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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16-33 무너진 틈새를 막아선 거룩한 질문 ; 기도,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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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심판의 당위성 앞에서도 기어이 하나님의 자비를 붙들고 늘어지는, 그 무모하고도 간절한 중보의 끈기입니다.

*

해 질 녘, 나그네들을 배웅하러 나선 아브라함의 발길이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멈춥니다. 저 멀리 화려한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 욕망의 소음으로 가득 찬 소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치 독백처럼, 그러나 아브라함이 듣기를 원하신다는 듯 입을 여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이것은 단순한 정보 공유가 아닙니다. 송민원 목사는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이 장면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당신의 통치 파트너로, ‘천상 회의(Divine Council)’의 일원으로 초청하시는 엄중한 순간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저 순종만 하는 로봇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공의(Mishpat)와 정의(Tzedaqah)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할 대화 상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에덴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신 것도 인간이 맹복적 복종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자발적 순종으로 나아오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소돔의 멸망 소식 앞에서 아브라함은 뒷걸음질 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을 막아서며 묻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이 질문은 성경 역사상 가장 도발적이고 위험한 질문입니다. 감히 피조물인 ‘티끌과 같은’(창 18:27) 인간이 창조주의 심판 기준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불경해 보이는 질문을 기뻐하십니다. 50명에서 시작된 카운트다운은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마침내 10명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시장통의 흥정이 아닙니다. 랍비 아브라함 예슈아 헤셸이 말한 ‘신적 파토스(Divine Pathos)’를 가슴에 품은 인간이, 벼랑 끝에 선 이웃을 살려내기 위해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아브라함이 찾았던 ‘의인 열 명’은 도덕적으로 무흠한 슈퍼맨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악의 도시가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영적인 기둥이자, 타락한 세상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남은 자’들입니다. 롯을 통해 보면 아브라함처럼 ‘환대’를 실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돔이 멸망한 것은 죄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죄의 무게를 감당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 있는 벗님들.

오늘 우리는 소돔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뉴스를 볼 때마다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라고 비판하는 평론가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소돔을 향한 심판의 계획을 멈추게 할 ‘그 사람’, 무너진 성벽의 틈새(겔 22:30)를 막아서서 “하나님, 이 성을 멸하시려거든 차라리 저를 밟고 가십시오”라고 외칠 중보자를 찾고 계십니다.

신앙은 나 혼자 구원받아 안전한 산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멸망해가는 도시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끈질기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가 우리의 기도로 인해 꺾이기를, 당신의 진노가 우리의 사랑 때문에 지연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이 ‘지는’ 싸움을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닐지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내 가족, 내 이웃, 그리고 아파하는 이 땅을 위해 오늘 밤 무릎 꿇을 수 있다면,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열 사람’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포기보다 언제나 더 깁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창세기 18:16-33 제목: 파국을 막아서는 간절한 질문, 그 거룩한 ‘멈춤’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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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과의 흥정이 아니라,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의 운명 앞에 가로막고 서서 ‘공의와 사랑’을 묻는 치열한 ‘관계의 묵상’이며, 파국을 막기 위해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

계절의 순환 속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기적의 영토에 당도한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부조리함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미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18장의 후반부는 바로 그 멸망의 벼랑 끝에 선 도시 소돔과, 그 앞을 막아서는 한 인간 아브라함의 숨 막히는 대화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가시며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이것은 단순한 정보 공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으로,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함께 고민할 ‘동역자’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송민원 교수는 소돔의 죄악이 단순히 성적인 타락을 넘어, 낯선 이를 배척하고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환대의 실패’이자 ‘공동체 윤리의 붕괴’라고 지적합니다. 약자의 울부짖음(크라카)이 하늘에 닿을 때, 하나님은 그 참상을 확인하러 내려오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섭니다”(창 18:22). 그리고 감히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23). 김기석 목사님은 이 장면을 두고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이며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질문 뒤에는 무고한 생명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라틴어 수업에서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Hominum miseria)”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티끌과 같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았지만, 동시에 타자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 운명에 개입하려는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에서 시작하여 10명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숫자를 줄여가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거룩한 흥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물건값을 깎는 흥정이 아닙니다. ‘묵상’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의 삶과 타인의 삶으로 ‘번역(Translation)’해 내는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과 깊은 관계의 묵상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으며, 하나님 본연의 성품인 ‘사랑’과 ‘공의’에 호소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시간과 감정을 온전히 소모하며, 소돔이라는 타자의 운명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투신(投身)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끈질긴 요청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숫자를 줄일 때마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응답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을 막아서기를 기다리셨는지도 모릅니다.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해야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생명을 구원할 작은 가능성, 즉 ‘의인 열 명’을 찾고 싶어 하시는 ‘끙끙 앓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무엇입니까? 나 혼자 구원받고 평안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사사로운(Idiotes)’ 신앙을 넘어, 세상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껴안고 하나님 앞에 서는 ‘참여의 영성’입니다. 때로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고, 세상이 너무 악해 보여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소돔이 멸망한 것은 죄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죄악을 막아서며 기도할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의인이 아닙니다. 묵상은 ‘성경이 목적하는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이웃의 고통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열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고,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거룩한 방파제’가 될 때, 하나님의 진노는 유예되고 구원의 문은 다시 열릴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 삶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은 말씀을 마치고 가셨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곳으로 돌아갔습니다(창 18:33). 그 돌아가는 발걸음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비록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세상의 희망이 자라는 곳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방파제(Breakwater)’와 같습니다. 방파제는 파도와 맞서 싸우느라 늘 젖어 있고 때로는 깎여 나가지만, 그 묵묵한 버팀이 있기에 항구 안의 배들은 평온을 누리며, 세상이라는 바다는 멸망의 해일로 돌변하지 않고 생명을 품는 어머니의 품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외면치 않고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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