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17-35 드라빔을 깔고 앉은 여인, 그 자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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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세속의 권력과 우상을 내려놓고, 흠집투성이 우리의 도피 여정을 끝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우보천리의 걸음으로 뿌리내리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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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이 낙타 안장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 안장 아래에는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이 숨겨져 있습니다. 분노한 라반이 장막을 이 잡듯 뒤지며 다가옵니다. 라헬은 일어서지 않습니다. 앉은 채로 말합니다.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나이다."(창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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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납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고대 세계에서 여성의 생리는 제의적으로 가장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라반이 자신의 권력과 생존을 지켜줄 것이라 굳게 믿으며 섬기던 그 신이, 지금 가장 부정하다고 취급받는 여성의 몸 아래 깔려 있는 것입니다. 권력의 상징이 이보다 더 철저하게 조롱당하는 장면을 저는 성경에서 달리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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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빔이 무엇입니까. 단순한 미신적 우상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드라빔은 가문의 재산 상속권과 가부장적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습니다. 딸들을 외국인처럼 팔아버린 아버지, 평생 두 딸의 몸과 삶을 거래의 도구로 삼아온 아버지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바로 그 권력의 상징을, 라헬은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말 한마디 못 하고 팔려가던 여인이, 아버지의 권력을 문자 그대로 깔고 앉은 것입니다. 그것이 라헬이 선택한 방식의 항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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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이야기가 도덕적으로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라헬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야곱은 아내의 행동을 모른 채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창 31:32)라는 경솔한 저주를 내뱉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내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불안이 사람을 얼마나 경솔하게 만드는지, 두려움이 얼마나 쉽게 말을 망가뜨리는지를 야곱은 보여줍니다. 이 가족은 도주하는 내내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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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쫓기는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말들, 두려움 속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이 얼마나 자주 우리 곁의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생존의 압박이 우리를 정직하게 만들기보다 더 교묘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라반의 장막에서 탈출하는 이 가족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와 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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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은 이 비루한 가족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라반이 그들을 따라잡기 전날 밤, 그의 꿈에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창 31:24) 억압자의 입을 막으신 것입니다. 야곱의 경솔한 맹세도, 라헬의 속임수도,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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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말을 망가뜨리고, 서로를 위태롭게 하면서도, 하나님은 그 남루한 가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억압자를 향해 "거기까지"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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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에 뿌리내리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은 묵상을 가리켜 "우보천리(牛步千里)"의 걷기라고 했습니다. 소의 걸음처럼 느리고 둔해 보이지만, 하루하루 말씀을 내 영혼에 새기며 걷는 그 걸음이 천 리를 간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한 걸음, 내일 한 걸음, 그렇게 약속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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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걸음이 중요한 것은, 라반 같은 존재가 언제나 우리를 뒤쫓아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려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 안심할 수 있다는 불안을 끊임없이 심어줍니다. 그 불안에 쫓기는 사람은 결국 라반처럼 되거나, 드라빔을 훔치는 라헬처럼 됩니다. 어느 쪽이든, 자유롭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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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이란 그 쫓김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라반이 아무리 뒤쫓아 와도, 하나님이 그의 입을 막아주신다는 약속 안으로 피신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드라빔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세상의 권력 상징을 깔고 앉은 라헬처럼, 우리를 옭아매던 것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조금씩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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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무언가를 꼭 쥐고 계십니까. 이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것, 이것을 잃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드라빔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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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은 자유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빔을 훔쳐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드라빔이 필요 없어지는 데서 옵니다. 그것을 깔고 앉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자리, 그 자리가 묵상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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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라헬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얍복강에서의 씨름도, 요셉의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우보천리. 소의 걸음으로 천 리를 가십니다. 우리의 변화도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루하루 걷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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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손에 쥔 드라빔이 무엇인지 조용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 없이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약속을 한 걸음씩 믿어가시기 바랍니다. 느려도 괜찮습니다. 소의 걸음도 천 리를 갑니다. 쫓기는 자의 곁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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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풀 한 포기를 생각합니다. 폭약도 없고 장비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 조금씩, 위를 향해 자랍니다. 아스팔트는 단단하지만 그 풀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보천리. 소걸음이 천 리를 가듯, 그 풀은 결국 아스팔트를 가릅니다. 묵상이 그 풀의 생장과 같습니다. 요란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매일 말씀 앞에 잠시 머무는 그 조용한 수고가 쌓여, 우리를 옭아매던 것들을 마침내 들어올리는 힘이 됩니다. 그 힘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두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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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