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6:1-14 대낮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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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뙤약볕에 서 있는 이웃을 향하여 내 몸을 옮겨 그늘 한 조각을 만들어 주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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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입니다. 며칠 뒤면 입추라는데 볕은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습니다. 아침 일곱 시에 벌써 아스팔트가 달아오르고, 매미는 온 힘을 다해 여름을 밀어붙입니다. 마당가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붉게 피겠다는 제 이름값을 하느라 뜨거운 하늘을 향해 꽃을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걷는지 눈에 들어옵니다. 다들 그늘을 밟으며 걷습니다. 전봇대 그림자만큼 좁은 그늘이라도 그 선을 따라 몸을 옮겨 갑니다. 가로수 아래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어르신, 신호를 기다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리는 아이, 그늘 한 뼘을 찾아 자리를 옮기는 노점의 상인. 우리는 모두 그늘을 찾아 걷는 사람들입니다. 이 여름을 통과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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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뜻밖의 문장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무너져 내리는 한 나라를 향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부탁입니다.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사 16:3). 여기 '대낮'이라 번역된 히브리 말은 '갑절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입니다. 하루 중 볕이 가장 사납게 쏟아지는 그 시간에, 밤처럼 짙은 그늘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늘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볕 아래 자기 몸을 세워야 비로소 그 뒤편에 생겨나는 것이 그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한 나라에게 그런 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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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탁을 받은 나라가 모압이었다는 사실이 이 말씀을 더욱 놀랍게 합니다. 모압은 롯의 후예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소돔 들녘의 물 댄 동산을 택했던 그 사람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압은 남이 아니라 서먹해진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는 오랜 세월 유다를 향해 등을 돌렸고, 이사야 15장은 그 모압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는 광경을 통곡 소리로 가득 채웁니다. 그 폐허 위에서 16장이 시작됩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던 그 입술이 곧바로 살 길을 일러 주십니다. 셀라의 바위 요새에 숨지 말고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어린 양을 보내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길로 환대를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신탁 한복판에 도망자를 숨기라는 명령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지는 자에게조차 마지막으로 좋은 일 하나를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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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명령이 얼마나 뭉클한지 알게 됩니다. 숨겨 주어야 할 그 도망자들을 하나님은 "나의 쫓겨난 자들"(사 16:4)이라고 부르십니다. 죄를 지어 징계를 받고 제 땅에서 밀려나 이방을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셈법으로는 실패한 자들이고, 종교의 셈법으로는 벌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나의'라는 소유격으로 부르십니다. 밀려났다고 해서 소속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사람들을 잠시 모압에게 맡기십니다. 원수의 손에 자기 자녀를 맡기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여기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셨을 것입니다. 남의 아픔을 품어 본 손만이 자기 아픔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압이 살 길은 조공의 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쫓겨난 자를 숨기는 그 손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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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은 그 환대의 요청이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밝힙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사 16:5). 궁전이 아니라 장막입니다. 히브리 말로 가장 초라한 거처를 가리키는 낱말이 쓰였습니다. 이 왕위를 떠받치는 것은 창검이 아니라 인자와 충실, 곧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 쓰셨던 그 두 낱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는 먼 훗날 베들레헴의 시골 마구간을 미리 보게 됩니다.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한 아기로 오셔서,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시다가,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까지 내려가신 그분 말입니다. 우리가 찾던 그늘은 결국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볕 아래 서서 온몸으로 그늘을 만드셨기에 우리가 그 뒤에서 숨을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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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압은 그 그늘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담담하게 그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사 16:6). '들었나니'라는 말이 아픕니다. 모압의 교만은 예언자의 예민한 눈에만 보인 것이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릴 만큼 시끄러웠습니다. 정작 본인만 듣지 못하는 소리, 그것이 교만입니다. 모압의 자랑은 포도였습니다.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는 그 가지가 북쪽 야셀에 미치고 동쪽 광야에 이르렀으며 그 싹이 자라 사해를 건널 만큼 뻗어 나갔습니다. 국경 밖까지 이름을 떨친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랑이 된 것은 반드시 마릅니다. 히브리 원문은 그 포도나무가 '말랐다'고 하지 않고 '말려졌다'는 수동형을 씁니다. 스스로 시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시들어진 것입니다. 열국의 주권자들이 좋은 가지를 꺾었다고 하지만, 그 손 뒤에는 다른 손이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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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심판의 문법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목에서 예언자는 갑자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사 16:9). 포도밭에 내려야 할 가을비 대신 예언자의 눈물이 그 땅을 적십니다. 조금 뒤에는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라고 고백합니다. 창자가 뒤틀렸다 풀리며 나는 소리를 수금 소리에 빗댄 것입니다. 몸 전체가 하나의 울림통이 되어 원수의 나라를 위해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 절에서 심판의 주체는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하고 자신을 밝히십니다.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신 그분이 곧바로 그 침묵 앞에서 우십니다. 심판하시는 입과 우시는 마음이 하나인 분,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훗날 예루살렘 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눈물을 흘리시던 그분의 얼굴이 여기서 이미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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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는 『하나님을 기다리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행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고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아니, 그것은 기적이다." 그는 참된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주의'라고 보았습니다. 남의 불행 앞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바라보는 힘,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언자가 바로 그 기적을 살아 냈습니다. 그는 모압의 죄를 흐리지 않았습니다. 교만을 교만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무너짐 앞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끝내 눈물로 그 땅을 적셨습니다. 죄를 엄중히 여기면서도 아픔 앞에서 둔감해지지 않는 것, 이 둘을 동시에 붙드는 자리가 신앙의 자리입니다. 판단만 남은 신앙은 메마르고, 눈물만 남은 신앙은 무릅니다. 예언자는 그 사이에 서서 온몸을 수금으로 내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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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그늘이 사라진 대낮 같습니다. 청년들은 자신을 증명하라는 볕 아래 타들어 가고, 중년은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자리에서 하루를 버티며, 노년은 통계 수치 뒤에서 조용히 늙어 갑니다. 타지에서 온 노동자와 그 가족, 가정 밖으로 밀려난 청소년, 병원비 앞에서 치료를 미루는 이웃이 우리 곁을 지나갑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이 알려 줍니다. 우리는 볕을 없앨 수 없습니다. 세상의 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옮겨 그늘 한 조각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밥 한 끼일 수도 있고, 끝까지 들어 주는 한 시간일 수도 있고, 판단을 삼키는 침묵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방도를 베풀며'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늘은 감상이 아니라 궁리와 설계를 요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가 지금 볕에 서 있는지 살피고, 어떻게 가려 줄지 머리를 맞대는 것까지가 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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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를 견디고 돌아온 배우자와 자녀에게 우리 집이 그늘인지 또 하나의 평가석인지 물어야 합니다. 밖에서 종일 볕을 맞고 온 사람에게 집까지 볕이면 그는 어디서 숨을 쉬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지금 어느 그늘에 서 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숨 쉬는 이 자리는 우리가 만든 그늘이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볕에 서 주었기에 생긴 자리입니다. 부모가 그러했고, 먼저 믿은 이들이 그러했으며, 무엇보다 골고다의 한낮에 우리 대신 서 계셨던 분이 그러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자리를 옮겨 다른 이의 그늘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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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지나갈 것입니다. 곧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바람의 결이 바뀌고 저녁이 길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늘이 필요한 사람은 계절과 상관없이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 뙤약볕 아래 서 있는 한 사람을 향해 몸을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이동이 대낮에 밤 같은 그늘을 만듭니다. 인자함으로 굳게 선 그 왕위 아래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 주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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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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