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21-35 기만의 밤과 엇갈린 시선 : 상처 입은 자의 눈물로 빚어내시는 언약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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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라헬을 위해 약속한 7년의 노동을 마치고 라반에게 아내를 요구합니다. 라반은 잔치를 베풀고 밤의 어둠을 틈타 라헬 대신 첫째 딸 레아를 야곱의 침소에 들여보냅니다. 아침이 되어 자신이 속았음을 안 야곱이 항의하자, 라반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의 풍속이 아니다'라며 라헬을 얻기 원한다면 7년을 더 일하라고 요구합니다(21-30절).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여시어, 레아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네 아들을 연이어 출산합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던 마음을 넘어, 넷째 유다를 낳고서야 비로소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31-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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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의 결혼 풍습에서 신부는 짙은 베일(너울)로 얼굴을 가린 채 신랑의 텐트로 들어갔습니다. 또한 밤에는 조명이 없어 캄캄했기에 라반의 속임수가 가능했습니다. 라반이 내세운 '장자의 권리(언니가 먼저 시집가는 풍속)'는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가로챈 '장자권'의 문제와 날카롭게 맞닿아 있습니다.
# 신학적·문학적 배경 : 이 본문은 '속이는 자' 야곱이 철저하게 '속는 자'로 전락하는 인과응보적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눈먼 아버지를 어둠 속에서 속였던 야곱이, 이제 어둠 속에서 장인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한편, 이 본문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 시작은 거룩하고 평화로운 가정이 아니라, 속임수와 편애, 자매간의 치열한 질투와 상처로 얼룩진 역기능 가정이었습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관점 : 본문은 자신의 목적(라헬)만을 바라보며 직진하는 야곱, 두 딸을 경제적 이익의 도구로 삼는 라반의 폭력적인 수평적 관계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망들이 충돌하는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의 시선은 야곱이 외면한, 철저히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한 자 '레아'를 향하십니다. 인간의 수평적 편애가 낳은 비극 속에서, 수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여 구속사(유다 지파,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를 놓으시는 역설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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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5절 야곱이 맞이한 기만의 밤 : '힌네 레아!'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하는 인과응보
하나님은 우리가 타인에게 가한 기만과 상처를,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똑같이 직면하게 하심으로 우리 내면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는 공의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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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기한이 차자 야곱은 라반에게 아내를 달라고 당당히 요구합니다. 라반은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저녁이 되자 라헬 대신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갑니다. 야곱은 동침한 후 아침에 밝을 때에야 그녀가 레아임을 확인하고,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라며 항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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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저자는 이 기막힌 사기극을 매우 의도적인 문학적 대칭으로 그려냅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야곱은 눈먼 아버지 이삭을 '형 에서의 옷'과 '짐승의 가죽'으로 위장하여 속였습니다. 이제 야곱 자신이 캄캄한 '어둠(시각적 맹점)'과 신부의 '베일(위장)'에 속아 넘어갑니다. 25절 원문을 직역하면 '아침에 보니, 보라! 레아였다!(바보케르 힌네 히 레아, בַּבֹּקֶר וְהִנֵּה הִוא לֵאָה)', 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챌 때 울려 퍼졌을 환희의 탄성 '힌네(보라!)'가, 이제 가장 참담한 경악의 탄성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야곱의 항의 '람마 라마타니(לָמָּה רִמִּיתָנִי,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에 사용된 동사 '라마(רָמָה, 속이다)', 는 창세기 27:35에서 이삭이 야곱의 속임수를 묘사할 때 사용한 바로 그 동사입니다. '속이다'라는 행위가 야곱에게서 라반에게로, 그리고 다시 야곱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벼락으로 심판하시지 않고, 라반이라는 거울을 통해 야곱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기만자였는지를 몸서리치게 깨닫게 하십니다. 죄는 그 죄인에게 동일한 모양으로 되돌아옵니다(갈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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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가 받은 상처에는 민감하면서, 내가 남에게 준 상처와 속임수에는 무감각합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우리는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람마 라마타니)!'라며 하늘을 향해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 억울함의 밤이 어쩌면, 과거에 내가 누군가를 속이고 밟고 일어섰던 이기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거울일 수 있습니다. 억울한 수평적 사건 앞에서 타인을 향한 분노로 끝낼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숨겨진 '야곱의 본성'을 아프게 성찰하고 십자가 앞에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뿌린 죄의 씨앗을 뼈아프게 직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성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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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0절 라반의 합리화와 대상화된 딸들 :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
