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3:01-22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검열하시는 군대와 제국의 화려한 궁전 위에 임하는 여호와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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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입니다(1절). 이사야서는 여기서부터 시선을 유다 바깥으로 돌려 열방의 운명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먼 나라에서 용사들을 부르시며, 만군의 여호와로서 친히 군대를 검열하십니다(2-5절). 예언자는 이 소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 "애곡할지어다"라고 외칩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고, 그 날에 사람들의 손에서는 맥이 풀리고 마음은 녹아내려 해산이 임박한 여자처럼 몸부림칠 것입니다(6-8절). 이어서 그 날이 우주적 대격변으로 그려집니다. 별과 해와 달이 빛을 잃고 하늘이 진동하며 땅이 제 자리를 떠나고,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가 벌을 받으며 교만한 자의 오만이 끊어집니다(9-16절). 마지막으로 이 종말론적 심판이 역사의 무대 위에 구체적인 이름을 얻습니다. 여호와께서 은과 금에 마음이 없는 메대 사람을 충동하시고,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이던 바벨론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뒤엎여 들짐승과 승냥이의 거처가 됩니다(17-22절). 화려하던 궁전에 들개가 우는 이 그림 위에 예언자는 한 줄을 덧붙입니다.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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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13장은 이사야서의 큰 흐름에서 새로운 단원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1-12장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13-23장은 압도적으로 주변 민족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이 단원의 신탁들은 히브리어 '마사'(경고, 신탁)라는 표제어로 시작하는 아홉 개의 단락으로 구분되며(13:1; 15:1; 17:1; 19:1; 21:1; 21:11; 21:13; 22:1; 23:1), 유독 13장 1절에서만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본'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습니다. 열방을 향한 첫 번째 신탁의 문패가 유난히 크고 또렷하게 걸린 셈입니다.
# 주목할 것은 이 단원이 놓인 위치입니다. 예레미야서(46-51장)와 에스겔서(25-32장)에서는 열방 신탁이 이스라엘에 대한 신탁 다음에 배치되는 데 반해, 이사야서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 선언 '가운데' 끼워 넣어졌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배치가 연대기적이라기보다 신학적이라고 봅니다. 앞의 6-12장은 아하스 왕 시대의 말씀이고 뒤의 28-32장은 히스기야 왕 시대의 말씀인데, 그 사이에 열방 신탁이 놓임으로써 두 왕의 선택이 나란히 심문대에 오릅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 기대어 시리아-에브라임의 위기를 넘기려 했고, 히스기야는 애굽에 기대어 앗수르에 맞서려 했습니다. 의지한 대상만 달랐을 뿐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은 것은 똑같았습니다. 열방의 흥망을 결정하시는 분이 여호와시라면, 그분께 등을 돌리고 그분께 종속된 권력에게 생존을 구걸하는 일은 어리석음이자 불신앙일 뿐입니다.
#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13장의 문학적 구조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표제어인 1절을 제외하고 이 장을 네 개의 연으로 나눕니다. 2-5절(군대의 소집), 6-8절(애곡의 권면), 9-16절(여호와의 날 선포), 17-22절(메대를 통한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각 연은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로 이어져 있습니다. 앞의 세 연은 우주적 대격변을 묵시문학적 색채로 생동감 있게 그리며, 심판의 방법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그 날의 확실성과 파멸적 성격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등장인물과 배경이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심판의 대상과 집행자가 역사적 실체로 호명됩니다. 종말이 역사 속으로 내려앉고, 역사가 종말의 서곡이 되는 것입니다.
