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1-15 낯선 나그네의 얼굴로 오신 하나님 ; 환대,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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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타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 낯선 방문객을 위해 기꺼이 나의 그늘을 내어주는 거룩한 환대(歡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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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햇살이 작열합니다.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깊은 나른함이 느껴집니다. 그 시간은 모든 생명 활동이 멈추는 시간,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권태의 시간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 기상도와 닮아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변화 없는 신앙생활, 그리고 '이제 내 인생에 무슨 놀라운 일이 있겠어?'라는 자조 섞인 체념이 우리를 장막 문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때, 세 사람이 맞은편에 섭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이득을 줄 수 없는 지친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몸을 굽힙니다. 송민원 목사는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이 장면을 매우 흥미롭게 포착합니다. 성경은 그들을 '세 사람'이라고 했다가, 어느 순간 '여호와'라고 지칭하며 그 경계를 허물어버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 번개처럼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낯선 타자(The Other)의 얼굴을 하고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레비나스(Levinas)는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호소하는 신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내게 갚을 능력이 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급히 떡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아 그들에게 '그늘'과 '양식'을 제공합니다. 자신의 평온을 깨뜨리고 들어온 불청객을 극진한 환대의 대상으로 맞이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환대의 자리에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약속이 선포됩니다. "내년 이맘때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
장막 뒤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내 주인이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그것은 생물학적 사망 선고를 받은 여인의 씁쓸한 비소(비웃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냉소적인 웃음조차 탓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반문하시며, 그 비웃음을 진정한 기쁨의 웃음(이삭)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앙의 역동성을 잃어버린 벗님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높은 산에 오르거나 특별한 체험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바로 '내 곁을 스쳐 가는 지극히 작은 자' 속에 계심을 일깨워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인 장막 앞이었습니다.
신앙은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다가온 낯선 이웃, 도움이 필요한 성도, 혹은 이해하기 힘든 가족에게 내 마음의 한 뼘 그늘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베푼 작은 친절, 따뜻한 밥 한 끼, 진심 어린 안부 인사가 곧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사라의 웃음처럼 메마르고 냉소적일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서로를 향해 환대의 문을 열 때, 하나님은 그 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씁쓸한 인생을 축제의 자리로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장막 앞을 지나가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가 바로 당신이 기다리던 하나님일지도 모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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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1-15 한낮의 정적을 깨우는 발자국 소리, 그 거룩한 마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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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환대는 낯선 타자를 향해 마음의 빗장을 여는 용기이자, 그 열린 틈으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들고 우리 비루한 일상 속으로 들어오시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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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순환 속에서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며 오늘이라는 기적의 영토에 당도한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정오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선 것처럼 현기증이 일고, 일상의 권태와 피로가 우리 영혼을 무겁게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뜨거운 대낮, 장막 문에 앉아 있던 노년의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약속은 더디고 육체는 쇠락해가는 한 인간의 쓸쓸한 뒷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권태로운 정적을 깨고 낯선 나그네 셋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 우연한 만남은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거룩한 사건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그들이 하나님과 천사임을 알았기에 극진히 대접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송민원 교수는 창세기를 ‘수평적 읽기’로 안내하며, 아브라함은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자신의 장막 앞을 지나가는 낯선 이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환대했다고 지적합니다,. 아브라함은 달려나가 몸을 굽히고, 물을 떠와 발을 씻기고,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합니다. 이것은 계산된 투자가 아닙니다. 내 삶의 영역으로 들어온 타자(他者)의 고단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쉴 자리를 내어주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이를 두고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대단한 신학적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친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 따뜻한 ‘감수성’에 있었습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에게 건넨 “내 주여”라는 말과 정성스런 음식에는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뜨거운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나그네들이 식사하는 동안 나무 아래 서서 시중을 듭니다. 자신이 베푸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섬기는 자의 위치에 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환대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나그네 된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일상의 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베푼 이 지극한 환대의 끝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장막 뒤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이것은 비웃음이라기보다, 척박한 현실과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터져 나온 ‘체념의 웃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메마른 웃음조차 놓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하나님은 사라의 냉소적인 웃음을 생명을 잉태하는 기쁨의 웃음(이삭)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성경이 나를 읽게 하는 시간”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 삶의 관계 방식을 재조정하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환대 이야기를 이드거니 씹어 묵상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 높은 곳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지극히 작은 자의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내 곁을 스쳐가는 이웃의 표정에서 하나님의 신호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여러분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혹은 거리에서 마주친 까칠한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내신 ‘천사’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안락한 장막에만 머물지 않고, 문을 열고 달려나가 타자의 손을 잡을 때, 우리의 비루했던 일상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소(Sanctuary)로 변모합니다.
이제 무거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하루를, 낯선 이웃을 환대하십시오. 계산하지 말고, 그저 사랑의 온도를 담아 건네는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힘이 되고, 나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이 됩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기쁨을 누리는 ‘일상의 순례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악기인 ‘공명통(Resonance Chamber)’과 같습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지만, 외부에서 다가오는 낯선 진동(이웃의 아픔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내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 함께 울릴 때, 비로소 세상을 치유하고 영혼을 맑게 하는 아름다운 공명(Resonance)의 소리를 내게 되는 법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