하나님은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세상의 폭력과 불의한 질서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보호하시는 섭리의 주관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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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항의에 라반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고 대답합니다. 칠 일을 채우면 라헬도 주겠으니 7년을 더 섬기라고 제안합니다. 야곱은 이에 순응하여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고,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며 7년을 더 라반을 위해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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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의 대답은 야곱의 심장을 예리하게 찌르는 비수였습니다. '언니(맏이)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합당치 않다.' 이 말은 야곱이 형 에서(맏이)를 제치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과거의 원죄를 정확히 꼬집습니다. 속임수에 '전통과 명분'이라는 옷을 교묘하게 입히는 라반의 언어는 소름 끼치도록 세속적입니다. 라반이 내세운 '풍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라아(מְלֵאָה)', 즉 '한 주(week)가 차다'는 표현은 신랑-신부 잔치의 이레를 마쳐야 한다는 관습을 가리킵니다. 라반은 이 관습을 내세우되, 레아의 이레를 먼저 채우면 라헬도 주겠다는 조건을 달아 14년의 노동을 담보로 설정합니다. 라반에게 두 딸은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라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야곱 역시 라헬의 외모에 집착하여 레아의 인격을 철저히 소외시키는 또 다른 형태의 수평적 폭력을 가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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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는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하는 '라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가정 안에서도 자녀를 자신의 체면이나 노후 보장의 도구로 삼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직분이나 명분을 내세워 성도들의 헌신을 부당하게 강요하거나 도구화하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이용 가치로만 평가하는 라반의 세속적 방식을 단호히 거부하고, 각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 Imago Dei)으로 존중하며, 이익이 아닌 인격과 사랑의 논리가 지배하는 거룩한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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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절 엇갈린 시선 속,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 : 세상이 버린 자를 택하시는 은혜
하나님은 세상이 편애와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버릴 때,가장 소외되고 상처받은 자의 고통을 긍휼히 보시고 은혜의 문을 여시는 따뜻한 위로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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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사누아, שְׂנוּאָה)', 즉 미움받고 거절당함을 '보시고(와야르, וַיַּרְא)',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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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시선은 오직 아름다운 라헬에게만 꽂혀 있었습니다. '사누아(שְׂנוּאָה)', 직역하면 '미움받는 자'입니다. 라반과 야곱, 심지어 동생 라헬조차 그녀를 철저히 소외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수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뚫고 들어옵니다. '와야르 여호와(וַיַּרְא יְהוָה, 여호와께서 보시고)', 는 창세기 전체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에 직접 개입하시는 신현(Theophany)의 언어입니다.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이스라엘을 향해 '보시고(출 2:25)',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보시는(시 10:14)' 그 하나님이 여기서도 동일하게 개입하십니다.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시선이 머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개입의 방향입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훔쳐 언약의 계승자가 된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고 선택한 자(라헬)를 통해서가 아니라, 야곱이 가장 미워하고 외면한 자(레아)의 태를 열어 구속사의 계보를 이어가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수평적 편애와 기득권을 전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 하사(고전 1:27)', 레아의 결핍이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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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예쁘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자에게만 시선을 고정합니다. 우리 자신도 야곱처럼 조건 좋은 사람(라헬)에게만 마음을 주고, 볼품없고 약한 사람(레아)은 쉽게 무시하고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사누아', 세상에서 미움받는 자, 소외된 자, 상처 입은 자의 곁에 머무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야곱의 편애 때문에 남몰래 울고 있는 레아가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곳—사랑받지 못해 눈물짓는 연약한 이웃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또한 내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사누아'처럼 거절당할 때, '와야르 여호와', 나의 고통을 굽어살피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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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35절 레아의 눈물, 그리고 집착을 넘어선 찬양 : 결핍이 유다(찬양)를 낳다