# '여호와의 날'이라는 표현의 정경적 무게도 기억해야 합니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을 구원의 날로 이해하던 통속적 신앙에 맞서 그 날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암 5:18-20). 그 날은 때로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는 날로(겔 30:3 이하; 사 13:6 이하), 때로는 이 세상의 모든 행악자를 심판하는 날로(습 1:14 이하) 선포됩니다. 곧 여호와의 날은 특정 민족의 국경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 피조 세계에 관철되는 날이며, 하나님 앞에 예외로 남을 권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역사적으로 이 신탁이 겨냥하는 바벨론은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바벨론 제국입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주전 8세기의 패권국은 앗수르였으므로, 바벨론이 첫 자리에 놓인 것은 그 자체로 신학적 진술입니다. 바벨론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래로 하나님을 향해 스스로를 높이는 인간 문명의 총화를 상징하는 이름이었고, 요한계시록 18장에 이르러 다시 '큰 성 바벨론'으로 등장합니다. 이 이름은 특정 도시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모든 제국적 질서를 가리키는 신학적 부호로 굳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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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열방을 향해 걸린 첫 번째 문패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울타리 안에만 계시지 않고 열방의 역사 전체를 당신의 관할 아래 두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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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사 13:1). 한 절뿐인 짧은 표제입니다. 그러나 이 한 줄이 이사야서의 시선을 예루살렘 성벽 너머로 돌려놓습니다. 지금까지 이사야는 유다의 죄와 이스라엘의 배역을 다루어 왔습니다. 이제 그는 유다가 한 번도 정복해 본 적 없는 먼 제국의 이름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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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사'는 문자적으로 '(신탁을 선포할 때 목소리를) 높임'을 뜻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단어가 이사야서에서 13-27장에만 아홉 번 등장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성격을 잃고 예언자적 선포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굳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표제가 '바벨론에 대하여'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다윗 이후로 주변 나라를 정복해 본 적 없는 작은 나라의 예언자가 세계 제국의 운명을 선포합니다. 교리적으로 따지자면 공허하게 들릴 법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열방 신탁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우주적 주권이었다고 김필회 교수는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멈춘다면, 그분은 여러 민족신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방의 흥망성쇠를 그분이 결정하신다면, 눈에 보이는 세속 권력은 절대자의 통제 아래 있는 일시적 권력일 뿐입니다.
이 확신은 신약에서 더욱 또렷해집니다. 빌라도가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으스댔을 때, 주님은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요 19:11). 제국의 권세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시고 그들을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골 2:15). 이사야 13장 1절의 문패는 결국 갈보리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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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신앙의 좌표로 삼기 쉽습니다. 어느 나라가 부상하고 어느 진영이 승리하는가에 따라 마음이 출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헤드라인 위에 한 줄의 표제를 걸어 둡니다.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세상을 읽는 방식은 여기서 갈라집니다. 우리는 세계 정세를 무시하지 않되, 그 위에 계신 분을 먼저 봅니다.
구체적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의 기도 제목에 우리 가족과 우리 교회를 넘어선 이름이 몇 개나 올라 있습니까. 국제비전선교회를 통해 우리가 파송한 이름들, 전쟁 중인 땅의 아이들, 이 도시의 이주노동자들. 열방을 향해 문패를 거는 신앙은 세계를 향해 기도 목록을 넓히는 데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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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절 소집 나팔을 부시고 친히 군대를 검열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 뒤에 물러나 계신 방관자가 아니라, 친히 총사령관으로 나서서 당신의 뜻을 집행하시는 살아 계신 통치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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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사 13:2). 이어서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여움을 전하게 하였느니라"(사 13:3)고 하십니다. 4-5절에서는 화자가 예언자로 바뀝니다. 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나고,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 떠들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십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하늘 끝에서 온 여호와의 진노의 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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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에서 청자 '너희'의 신분도, 소집되는 용사들의 정체도 일부러 모호하게 남겨졌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말하면서도 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심판의 대상도 막연히 '온 땅'이라고만 합니다. 본문의 관심이 오직 심판의 선포 자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호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3절 서두의 독립인칭대명사 '나'(아니)입니다. 군대를 부르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소집된 자들에게는 세 개의 칭호가 주어집니다.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은 이들이 하나님이 친히 지휘하시는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의 용사들'은 이들이 전쟁을 위해 훈련된 자들임을,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자들'은 이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는 자들임을 보여준다고 김필회 교수는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에서는 여호와께서 승리를 결정하시므로 승리의 환호도 그분께만 돌아갑니다.
