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09:01-23 십자가의 사랑으로 빚어낸 참된 자유 : 형제를 위해 권리를 포기하는 사도의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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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권리(자유)'를 주장하며 연약한 지체들을 실족하게 한 고린도 교회의 '강한 자'들을 교정하기 위해, 사도인 자신을 생생한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재정적 지원과 결혼 등의 정당한 권리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진전과 영혼 구원을 위해 그 모든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음을 밝힙니다. 나아가 그는 완전한 자유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그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는 십자가의 삶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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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및 문화적 배경 : 1세기 고린도와 같은 로마-헬라 사회에서는 자신의 신분과 '권리(엑수시아)'를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미덕이자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강한 자'들은 이러한 세속적인 권리 주장의 문화를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적 지식과 자유를 앞세워 우상의 신전에서 제물을 먹는 권리를 무자비하게 행사했습니다. 이로 인해 양심이 약한 지체들이 큰 상처를 입고 실족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 신학 및 사상적 배경 : 고린도전서 9장은 바울이 갑자기 문맥을 이탈하여 자신의 사도직과 사례비 문제를 변호하려는 '자기 방어적 삽입구'가 결코 아닙니다. 9장은 8장(우상 제물 문제의 원리)과 10장(우상 숭배의 경고) 사이에 위치하여, 8장 13절에서 천명한 "형제를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사랑의 원리를 바울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실례를 통해 논증하는 탁월한 수사학적 구조를 가집니다. 바울은 자신이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도의 권리(재정적 후원 등)를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식으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던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무너뜨리고 십자가의 자기 비움(Kenosis)을 교회의 진정한 행동 원리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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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사도권의 정당성과 복음의 열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으로서 자격 없는 자를 사도로 부르시며, 우리의 수고를 통해 변화된 영혼들을 복음의 생생한 인(印)과 열매로 맺게 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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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자유인이요 사도이며, 부활하신 예수 우리 주를 직접 보았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로 주 안에서 행한 자신의 사역의 결과(일)임을 선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고린도 교인들에게만큼은 그들이 주 안에서 바울의 사도 됨을 보증하는 인(印)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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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4개의 연속적인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자신이 완전한 자유인이자 참된 사도임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 질문들의 목적은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어지는 본문에서 포기하게 될 권리가 얼마나 정당하고 확실한 것인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수사학적 장치입니다. 바울이 사도인 명백한 증거는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장이나 화려한 스펙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다는 객관적 사실과 더불어, 바로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그의 사도권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열매요 도장(인)이었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던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존재 기원이 바울의 사역에 빚지고 있음을 망각한 영적 배은망덕에 빠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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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교회 안에는 사역자의 외형적인 스펙, 학위, 혹은 교회의 크기를 가지고 영적 권위를 평가하려는 세속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권위와 사역의 정당성은 한 영혼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제자로 서게 되는 '생명의 열매'를 통해 증명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는 다른 지체들을 어떤 잣대로 평가하고 있습니까? 내게 신앙의 본을 보여주고 나를 영적으로 낳아준 신앙의 선배와 목회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처럼 쉽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도 나의 삶의 궤적이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살아있는 '도장'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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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1절 복음 사역자의 합당한 권리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의 원리를 통해 당신의 일꾼들을 세밀하게 돌보시며, 영적인 것을 심는 자들이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시는 은혜와 공급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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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먹고 마실 권리, 게바(베드로)나 주의 형제들처럼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 그리고 일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만 전념할 권리가 있음을 밝힙니다. 그는 군인, 포도원 농부, 목자의 비유와 더불어 "곡식 밟아 떨 때에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여, 영적인 것을 뿌린 자가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이 당연함을 논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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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던 '권리(엑수시아)'가 자신에게도 온전히 있음을 일상의 비유와 구약 성경을 통해 치밀하게 논증합니다. 군인, 농부, 목자가 수고의 대가를 얻는 것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나아가 신명기 25:4의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율법을 인용하며, 이 말씀이 단순한 짐승에 대한 규례를 넘어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요 섭리임을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11절)는 선언은, 복음 사역자가 교회로부터 재정적 부양을 받는 것이 결코 구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영적 질서이자 마땅한 권리임을 명백히 천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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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일각에서는 사역자의 헌신과 청빈을 미덕으로만 강조하다가, 정작 사역자의 기본적인 생계와 권리를 외면하는 폭력을 범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말씀 전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물질적, 정서적으로 넉넉히 후원하는 것을 마땅한 책무이자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동시에 사역자들은 이 본문을 자신들의 권리 주장의 무기로 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평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영적, 육적으로 수고한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급의 최종적인 원천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얻은 소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는 청지기적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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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 복음의 진전을 위한 권리 포기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명하셨으나, 그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버리신 희생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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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다른 이들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자신일까 보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도리어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이 제단의 것을 나누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명하셨음을 재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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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바울 논증의 극적인 전환점(turning point)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100% 보장된 합법적인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12절) 범사에 참았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권리를 포기한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을 두고 사도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조롱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초신자가 많았던 고린도 교인들이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복음을 거부할까 염려하여 그 모든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마저 복음 전하는 자의 부양을 명령하셨으나(14절), 바울은 주님의 명령보다 '복음의 유익'이라는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기꺼이 유보했습니다. 