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0:01-24 질투와 거래로 얼룩진 장막, 그 파탄의 틈새로 빚어내시는 생명의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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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레아의 연이은 출산을 지켜보던 라헬은 극심한 질투에 사로잡혀 야곱에게 자식을 내놓으라며 절규하고, 야곱은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며 분노합니다(1-2절). 라헬은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단과 납달리를 얻고, 레아 역시 여종 실바를 주어 갓과 아셀을 얻으며 자매 간의 출산 경쟁은 대리전으로 번집니다(3-13절).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두다임, דּוּדָאִים)', 를 구해오자 라헬은 그것을 얻는 대가로 야곱과의 동침 권리를 레아에게 넘기는 어처구니없는 거래를 합니다. 그러나 합환채를 얻은 라헬은 여전히 임신하지 못하고, 오히려 레아가 잇사갈, 스불론, 디나를 출산합니다(14-21절). 마침내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시고(자카르, זָכַר)', 그녀의 태를 여시어, 라헬은 부끄러움을 씻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요셉을 낳습니다(2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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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 사회(누지 문서, 함무라비 법전 등)에서 본처가 불임일 경우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대를 잇게 하는 것은 합법적이고 보편적인 관습이었습니다. 또한 '합환채(Mandrakes, 히브리어 두다임)'는 고대인들 사이에서 최음제이자 수태를 돕는 마술적 효능이 있다고 믿어졌던 식물입니다.
# 신학적·문학적 배경 : 이스라엘의 영적 기둥이 되는 '열두 지파'가 탄생하는 배경은 거룩하고 평화로운 예배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두 자매의 피 튀기는 질투, 여종들의 인격적 소외, 그리고 남편의 사랑과 미신적 식물을 맞바꾸는 치졸한 거래의 현장이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조건이나 도덕적 우월함이 아니라, 인간의 철저한 죄악과 흠결을 딛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동력임을 증언합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관점 : 본문은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수평적 관계를 파괴하는지를 고발합니다. 라헬과 레아는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기보다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무기'로 자식을 소비합니다. 여종 빌하와 실바는 철저히 인격이 배제된 채 '출산 기계'로 전락합니다(인간의 도구화). 남편 야곱조차 두 아내의 거래 대상(상품)으로 전락합니다. 이토록 철저히 자본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관계망 속에서, 결국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인간의 꼼수(합환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기억하심')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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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라헬의 절망과 야곱의 회피 : 신학적 정답이 폭력이 될 때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로서 우리 결핍의 궁극적 해결자가 되시며,고통받는 이웃을 향해 신학적 정답이 아닌 공감과 긍휼로 대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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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이 언니 레아가 출산하는 것을 보고 질투하여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절규합니다. 야곱은 성을 내며 '그대의 태를 닫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고 차갑게 응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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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수평적 부부 관계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보여줍니다. 라헬의 요구 '하바 리 바님(הָבָה לִּי בָנִים, 내게 자식을 다오)',은 야곱을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신(神)'의 위치로 올려놓는 우상숭배적 발언입니다. 그녀는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임을 알면서도, 질투와 결핍에 눈이 멀어 남편에게 맹목적으로 생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 역시 충격적입니다. '하타핫트 엘로힘 아노키(הֲתַחַת אֱלֹהִים אָנֹכִי,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신학적으로는 백 번 지당한 정답입니다. 그러나 수평적 읽기 관점에서 이는 남편으로서의 인격적 직무 유기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아내 리브가가 불임일 때 그녀를 위해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창 25:21). 그러나 야곱은 아내를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차가운 신학적 명제로 아내의 아픈 상처를 찌르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정답의 언어가 공감과 사랑을 상실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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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극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내 삶의 결핍을 하나님께 가져가 엎드리기보다, 라헬처럼 배우자나 타인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내라, 안 그러면 나는 죽겠다'며 닦달하고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고통 속에 절규하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야곱처럼 '다 하나님의 뜻이니 참으라', '네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라며 차가운 신학적 정답으로 상처를 후벼 판 적은 없습니까? 