'기치'(깃발)는 멀리서도 보이도록 나무 없는 벌거숭이산 위에 세웁니다. 이사야는 이미 11장에서 같은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때 민족들을 향해 세워진 기치는 이새의 뿌리, 곧 메시아였습니다(사 11:10). 같은 깃발이 여기서는 심판의 소집 신호로 나부낍니다. 하나님의 깃발 아래 모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름받아 나아가는 길과, 소집당해 끌려가는 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사 13:4)라는 표현은 특히 무겁습니다. '검열'은 병력을 점고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배후에서 흐릿하게 작용하시는 어떤 힘이 아니라, 명부를 들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확인하시는 총사령관이십니다. 열국의 다국적군은 자기들이 제 야심을 따라 진군한다고 믿었겠지만, 실은 하나님의 사열대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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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우리가 붙들 위로와 두려움은 함께 옵니다. 위로는 이것입니다. 역사는 우연의 난장이 아닙니다.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국제 정세, 요동치는 환율과 물가, 우리 지역의 산업 구조 변동까지도 하나님의 사열대 앞을 지납니다. 광양 지역의 제철과 항만 경기가 흔들릴 때, 그로 인해 일자리가 위태로워질 때, 우리는 그 모든 흔들림 위에 계신 분을 봅니다.
두려움은 이것입니다. 우리도 사열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향해서도 명부를 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면서 실상은 제 위엄을 기뻐하는 무리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세운 기치가 그리스도의 깃발인지 아니면 우리 교회의 간판인지, 이번 주에 한 번쯤 정직하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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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절 애곡하라,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성령 하나님은 다가오는 심판 앞에서 우리 마음을 무디게 두지 않으시고, 애곡할 줄 아는 감각을 되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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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가 외칩니다.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사 13:6). 그 날에 "모든 손의 힘이 풀리고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사 13:7) 하며, 사람들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이 불꽃 같으리로다"(사 13:8)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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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곡하다'는 민족의 탄식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행위가 이미 닥친 재앙 앞에서 터져 나오는 개인적 아픔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움직여 다가오는 심판을 막아보려는 마지막 순간의 부르짖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애곡은 절망의 소리가 아니라 회개의 문 앞에 선 소리입니다.
6절에는 히브리어 언어유희가 숨어 있습니다. '멸망'을 뜻하는 '쇼드'와 '전능자'를 뜻하는 '샤다이'가 소리로 맞물립니다. 전능자로부터 멸망이 온다는 것, 곧 우리가 안전의 근거로 삼던 그 능력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손의 힘이 풀리고 마음이 녹아내린다'는 표현은 용기를 잃고 낙담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는 더욱 절실합니다. 출산 중에 목숨을 잃는 일이 드물지 않던 고대 세계에서, 해산하는 여자는 아이를 낳기까지 죽음의 문턱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이미지를 심판에만 쓰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고 하셨고, 바울은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다고 했습니다(롬 8:22). 해산의 진통은 끝이 아니라 새 시대의 문턱입니다. 심판의 날에 임한 산고가 14장 1절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로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이 단락의 청자 '너희'는 2절의 '너희'와 다른 집단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을 심판의 위협에 노출된 자들에게 주는 일반적 권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곧 이 애곡의 초청은 바벨론 사람들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합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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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애곡의 감각일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와 성장과 축복의 언어에는 익숙하지만, 무릎 꿇고 탄식하는 언어에는 낯설어졌습니다. 교인 수가 줄어드는 것은 걱정하면서, 교회가 세상에서 신뢰를 잃은 것에는 애곡하지 않습니다. 부동산과 입시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면서, 이 사회의 무너진 자리에는 눈물이 마릅니다.
