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6:01-22 창조주의 거룩한 탄식과 생명을 보전하는 순종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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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번성함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섞이며 경계가 무너지고, 세상은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함을 보시고 창조를 한탄하시며 심판을 결심하시지만,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생명을 보존하라는 세밀한 지침을 주시고, 노아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심판 너머의 새로운 창조를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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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문화적 배경 :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홍수 신화(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 서사시)와 대조를 이룹니다. 신들의 소음 공해 때문에 인간을 멸하려 했던 이교 신들과 달리,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부패’와 ‘폭력’에 대해 인격적으로 고뇌하십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본문은 창조(Creation)가 무질서로 돌아가는 역창조(De-creation)의 과정을 다룹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아를 통해 ‘남은 자’를 보존하시어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계보를 잇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 송민원의 관점 :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던 ‘수직적 교만’보다, 타인의 생명을 해치고 피조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수평적 폭력’이 홍수 심판의 본질적 이유임을 강조합니다.
# 참고 : 창세기는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넘어, 인간의 존재 방식과 하나님과의 관계적 본질이 어디에서 어그러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 관계를 붙드시는지를 보여주는 ‘관계의 책’입니다. 송민원 박사의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강조하는 ‘수평적 읽기’의 관점을 바탕으로, 창세기 6:1-22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탄식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을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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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경계의 붕괴와 육신이 된 인간 : 핵심 주제: 하나님의 질서를 이탈하여 탐욕적 ‘육체’로 전락한 인류.
하나님은 인간이 영적인 품격을 잃고 본능만 남은 존재로 살아갈 때, 당신의 영을 거두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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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번성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육신’(바사르)이 되었음을 보시고 그들의 날을 120년으로 한정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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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을 단순히 천사나 경건한 계열로만 보지 않고(천사는 영적 존재로 인간과 결혼 불가), 권력을 쥔 통치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경계를 허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로마의 황제가 신의 아들이라 한 것처럼, 고대 세계에서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자신들을 신의 아들들이라 하며 약자들 위에 군림하던 왕과 권력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딸들’은 힘없는 인간들의 딸들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laqah라카;취하다, 강제로 빼앗다)는 표현은 이들을 착취하고 유린하고 포악한 폭력으로 다스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며 타인을 소유물로 삼은 권력형 성범죄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태어난 이들을 네피림이라 하여 용사와 유명한 사람들이라 하는데, 네피림(나팔)은 ‘떨어지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남을 쳐서 넘어뜨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괴물이 아니라 힘으로 타인을 짓밝고 약자를 넘어뜨리는 자신의 배를 불리는 압제자이자 폭군들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은 이들을 용사라 명성있는자라 칭송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들은 결국 타락한 존재들로 타인을 짓밟고 군림하는 폭력배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지배하던 시대를 한머지로 무법천지(11절), 포악함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시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곳은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홍수 심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이들을 ‘악인’으로 예언서에서는 우상숭배자들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의 인을 맞은 이로 표현하고, 불의하고 폭력과 배제와 혐오를 일삼는 이들 모두 결국 같은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지만 성경은 그들을 하나님의 근심이라 부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생령’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육신’(바사르)으로 퇴보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바울의 가르침(갈 5:16-21)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네피림의 길이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에 넘어지셔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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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경쟁과 소유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보곤 합니다. 타인을 짓밟고서라도 성공하여 명성있는 자가 되길 혹시 나와 내 자녀들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직장 내 권력 갑질이나 성적 대상화는 창세기 6장의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취하는’ 모습의 현대판 재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도구로 삼는 세상의 문법을 거부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영적 품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타인을 넘어뜨리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방주는 짓는 의인이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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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마음의 계획과 하나님의 정념(Pathos) ; 깨어진 관계를 아파하며 은혜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에 분노하시기보다, 사랑하는 피조물의 타락에 대해 부모의 심정으로 탄식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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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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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탄하다’(나함)는 결정을 후회한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느끼는 깊은 ‘슬픔’과 ‘비통함’을 의미합니다. 송민원 박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고통의 파트너’로 여기셨음에 주목합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슬픈 눈길 속에서 그분의 긍휼을 발견했음을 뜻합니다. 이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픈 사랑(요 3:16)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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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참사와 고통이 만연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분노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탄식’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죄에 대해 무감각해졌을 때, 우리는 “주님이 지금 우리를 보며 근심하고 계시지는 않는가?”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누군가의 실수를 정죄하기보다, 그 무너진 상태를 함께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노아처럼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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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2절 동행의 삶과 부패한 땅 ;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의인의 가치.
하나님은 세상의 대세를 따르지 않고 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한 사람을 주목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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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반면 온 땅은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하마스)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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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다’(할라크)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수평적 삶의 태도입니다. 세상이 가득 채운 ‘포악’(하마스)은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 무법천지를 의미합니다. 송민원 박사는 인간의 포악함이 결국 인간이 딛고 선 ‘땅’마저 부패하게 만들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로마서 8:22에서 피조물이 인간의 죄 때문에 함께 신음하고 있다는 탄식과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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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면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와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하마스’(포악) 속에서,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법의 허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지 않는 정직함이 바로 ‘현대판 동행’입니다. 사회적 소외 계층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을 거두고 그들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부패한 땅을 정화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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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2절 보존의 명령과 온전한 준행 ; 생명을 살리는 구체적인 순종과 하나님의 세밀한 설계.
하나님은 심판의 끝에서도 생명을 보존할 대안을 세밀하게 예비하시는 건축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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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의 재료와 크기를 상세히 지시하시고, 가족과 생물들을 보존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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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는 단순한 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축소하여 보존하는 ‘떠다니는 성소’입니다. 하나님이 양식까지 저축하게 하신 것은(21절) 구원이 단지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필요를 채우시는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노아의 순종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신뢰였습니다. 이는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한 믿음”(히 11:7)과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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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방주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이 세상의 폭력과 부패로부터 생명을 보존하는 방주가 되어야 합니다. 정해진 크기와 규격(말씀의 기준)에 따라 교회를 세워갈 때, 교회는 세상의 대안적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가정과 일터에서 생명을 살리는 ‘말씀의 규격’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창조 세계를 보존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구체적인 실천은 노아가 방주를 짓던 땀방울과 같은 거룩한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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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며
깨어진 세상을 향해 탄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망각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경계를 허물며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완악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창조주께서 느끼시는 그 비통한 마음이
오늘 우리의 심장이 되게 하소서.
세상이 각자도생의 길로 치닫고 부패한 욕망을 자랑할 때,
우리는 노아처럼 묵묵히 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걷게 하소서.
비록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방주’를 짓는 수고일지라도,
생명을 보존하고 창조를 지키는 그 소명에 정직하게 순종하게 하소서.
갈등과 혐오로 가득한 이 땅 대한민국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어지는
구원의 방주와 같은 교회가 곳곳에 세워지게 하옵소서.
심판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십자가의 방주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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