지식은 바를지언정 긍휼을 잃어버린 언어는 폭력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지체를 향해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그 아픔을 부둥켜안고 함께 눈물로 기도해 주는 따뜻한 영적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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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절 여종들을 앞세운 대리전과 인간의 도구화 : 진흙탕 속에 세워지는 열두 지파
하나님은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그 흠결을 우회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당신의 언약 백성을 세워가시는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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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은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단(דָּן, 억울함을 푸심)', '납달리(נַפְתָּלִי, 언니와 크게 겨루어 이김)', 를 낳게 합니다. 레아 역시 출산이 멈추자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갓(גָּד, 복됨/행운)', '아셀(אָשֵׁר, 기쁨/행복)', 을 낳게 하고 자신의 승리와 행복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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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창세기에서 가장 어둡고 세속적인 인간 군상을 폭로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야곱의 가문이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철저한 인간의 도구화와 수평적 폭력으로 가득합니다. 빌하와 실바라는 두 여종의 인격, 감정, 의사는 완전히 배제됩니다. 그들은 단지 두 여주인의 자존심 싸움과 대리 출산을 위한 '인큐베이터(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조차 신앙의 향기보다 '경쟁, 투쟁, 승리, 요행'이라는 세속적인 승부욕으로 가득합니다. 납달리의 이름에 담긴 라헬의 고백 '내가 언니와 크게 겨루어 이겼다(나프툴레 엘로힘 니프탈티 임 아호티, נַפְתּוּלֵי אֱלֹהִים נִפְתַּלְתִּי עִם אֲחֹתִי)', 에서 '엘로힘(하나님)'은 단지 최상급을 표현하는 강조어로 사용되었을 뿐, 이 경쟁에 하나님 신앙의 본질은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인간들은 각자의 이기심과 질투로 다른 인간을 짓밟고 수단화하는 죄악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은 이 일그러진 진흙탕 같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여종들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까지도 모두 이스라엘을 이루는 '열두 지파의 거룩한 족장들'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폭력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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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직장과 일터,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의 성공과 목적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빌하와 실바처럼 부하 직원이나 약자들의 인격을 무시한 채, 오직 나의 실적을 올리기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대리전의 죄악'입니다. 성과지상주의에 빠져 동료를 짓밟고 '내가 이겼다'며 쾌재를 부르는 것은 언약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각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이마고 데이(Imago Dei)'로 대우해야 합니다. 타인을 착취하여 얻은 승리감에 취하지 말고, 그 일그러진 우리를 참아주시고 구원 역사에 편입시켜 주신 십자가의 은혜 앞에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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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1절 합환채의 거래와 인간의 헛된 수고 : '사랑의 식물'이 생명을 주지 못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의지하는 세상의 모든 '합환채'를 헛되게 하시며,오직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의해서만 생명의 열매가 맺힘을 가르치시는 공의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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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거둘 때에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두다임, דּוּדָאִים)', 를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줍니다. 라헬이 그것을 원하자 레아는 '남편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아들의 합환채까지 빼앗으려 하느냐'며 따집니다. 결국 라헬은 합환채를 얻는 대신 야곱과 동침할 권리를 레아에게 넘깁니다. 그러나 합환채를 얻은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고, 오히려 합환채를 넘긴 레아가 잇사갈, 스불론, 디나를 연이어 출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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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환채(두다임, דּוּדָאִים)'는 어근 '다다(דָּדָה, 사랑하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문자적으로 '사랑의 식물'이란 뜻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맨드레이크(Mandrakes)라 불리는 이 식물은 최음제이자 수태를 돕는 마술적 효능이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불임으로 고통받던 라헬에게 이 합환채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매혹적인 '우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미신적인 식물을 얻기 위해 기꺼이 자기 남편과의 동침 권리를 언니에게 팔아버립니다. 남편을 임신을 위한 씨받이 기계, 거래의 '상품(商品)'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는 이 얄팍한 기회주의를 통렬하게 비웃습니다. '사랑의 식물(두다임)', 을 손에 쥔 라헬의 태는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오히려 합환채를 포기했던 레아는 계속해서 아이를 낳습니다. 생명은 이방의 미신이나 인간의 얄팍한 수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달려 있음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사랑의 식물'이 사랑을 가져오지 못하고, '사랑의 식물'이 생명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대체물의 허망함을 선언하는 창세기의 가장 예리한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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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손에 꽉 쥐고 있는 '합환채'는 무엇입니까? 우리 역시 삶의 위기나 막막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엎드리기보다 세상의 합환채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든든한 인맥, 명문대 졸업장, 용한 투자 정보 등 세상이 '이것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고 유혹하는 현대판 합환채를 얻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특권(동침)을 너무도 쉽게 세상과 맞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합환채는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손에 쥔 헛된 합환채를 내려놓고, 우리의 참된 생명과 반석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회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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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4절 라헬을 기억하신 하나님 : 모든 방법이 파산한 자리에서 열리는 생명의 문