하나님은 사람을 향한 우리의 헛된 갈구와 집착을 다루시어, 마침내 우리의 상처가 하나님만을 높이는 거룩한 찬양의 통로로 승화되게 하시는 치유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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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는 첫째 '르우벤(ראוּבֵן, 보라 아들이로다/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둘째 '시므온(שִׁמְעוֹן, 들으심/여호와께서 나의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 셋째 '레위(לֵוִי, 연합/내 남편이 이제 나와 연합하리라)' 를 낳습니다. 그리고 넷째 '유다(יְהוּדָה, 찬양하다/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를 낳고서 마침내 출산이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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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가 낳은 네 아들의 이름에는 한 여인의 뼈저린 수평적 한(恨)과 절박한 갈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름의 어원을 추적하면 레아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르우벤(ראוּבֵן)은 '보다(라아)'와 '아들(벤)'의 합성어로, '남편이 내 아들을 보고 나를 사랑하리라'는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시므온(שִׁמְעוֹן)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지만, 레아의 고백은 여전히 '그러니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로 귀결됩니다. 레위(לֵוִי)는 '연합'을 뜻하며, 세 아들을 낳은 이제야 남편이 자신과 연합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레아의 모든 시선은 오직 '남편의 사랑을 얻는 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남편이 자신을 봐주기를 구걸했지만, 야곱의 마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넷째 '유다(יְהוּדָה)', 를 낳았을 때, 레아의 고백에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파암 오데 에트 여호와, הַפַּעַם אוֹדֶה אֶת יְהוָה).' '이번에는'이라는 뜻의 '하파암(הַפַּעַם)', 이 이 고백의 전환을 강조합니다. 레아의 입에서 '내 남편'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오직 '여호와'만이 남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던 수평적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보시고 자녀를 주신 창조주를 향해 수직적 찬양을 올려드린 것입니다. 남편이라는 우상이 무너진 그 빈자리에서 하나님이라는 참된 피난처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집착이 끊어진 빈자리에서 태어난 '유다'를 통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게 하시는 영광을 안겨주셨습니다. 결핍이 찬양을, 찬양이 구속사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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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고통은 대개 '수평적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레아처럼 배우자의 사랑에, 자녀의 성공에, 직장에서의 인정에 목을 매며 아들의 이름에 결핍의 고통을 새겨 넣습니다. '이것만 얻으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겠지'라는 헛된 기대로 고통의 이름을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반드시 실망과 상처로 돌아오며, 인간을 향한 수평적 집착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입니다. '하파암 오데 에트 여호와(이번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레아의 이 결정적 전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결핍을 채워주지 못하는 세상의 우상(사람, 돈, 명예)을 향한 갈구를 멈추고, 나의 산 소망이 되시는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찬양하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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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상처와 결핍을 돌보사 찬양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람마 라마타니'의 야곱처럼 타인에게 속고
억울할 때마다 하늘을 향해 원망했지만,
사실 그 기만의 밤은 내가 과거 누군가에게 가했던
'라마(속임수)'의 거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내 욕망을 채우려 누군가의 마음에 눈물을 내게 했던
우리의 이기적이고 교활한 모습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옵소서.
주님, 사람을 '이마고 데이(하나님의 형상)'로 대하지 않고,
나의 목적과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라반의 세속적인 폭력성이 우리 안에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와야르 여호와', 하나님의 시선이 야곱에게 외면당해
홀로 울고 있던 레아에게 머물러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누아'처럼 소외된 자, 우리 공동체 안에서
남몰래 울고 있는 이웃에게 우리의 시선이 닿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사누아'처럼 거절당할 때는
'와야르 여호와'의 긍휼을 붙들게 하옵소서.
마지막으로, 레아의
'하파암 오데 에트 여호와(이번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처럼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던
우리의 집착을 내려놓게 하시고,
우리 인생의 결론이 '유다(찬양)'가 되게 하옵소서.
레아의 결핍이 구속사의 통로가 되었듯,
우리의 상처와 눈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는 역설적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다윗과 유다의 자손으로 오사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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