애곡은 무력한 감상이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가 짚은 대로 그것은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마지막 몸부림, 곧 가장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입니다. 이번 주 우리 소그룹 모임에서 한 사람씩 '내가 정말로 애곡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나누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내 자녀의 성적이 아니라 내 자녀가 자라날 세상을 두고, 내 사업의 매출이 아니라 내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존엄을 두고 애곡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 안에 예언자의 심장이 다시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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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6절 별빛이 꺼지는 날, 순금보다 귀해지는 사람
하나님은 창조 질서 전체를 흔드실 만큼 죄를 미워하시면서도, 그 심판의 한복판에서 사람의 존귀함을 끝내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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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사 13:9). 그 날에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사 13:10). 하나님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사 13:11),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사 13:12) 하십니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제 자리를 떠나며(13절), 사람들은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처럼 흩어지고(14절), 창과 칼과 약탈이 뒤따릅니다(15-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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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여호와의 날을 우주적, 종말론적 관점에서 그립니다. 별과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는 표현은 아모스, 예레미야, 스바냐, 에스겔, 요엘이 공유하는 심판 언어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어둠이 신현(神顯) 현상에 속하는 모티브로서 하나님의 감춰진 현존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이 어둠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분이 심판하러 오실 때 창조의 질서가 혼돈으로 되돌아갑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 입술이, 이제 빛을 거두십니다.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하신 말씀이 겹쳐 들립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마 24:29). 그리고 실제로 그 어둠이 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골고다입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마 27:45). 이사야 13장이 예고한 여호와의 날의 어둠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통과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11절은 심판의 이유를 명시합니다. '교만한 자의 오만'과 '강포한 자의 거만'입니다. 두 단어가 나란히 놓인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은 단지 종교적 불경만이 아니라,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짓밟는 폭력의 구조입니다. 예언자의 눈에 오만과 강포는 한 몸입니다.
12절은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사람이 순금보다 드물게 된다는 것이 소수가 살아남아 미래를 연다는 긍정적 표현이 아니라, 절대 다수가 목숨을 잃는 심판의 철저성을 함축한다고 봅니다. 인구가 격감하는 참상의 비유라는 것입니다. 이 냉정한 읽기를 존중해야 합니다. 다만 그 비유가 하필 '순금'과 '오빌의 금'을 저울에 올렸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됩니다. 바벨론은 금을 쌓아 영광을 삼던 제국이었습니다. 그 제국의 저울 위에서 마침내 값이 매겨지는 것은 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심판의 참상을 그리는 비유 안에, 사람 하나가 순금보다 무겁다는 하나님 나라의 셈법이 역설적으로 스며 있습니다.
14-16절의 참혹한 묘사 앞에서 많은 이들이 걸려 넘어집니다. 어린아이가 메어침을 당하고 여인이 욕을 당한다는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폭력의 목록이 아니라, 고대 근동 전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옮긴 고발문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그림이 '함락당한 성의 주민들이 당했던 처참한 운명'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봅니다. 성경은 전쟁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제국이 다른 민족에게 저질렀던 바로 그 일이 제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스스로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합니다(마 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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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꺼지는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어둠을 떠올립니다. 기후 위기로 계절의 질서가 무너지고,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사람을 삼킵니다. 인공지능이 노동의 구조를 뒤흔들고, 누군가는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습니다. 이 흔들림 앞에서 신앙인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 극단 사이 어딘가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공포에 사로잡혀 세상을 저주하는 것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소비하며 사는 것도 성경의 길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길은 '순금보다 귀한 사람'을 지키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이 오만과 강포라면, 우리가 설 자리는 그 반대편입니다. 우리 일터에서 가장 약한 자리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 우리 교회에서 가장 발언권이 없는 이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 애양병원의 병상에 누운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아 드리는 일. 별빛이 꺼져도 사람을 순금처럼 대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등불이 켜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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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2절 은과 금에 마음 없는 자들, 그리고 불 꺼진 궁전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무너지는 제국의 폐허 한복판에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여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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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름이 불립니다. "보라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메대 사람을 내가 충동하여 그들을 치게 하리니"(사 13:17). 메대 사람은 활로 청년을 쏘고 태의 열매를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18절).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사 13:19), 그곳에는 거주할 자가 없고 아라비아 사람도 장막을 치지 않으며 목자들도 양 떼를 쉬게 하지 않습니다(20절). 오직 들짐승과 타조와 들양이 그곳을 차지하고(21절), "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사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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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세 연에서 종말론적으로 그려진 여호와의 날이 여기서 역사적 배경을 얻습니다. 심판의 도구는 메대 사람이고 심판의 대상은 바벨론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느부갓네살이 '여호와의 종'으로(렘 25:9), 고레스가 '여호와의 목자'와 '기름 부음 받은 자'로(사 44:28; 45:1) 택함 받아 하나님의 역사 의지를 집행했던 것처럼, 메대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부름받았다고 설명합니다.
