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8:1-30 도장과 베일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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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위선과 수치가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보는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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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5월의 아침입니다. 자식을 위해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묵묵히 걸어오신 분들, 그리고 완전하지 못한 부모 세대의 상처마저 연민으로 껴안으며 오늘의 순례길을 걷고 계신 모든 분께 창조주 하나님의 넉넉한 위로가 깃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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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8장은 불편합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직후, 성경의 서사는 느닷없이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낯설고 냄새나는 이야기로 시선을 잡아끕니다. 유다는 두 아들이 죽자 행여 막내마저 잃을까 두려워, 마땅히 보호해야 할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자식 없는 과부로 쫓겨난 그녀는 경제적, 사회적 생존권이 박탈당한 가장 연약한 타자였습니다. 가부장의 이기적 두려움이 약자의 삶을 무참히 짓밟은 것입니다.

벼랑 끝의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고 딤나 길목에 앉습니다. 욕정에 눈이 먼 유다는 그녀가 며느리인 줄 모른 채 동침하고, 담보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어줍니다. 석 달 후 다말의 임신 소식을 들은 유다는 서슴없이 명령합니다. "끌어내어 불사르라." 은밀한 곳에서는 정욕을 채우면서 권력의 자리에서는 약자에게 정죄의 불을 지피는, 이 소름 끼치는 위선의 민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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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말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았을 때, 유다는 벼락을 맞은 듯 자신의 죄악과 대면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복의 고백을 터뜨립니다. "그가 나보다 옳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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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는 타자를 위한 존재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 했습니다. 엘륄은 효율과 지배의 논리로 굴러가는 기술 사회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손쉽게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가를 날카롭게 고발했습니다. 유다는 바로 그 논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약자를 내치는 것이 효율적이었으며, 정죄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 모든 계산이 도장 하나 앞에서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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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묵상은 바로 이 무너짐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묵상이란 내게 유리한 답을 골라내는 지식 습득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이 내 몸을 아프게 통과하는 체험이며, 소진된 내 감정을 정리하고 새로이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끌어내어 불사르라" 외쳤던 유다의 목소리가 실은 내가 이웃과 가족을 향해 숱하게 쏟아낸 정죄의 칼날이었음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나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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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 수치스러운 족보를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유다와 다말의 부끄러운 역사 한복판에서 태어난 베레스의 후손으로부터 다윗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내셨습니다. 썩어가는 낙엽과 사체들이 가장 비옥한 흙이 되듯, 우리의 위선과 흠결도 주님의 손 안에서 생명의 토양으로 거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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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도장을 내려놓으십시오. 남보다 의롭다는 교만도, 내 인생은 망가졌다는 두려움도 모두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말씀이 내 몸을 통과하도록 가만히 허락하십시오. 그 고요하고 아픈 자리에서 주님이 속삭이실 것입니다. 그가 나보다 옳도다, 라고. 우리의 구원은 언제나 그 고백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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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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