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사야 21:1-17 파수꾼의 밤

*

온전한 신앙이란 이 밤이 언제 끝나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밤 한복판에서 내가 어느 쪽을 향해 서 있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

입추를 코앞에 둔 팔월의 밤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해가 진 지 한참인데도 아스팔트는 낮 동안 삼킨 열기를 밤새 되뱉고, 창을 열어도 들어오는 것은 미지근한 공기뿐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새벽 두 시쯤 마당에 나서면,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밤새 우는 풀벌레 소리, 멀리 지나가는 화물차 소리, 설핏 깨어 한 번 울고 마는 매미 소리. 낮에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밤에는 들립니다. 열대야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열기 때문에 눈을 뜨고 계신 분들, 이 시간이 언제 지나가나 세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 본문에는 밤을 지새우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벽에서 가장 높은 자리, 망대 위에 홀로 선 파수꾼입니다. 그는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활을 들지도 않고 성문을 지키지도 않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오직 보는 것, 그리고 본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사 21:8). 이 한 문장에 그의 인생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낮에도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남들이 잠든 시간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 남들이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먼저 보고 마는 사람. 성경은 예언자를 그렇게 그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그 자리로 부릅니다.

.

이사야 13장부터 23장까지는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의 운명을 다루는 말씀들이 모여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들이 그 나라에 가서 선포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듣도록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에 대한 경고는 바벨론더러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기대어 살길을 찾으려던 유다더러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아하스는 앗수르를 붙들었고 아들 히스기야는 애굽과 바벨론을 기웃거렸습니다. 의지한 대상만 달랐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첫 표제인 '해변 광야'는 그 자체로 아이러니입니다. 광야는 메마르고 바다는 마르지 않는데, 두 말이 한자리에 놓였습니다. 유프라테스의 물을 끼고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 곧 바벨론을 가리키는 우회적인 이름입니다. 물과 광야를 함께 가진 듯 보이던 그 제국조차 실은 광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

말씀은 회오리바람으로 시작합니다.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오리바람 같이 몰려왔도다"(사 21:1).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회오리바람이 먼저 나옵니다. 네게브 사막의 회오리바람은 예고 없이, 굉음을 앞세우고, 모든 것을 삼키며 지나갑니다. 제국의 끝이 그렇게 온다는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로도 군대의 숫자로도 계산되지 않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 안의 풍경은 태평합니다. 사람들은 식탁을 차려 놓고 먹고 마십니다. 그 잔치 한복판으로 다급한 외침이 끼어듭니다. 고관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르라고. 마른 가죽 방패에 기름을 먹여 전투를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잔칫상에서 벌떡 일어나 그제야 손질하는 방패는 이미 늦은 방패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위기가 없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알면서도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서 무너집니다.

.

더 마음을 붙드는 것은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몸입니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하였으므로 내가 괴로워서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사 21:3). 심판을 선포하는 사람이 심판받는 자의 고통을 자기 허리로 앓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확성기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죽음조차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을 때, 그 마음이 예언자의 몸을 통과하며 통증이 되었습니다. 훗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셨던 분, 그리고 그 심판을 끝내 자기 살로 받아 내신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이 뒤틀린 허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무너지는 사람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예언자의 자리가 아니라 구경꾼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

밤이 깊어 갑니다. 파수꾼은 그 자리를 뜨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본 것을 외칩니다.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사 21:9). 무너진 것은 성벽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제국이 밤낮으로 섬기던 신상들이 함께 부서져 땅에 뒹굽니다. 자기 도시조차 지키지 못하는 신이, 그 도시 밖에서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무엇으로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파수꾼은 이 무서운 소식을 고소한 승전보처럼 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이렇게 부릅니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타작 마당의 소들이 곡식 위를 돌며 짓이기면 껍질이 뭉개지고 알곡이 드러납니다. 그의 백성은 제국이라는 타작기 아래 오래 짓이겨져 왔습니다. 파수꾼의 보고는 그 뭉개진 이들을 향한 통지였습니다. 당신을 짓밟던 그 힘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당신의 운명을 정하는 분은 제국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

그리고 본문의 한가운데, 두 절짜리 짧은 신탁이 놓입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파수꾼을 부릅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사 21:11). 두 번 묻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두 번 물었을까요. 이 밤이 얼마나 남았느냐, 이 지배가 언제 끝나느냐, 우리는 언제쯤 숨을 쉴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파수꾼의 대답은 그러나 우리의 기대를 비껴갑니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사 21:12). 아침은 옵니다. 그러나 그 아침 뒤에 또 밤이 옵니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라 정직입니다. 파수꾼은 거짓 위로를 팔지 않습니다. 상황이 나아지는 것과 구원받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고는 마지막에 방향 하나를 건넵니다.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밤의 길이를 묻는 사람에게 시간표 대신 나침반을 쥐여 준 것입니다. 문제는 밤이 얼마나 기냐가 아니라, 그 밤에 내가 어느 쪽을 보고 서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온전히 순수한 주의는 그 자체로 기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주의란 무언가를 잡아채려는 눈이 아니라,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어둠 앞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머무는 힘입니다. 파수꾼의 밤이 꼭 그렇습니다. 그는 밤을 없애지 못하고 앞당기지도 못합니다. 다만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러합니다. 응답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에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 머무름 자체가 이미 기도입니다.

.