17절의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메대 사람이 물욕이 없는 고결한 민족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금은보화로 그들의 침략을 멈출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뇌물이나 조공으로 군대를 되돌려 보내는 일이 흔했습니다. 바벨론은 늘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돈으로 막을 수 없는 심판, 값을 치를 수 없는 정산의 날이 옵니다. 평생 모든 문제를 돈으로 처리해 온 제국에게 이보다 더 절망적인 소식은 없습니다.
19절의 소돔과 고모라 비유는 완전하고 영원한 파멸의 상징입니다. 특히 소돔과의 비교는 바벨론의 죄악이 하나님의 인내를 훨씬 넘어섰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김필회 교수는 지적합니다. 그리고 20-22절은 그 멸망의 철저함을 한 단계씩 높여 갑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천막을 치고 지나가는 유목민에게조차 쓸모없는 땅이 되고, 목자가 양 떼를 잠시 쉬게 할 만한 풀도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냥이와 들개가 궁전을 차지합니다.
이 마지막 그림이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화려하던 궁전, 음악과 잔치가 끊이지 않던 방들, 열국의 보화가 쌓이던 창고. 그 자리에 밤마다 들개가 웁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쌓아 올린 모든 높은 것의 끝을 이보다 정확하게 그린 문장이 있을까요. 다니엘서는 이 예언이 성취되는 밤을 기록합니다. 벨사살 왕이 성전 그릇으로 잔치를 벌이던 그날 밤 벽에 글자가 나타났고,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단 5:30)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신탁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2절 마지막의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는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포로 된 백성에게는 해방의 시계가 가까워졌다는 소식입니다. 실제로 바로 이어지는 14장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김필회 교수는 '긍휼히 여기다'(라함)가 자궁을 뜻하는 명사 '레헴'에서 파생되었으며, 자녀에게 아무 대가 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표현한다고 설명합니다. 제국의 궁전에 들개가 울 때, 하나님의 자궁 같은 사랑이 흩어진 백성을 다시 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그림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계 18:2). 그리고 그 폐허 위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흔들리는 것들이 진동하여 없어지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남게 하려 함입니다(히 12:27). 그리스도의 나라가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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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지금도 여러 형태의 바벨론을 세우고 있습니다. 성공과 서열과 축적이 사람의 값을 매기는 질서,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구조. 교회조차 그 문법을 빌려 와 크기와 숫자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3장은 조용히 묻습니다. 그 화려한 궁전에 언젠가 들개가 울지 않겠느냐고.
광양사랑의교회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너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린 한 사람, 프로그램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소그룹, 실적이 아니라 조용히 이웃의 밥상을 챙기는 손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 중에 '언젠가 들개가 울 자리'가 있다면 조금씩 손을 놓기로 합시다. 그리고 은과 금으로 막을 수 없는 그 날 앞에서, 값없이 주신 은혜 하나만을 붙들고 서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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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열방을 향해 문패를 거시는 주님 앞에
저희의 좁은 시야를 내려놓습니다.
뉴스의 헤드라인 위에 계신 주님을 보게 하시고
세계를 향해 저희 기도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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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히 군대를 검열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저희의 흔들리는 일터와 이 도시의 앞날이
주님의 사열대 앞을 지나감을 믿습니다.
저희가 세운 기치가 그리스도의 깃발인지
아니면 저희 이름의 간판인지 살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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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곡의 감각을 주시는 성령이여,
무디어진 저희 마음을 깨뜨려 주옵소서.
저희 자녀의 성적이 아니라 저희 자녀가 자랄 세상을 두고
저희 사업의 이익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일하는 이의 존엄을 두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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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을 거두시는 창조주여,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임재를 보게 하시고
사람을 순금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그 셈법을
저희 가정과 일터와 교회의 셈법이 되게 하옵소서.
가장 약한 자리에 있는 이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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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국의 폐허 위에 나라를 여시는 주여,
언젠가 들개가 울 자리를 붙들고 있는 저희 손을 펴 주옵소서.
흔들리는 것들이 진동하여 없어질 때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상속받은 자로 서게 하시고
광양사랑의교회가 그 나라의 작은 등불로 이 땅에 켜져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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