이는 8장에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8:13)고 했던 권리 포기의 구체적인 실천이자, 십자가 사랑의 숭고한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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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소송과 분쟁으로 치닫는 '권리 과잉'의 모습이 일부에 있는 사회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도 이런 세속의 가치관이 스며들어, 교단 내의 이권 다툼이나 직분자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교회를 갈라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나의 권리를 철저히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이 정당한 권리가 혹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장애물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직장에서 합법적인 나의 권리나 휴식을 찾을 때라도, 그것이 연약한 동료나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문을 닫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면, 바울처럼 범사에 참고 그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십자가의 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참된 승리는 내 권리의 성취에 있지 않고, 나의 희생을 통한 복음의 진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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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절 값없이 전하는 복음, 진정한 자랑
성령님은 우리가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인 기쁨으로 복음에 헌신하게 하시며, 복음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내려놓는 그 자기 비움을 가장 영광스러운 상급이자 자랑으로 삼게 하시는 은혜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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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이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도 권리를 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신의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할 일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으며,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자의로(자발적으로) 행하면 상을 얻겠거니와, 그의 진정한 상은 복음을 값없이 전하고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는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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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권리를 포기한 것이 얼마나 치열하고 자발적인 결단인지를 강렬하게 토로합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는 극한의 표현은 바울의 복음을 향한 순수성을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복음 전파 자체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권적으로 부여받은 사명이요, 피할 수 없는 '부득불 할 일(아낭케)'이었습니다,. 만약 억지로 한다면 그는 그저 직분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대하는 진정한 '상(미스도스)'은 세상의 재정이나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값없이 전하고,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복음을 선물로 주는 행위 속에서 바울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을 맛보았습니다. 이는 당시 지식을 돈으로 팔던 고린도의 소피스트(철학 교사)들이나 물질적 탐욕으로 교회를 이용하던 거짓 사도들의 행태를 통렬하게 고발하는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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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길 때, 은연중에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의 인정과 칭찬, 심지어 영적인 보상이라는 '대가'를 기대합니다. 나의 헌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섭섭함이 밀려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값없는 은혜가 아닌 '거래'의 신앙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와 직분자들은 나의 섬김이 '부득불 억지로' 하는 종의 멍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로, 혹은 숨은 봉사자로 헌신할 때, 사람들의 박수나 어떠한 특권도 요구하지 않는 그 '이름 없는 헌신'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급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한 자랑은 내가 얼마나 헌신했느냐가 아니라, 철저히 무익한 종으로서 값없이 은혜를 흘려보내는 자기 비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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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절 영혼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자유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율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주셨으나, 그 영광스러운 자유를 이웃을 구원하기 위한 자발적인 '종노릇'으로 승화시키시는 참된 자유와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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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그러나 자신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음),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며, 이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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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바울 윤리의 거룩한 결론이자 최고봉입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강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남을 지배하고 상처 주는 권리로 낭비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그 완전한 자유를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둘로스)'가 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8장에서 문제의 핵심이었던 양심이 '약한 자들'의 처지까지 내려가 그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철저히 맞추었습니다. 이 '선교적 동일화(Adaptability)'는 복음의 진리를 양보하는 혼합주의가 아니라, 자아의 껍질을 깨고 상대방의 연약함을 품어내는 십자가 성육신의 실천입니다. 바울이 이토록 자신을 굽히고 여러 모양이 된 유일한 목적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이 복음의 영광스러운 축복에 진정으로 참예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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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와 교회는 세대, 지역,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 인해 극심한 양극화와 혐오의 벽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와 성향이 다르거나 신앙의 수준이 다른 지체들을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정죄하거나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내가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자가 아니라,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 내 자존심과 문화적 기호를 버리고 기꺼이 그의 종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만나는 불신자들에게, 혹은 교회 안의 새가족이나 연약한 성도들에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고집스러운 신앙 스타일만을 강요하기보다, 그들의 아픔과 문화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 함께 공감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합니다. 내 이기적인 자유를 포기하고 기꺼이 이웃의 종이 될 때, 우리 공동체는 세상을 치유하고 영혼을 살려내는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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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구원의 은혜와 참된 자유의 원천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사도 바울의 피 끓는 고백을 통해,
십자가의 은혜로 얻은 자유를 마치 나의 교만과 이기심을 채우는 특권인 양 남용하며,
내 곁의 연약한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였던 저희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마음대로 먹을 권리를 자랑하던 고린도 교회의 완악함이,
권리 포기가 사라지고 앙상한 권리 주장만 남은
오늘날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 그리고 바로 내 심령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사도의 합법적인 권리마저도
복음의 진전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두려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스스로 포기했던 바울의 그 거룩한 야성과 자기 비움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인이면서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던 그 성육신의 사랑이
우리의 신앙 인격 속에 체화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나의 얄팍한 지식과 권리 주장을 내려놓고,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인 기쁨으로 값없이 주님과 교회를 섬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기주의와 분열로 병든 이 세상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여러 연약한 자들의 이웃이 되어
마침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의 영광에 참예하는
복된 믿음의 여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하늘 권리를 포기하시고 생명까지 내어주신,
참된 자유와 사랑의 본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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