하나님은 상처 입고 수치스러워하는 자의 고통을 잊지 않고'자카르(기억하심)'하시며, 당신의 완벽한 때에 생명의 문을 여시는 신실한 위로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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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마침내 라헬을 '기억하신지라(와이즈코르 엘로힘, וַיִּזְכֹּר אֱלֹהִים)',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라헬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라헬은 '하나님이 내 수치를 씻으셨다(아사프 엘로힘 에트 헤르파티, אָסַף אֱלֹהִים אֶת חֶרְפָּתִי)', 고 고백하며, 그 이름을 '요셉(יוֹסֵף, 여호와께서 다른 아들을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라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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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이 인간적인 모든 수단(여종 동원, 합환채 거래)을 다 써보고도 철저히 실패한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마침내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와이즈코르 엘로힘(וַיִּזְכֹּר אֱלֹהִים, 하나님이 기억하셨다)', 의 '자카르(זָכַר, 기억하다)', 는 하나님께서 깜빡 잊고 계시다가 갑자기 떠올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신학적 용어는 노아의 방주에 갇힌 노아를 '기억하사' 바람을 불게 하셨을 때(창 8:1), 언약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구원하셨을 때(창 19:29)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자카르'는 하나님의 때가 차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향해 능동적이고 주권적인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셨음을 알리는 거룩한 신학 용어입니다.
라헬의 고백 '아사프 엘로힘 에트 헤르파티(אָסַף אֱלֹהִים אֶת חֶרְפָּתִי, 하나님이 내 수치를 거두어 가셨다)', 에서 '아사프(אָסַף)', 는 '거두어 가다, 제거하다'는 뜻입니다. 라헬의 회복은 단순히 아들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그녀를 짓눌렀던 '헤르파(חֶרְפָּה, 수치, 조롱)', 즉 세상의 조롱과 자기 멸시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흉년에서 구원할 위대한 구원자 '요셉'은 이렇게 인간의 모든 방법이 파산 선고를 맞이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결과물로 태어났습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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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긴 불임의 터널(육체적, 경제적, 영적 결핍)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응답받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데, 나만 홀로 뒤처져 '헤르파(수치와 조롱)', 속에 갇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방법(합환채)마저 아무 소용이 없을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인간적인 꼼수를 포기하고 십자가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할 때, 비로소 '와이즈코르 엘로힘(하나님이 당신을 기억하십니다)', 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눈물을 다 보고 계시며,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당신의 '헤르파(수치)'를 '아사프(거두어 가시고)', 삶에 새로운 은혜(요셉: 더하심)를 베푸실 가장 완벽한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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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며, 우리의 모든 수치를 씻으사
은혜를 더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야곱의 장막에서 벌어지는 시기와 질투,
인간을 '두다임(합환채)'보다 못한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비참한 대리전의 모습을 통해, 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이웃을 수단으로 취급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축복으로 여겼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봅니다.
'하바 리 바님(내게 자식을 다오)'처럼 삶의 결핍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하타핫트 엘로힘 아노키(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처럼
차가운 신학으로 이웃의 고통을 찌르며 회피했던
우리의 마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는 라헬처럼 세상이 주는 '두다임(합환채)'이
삶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 착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특권을 세상의 헛된 성공과
너무나 쉽게 맞바꾸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얄팍한 기회주의와 미신적 신앙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오직 생명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실패와 엇갈린 욕망 속에서도
결코 구원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모든 수단이 끊어진 그 절망의 바닥에서 라헬을 '자카르(기억하사)',
생명의 문을 여셨던 것처럼, 오늘 긴 고난과 결핍의 터널을 지나는
성도들의 눈물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헤르파(수치)'를 '아사프(거두어 가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더하여(요셉)' 주실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닫힌 생명의 문을 여시고 영원한 참 소망이 되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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