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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0-33 떨어지는 밀알, 죽음으로 피워낸 생명의 축제

*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자기중심적 생존 본능을 넘어, 타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밀알의 신비'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생명의 영광이 시작된다.


산천은 이미 연둣빛 설레임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이 계절에, 요한복음 12장은 우리에게 가장 근원적인 생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온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에게 나아와 간청합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요12:21, 한글 약어).


이들의 요청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지혜와 철학의 나라인 그리스에서 온 이들은, 당시 세상이 줄 수 없는 근원적인 평화와 진리에 대한 갈망을 안고 있었습니다. 송민원 교수의 통찰처럼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면, 이들의 "뵙고자 하나이다"라는 말은 인간이 신을 향해 던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도 깊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들의 부름을 들으시고 비로소 선언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주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세상이 말하는 승리의 월계관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품으시는 '자기 비움'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의 가장 소박한 비유를 가져오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우리는 흔히 신앙을 '나'를 확장하고 보존하는 수단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5)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자학이 아닙니다. 이기주의라는 좁은 감옥에 갇힌 가짜 자아를 죽여야만, 타자와 연결된 광활한 우주적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초대입니다.


라틴어 학자 한동일 교수가 말했듯 "우리는 각자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밀알이 땅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더 큰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장엄한 도약입니다. 묵상이란 바로 이 밀알의 시간을 견디는 것입니다. 박대영 목사가 말한 '묵상'이 단순히 성경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여정"이듯, 우리는 묵상을 통해 내 안의 이기적인 껍질이 깨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드는 '거룩한 부서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음의 직전, 예수님은 인간적인 고뇌를 숨기지 않으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요12:27). 그러나 이내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며 사명을 수용하십니다.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12:32). 여기서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의 처형을 의미합니다 (요12:33). 세상의 권력은 공포로 사람을 굴복시키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을 '매혹'하고 '이끄십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의 문턱에서 망설이는 이들이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연약함 속에서 "내 마음이 괴롭습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할 때,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이기주 작가가 말한 '언어의 온도'처럼,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가장 따뜻하고도 강렬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묵상의 여정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땅에서 들려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고 계신 그 사랑에 이끌림(Attraction)을 당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십시오. 그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삶에 스며들도록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이 밀알이 되어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작고 초라한 밀알 같은 삶이 그분의 거대한 사랑과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축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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