. 무너뜨리신 그 손이 칠십 년 뒤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 전체의 주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정하신 이도 여호와요, 바다 위에 손을 펴신 이도 여호와요, 잊혀진 항구를 다시 찾아오신 이도 여호와이십니다. 심판과 회복은 서로 다른 두 성품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한 마음이 시간 위에 그려 놓은 하나의 곡선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칠십 년이 '찬다'고 말합니다. 잊혀진 세월에도 눈금이 있고, 그 눈금을 세고 계신 분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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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절이 이 곡선의 정점입니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것과 잘 입을 것이 되리라"(사 23:18).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이라 여겨지던 것, 곧 장부와 이문과 환어음이 성소의 언어로 불립니다. 그리고 곧바로 두 가지가 금지됩니다. 간직하지 말 것, 쌓아 두지 말 것. 이 금지가 두로의 죄를 거꾸로 비춰 줍니다. 두로의 죄는 버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었습니다. 창고가 목적이 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표지는 더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쌓지 않는 것입니다. 이익은 창고에서 식탁으로, 금고에서 옷장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아무것도 낳지 못했다고 통곡하던 그 불임의 항구가 마침내 누군가의 배부름과 따뜻함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겨냥한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파괴가 아니라 방향의 전환입니다. 훗날 사도행전은 짧지만 눈부신 한 장면을 남깁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바울이 두로에 들러 그곳 제자들과 함께 성 밖 해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행 21:5). 배가 짐을 부리던 그 모래밭이 기도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칠십 년 뒤의 항구는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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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의 항구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리도 각자의 부두를 하나씩 두고 살아갑니다. 평생 일해서 마련한 집, 은퇴 후를 지켜 줄 통장, 나를 알아주는 자리와 관계망. 그 항구가 있기에 우리는 먼 바다로 나갈 용기를 냅니다. 그것을 마련하는 성실함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다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부두를 점검하는 만큼, 그 바다 위에 손을 펴시는 분을 바라보고 있는가. 한 사회학자는 슈퍼마켓이 우리 시대의 사원이 되었고 쇼핑몰을 거니는 일이 우리의 순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뼈아픈 이유는, 교회 안에서도 같은 저울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의 액수로 사람이 달리 보이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발언권이 배분된다면, 우리는 이미 두로의 회계 장부를 예배당에 들여놓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무게는 하나님이 실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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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잠잠해지는 연습입니다. 강제된 침묵이 오기 전에, 스스로 소리를 끄고 앉는 시간을 하루에 한 번씩 마련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도망치지 않는 연습입니다. 갈등이 있는 관계에서, 응답이 더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꾸 깃딤으로 건너가려 합니다. 그러나 평안은 건너간 곳에 있지 않고 돌이킨 자리에 있습니다. 셋째는 쌓아 두지 않는 연습입니다. 이번 주에 받은 급여를 앞에 두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 돈은 창고로 가는가, 식탁으로 가는가. 광양은 항구의 도시이고 제철과 물류의 도시입니다. 우리의 노동이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그 결실의 방향이 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칠십 년의 침묵을 지나고 계신 분들께 이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 같은 시간, 한때 활발히 쓰임 받다가 지금은 잊혀진 것 같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그 세월의 눈금을 세고 계십니다. 그분이 다시 찾아오실 때 잃어버린 것을 그대로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회복은 원상 복구가 아니라 성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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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이 더위도 물러가고, 밤바람이 서늘해지면 항구의 불빛은 더 또렷해질 것입니다. 그 불빛 아래 부려지는 짐들이 누군가의 눈물을 딛고 선 것이 아니기를, 우리가 실어 나르는 모든 것이 마침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에 쓰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쌓은 부두는 언젠가 낡아 허물어지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그분의 품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의 항해가 아무리 길어도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항구에 닻을 내리고, 흔들리는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품고, 오늘도 이 땅을 뚜벅뚜벅 걷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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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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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SVg9LB8T1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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