마지막 신탁은 사막으로 이어집니다. 향료와 금이 오가던 대상로가 이제 도망자의 길이 되었습니다. 오아시스에 묵던 상인들이 덤불에 몸을 숨기고 밤을 지새웁니다. 그때 데마 사람들에게 명령이 떨어집니다.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사 21:14). 저는 이 대목에서 늘 멈춰 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그 심판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같은 호흡으로 명하십니다. 손가락질하라 하지 않으시고 물그릇을 들고 나가라 하십니다. 사막에서 물 한 모금과 떡 한 덩이는 곧 목숨입니다. 무너지는 세상 앞에서 신앙인이 취할 자세는 논평이 아니라 준비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들이 곧 우리 문 앞에 이를 것이니 물을 길어 두라는 것입니다. 훗날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신 것도 바로 이 물 한 그릇, 이 떡 한 덩이였습니다.

.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아침만 있는 신앙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믿으면 다 잘 된다고, 기도하면 이 밤은 끝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파수꾼은 밤도 온다고 말합니다. 이 정직함을 잃어버린 신앙은 첫 번째 어둠 앞에서 힘없이 무너집니다. 요즘 우리 교회들이 겪는 어려움의 뿌리에도 이런 조급함이 있습니다. 숫자가 줄면 방법을 바꾸고, 방법을 바꿔도 안 되면 더 큰 방법을 찾습니다. 망대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없으니 본 것도 없고, 본 것이 없으니 할 말도 남의 말을 빌려 옵니다. 파수꾼의 첫째 자질은 발언이 아니라 응시입니다. 매일 아침 말씀 한 단락 앞에 앉는 그 조용한 시간이, 실은 우리 각자를 자기 삶의 망대 위에 세우는 시간입니다.

.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밤을 없애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밤에도 자리를 지키게 해 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아이 때문에 밤을 새우는 부모에게, 가게 문을 닫고 돌아온 이웃에게, 병상 곁을 지키는 가족에게 우리가 건넬 말은 값싼 낙관이 아닙니다. 아침은 옵니다. 그러나 그 아침 하나로 인생이 끝나지 않으니, 다시는 저물지 않는 빛을 함께 바라보자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보다 먼저 물 한 잔을 내밀어야 합니다. 광양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일을 찾아 들어오고 일을 잃고 떠나는 이들이 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 길목의 오아시스가 되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아이에게 읽어 주는 그림책 한 권, 병실에 함께 앉아 있어 주는 한 시간이 사막의 물 한 그릇입니다.

.

열대야의 밤이 지나면 곧 입추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어느 새벽엔가 창밖에서 서늘한 기운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서늘함이 온다고 해서 우리 인생의 모든 밤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는 이 세상에서, 다시는 저물지 않는 단 하나의 아침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밤의 길이를 세는 대신 그분께로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돌아선 사람에게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았어도 이미 마음에 빛이 떠오릅니다.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각자의 망대를 지키며 서로에게 물그릇을 건네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NVrmhqscCh8 



  1. No Image new
    by 평화의길벗
    2026/08/13 by 평화의길벗
    Views 2 

    이사야 26:1-27:1 밤에 맺히는 이슬

  2. No Image 12Aug
    by 평화의길벗
    2026/08/12 by 평화의길벗
    Views 1 

    이사야 25:1-12 가리시는 손, 걷으시는 손

  3. No Image 11Aug
    by 평화의길벗
    2026/08/11 by 평화의길벗
    Views 1 

    이사야 24:14-23 해가 부끄러워지는 아침

  4. No Image 10Aug
    by 평화의길벗
    2026/08/10 by 평화의길벗
    Views 9 

    이사야 24:1-13 가지 끝에 남은 것

  5. No Image 09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9 by 평화의길벗
    Views 5 

    이사야 23:1-18 칠십 년 뒤의 항구

  6. No Image 08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8 by 평화의길벗
    Views 5 

    이사야 22:1-25 못에 걸린 것들

  7. No Image 07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7 by 평화의길벗
    Views 5 

    이사야 21:1-17 파수꾼의 밤

  8. No Image 06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6 by 평화의길벗
    Views 11 

    이사야 19:16-20:6 벗은 발로 낸 길

  9. No Image 05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5 by 평화의길벗
    Views 10 

    이사야 18:1-19:15 소리 없는 볕

  10. No Image 04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4 by 평화의길벗
    Views 12 

    이사야 17:1-14 반석을 치운 자리에

  11. No Image 03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3 by 평화의길벗
    Views 20 

    이사야 16:1-14 대낮의 그늘

  12. No Image 02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2 by 평화의길벗
    Views 21 

    이사야 14:24-15:9 대적을 위해 우는 밤

  13. No Image 01Aug
    by 평화의길벗
    2026/08/01 by 평화의길벗
    Views 25 

    이사야 14:1-23 품과 구덩이

  14. No Image 31Jul
    by 평화의길벗
    2026/07/31 by 평화의길벗
    Views 19 

    이사야 13:1-22 불 꺼진 궁전

  15. No Image 30Jul
    by 평화의길벗
    2026/07/30 by 평화의길벗
    Views 32 

    이사야 12:1-6 기쁨의 두레박

  16. No Image 29Jul
    by 평화의길벗
    2026/07/29 by 평화의길벗
    Views 45 

    이사야 11:1-16 한 싹의 혁명

  17. No Image 28Jul
    by 평화의길벗
    2026/07/28 by 평화의길벗
    Views 32 

    이사야 10:20-34 낮은 그루터기의 봄

  18. No Image 27Jul
    by 평화의길벗
    2026/07/27 by 평화의길벗
    Views 17 

    이사야 10:5-19 도끼는 자랑할 수 없다

  19. No Image 25Jul
    by 평화의길벗
    2026/07/25 by 평화의길벗
    Views 42 

    이사야 9:8-10:4 무너진 자리의 은총

  20. No Image 25Jul
    by 평화의길벗
    2026/07/25 by 평화의길벗
    Views 38 

    이사야 9:1-7 가장 깊은 밤의 빛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