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3:01-13 잃어버린 신뢰의 자리,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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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평화로운 질서 속에 간교한 뱀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지만, 그 결과는 신적 지혜가 아닌 수치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깨어진 관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책임을 타인과 하나님께 전가하며 인류 최초의 관계적 파국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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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및 문화적 배경 :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다신교적 창조 신화(에누마 엘리쉬 등)가 지배하던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신화들이 인간을 신들의 노역을 대신하는 노예로 보았던 것과 달리, 본문은 인간을 하나님의 대화 상대자이자 대리 통치자로 격상시킵니다.
# 신학적 및 정경적 배경 : 창세기 3장은 '원죄'의 시작인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역창조(De-creation)'의 과정을 보여주며, 동시에 요한복음 1장의 '성육신하신 말씀'을 통한 재창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정경적 토대가 됩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관점 : 본문을 위로부터의 일방적 심판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얽히고 충돌하는 '관계의 균열'과 그 속에서 던져지는 본질적인 '질문'에 주목합니다.<송민원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_복있는사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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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뱀의 질문과 신뢰의 흔들림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셨으나, 그 지혜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간교함'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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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한 뱀이 여자에게 나타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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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아룸'(arum)은 '슬기롭다'와 '간교하다'는 중의적 의미를 지닙니다. 뱀은 이 영민함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왜곡하는 데 사용합니다. 뱀의 질문은 하나님의 '금지'에만 초점을 맞추어 풍성한 '허용'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이는 신약에서 사탄이 광야의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 됨의 정체성을 시험하며 말씀을 왜곡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마 4장). 본문은 죄의 시작이 외적인 행동 이전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의 파괴'에서 비롯됨을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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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는 '똑똑함'과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로 추구되지만, 그 지혜가 타인을 속이거나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간교함'으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직장에서 정직보다 성과를 우선시하는 '아룸'의 유혹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입하는 "하나님이 정말 너를 위하시느냐"라는 회의주의적 질문에 맞서, 일상의 풍요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신뢰의 정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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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절 욕망의 선택과 관계의 붕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되, 그 자유가 창조주를 배제한 '자율적 우상화'로 흐를 때 찾아오는 공허를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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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여 대답하고, 나무의 열매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깁니다. 결국 열매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함께 먹은 후,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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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롬'(arom, 벌거벗음)의 상태에서 '아룸'(arum, 슬기로움)을 갈망했으나, 결국 얻은 것은 부끄러운 '아롬'뿐이었다는 언어유희에 주목합니다. '본즉'과 '따먹고'라는 동사의 연쇄는 인간의 감각이 하나님의 계시를 압도해버린 '인식론적 반역'을 상징합니다.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신 사건과 대조를 이루며, 인간이 스스로 'becoming'(되어감)의 주체가 되려 할 때 오히려 존재의 근원을 상실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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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나 '보여주기 식 삶'(SNS 문화)은 본질적으로 에덴의 '무화과 잎'과 같습니다. 자신의 내면적 공허를 화려한 겉모습으로 가리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관계는 더 파편화됩니다. 가정 안에서도 부모가 자녀의 인격보다 성취에만 주목할 때, 자녀는 부모 앞에서 자신을 숨기는 법을 배웁니다. 교회 공동체는 '가리는 문화'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투명한 사귐'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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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절 하나님의 추적과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쫓아오시는 추격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며 스스로 성찰하게 하시는 인격적인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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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는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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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께서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있어야 할 '관계의 자리'를 이탈했음을 일깨우는 '존재론적 호출'입니다. 이 질문은 수직적 취조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깨어진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하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연결되며, 하나님은 인간이 숨어 있는 어둠 속으로 먼저 찾아오시는 '선교적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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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직장 내의 책임 회피나 신앙적 나태함 속에서 종종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통의 자리로 초청하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무한 경쟁으로 지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었느냐"는 세상의 질문이 아니라, "너는 지금 어떤 존재로 서 있느냐"는 하나님의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세상의 나무 뒤에 숨지 않고 주님의 낯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용서와 용기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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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3절 책임 전가와 소외의 심화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허물을 정직하게 대면하길 원하시며, 책임을 떠넘기는 파괴적 언어를 멈추고 회복의 언어를 쓰길 바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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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다고 핑계하고, 여자는 뱀이 꾀었기 때문에 먹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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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답변은 여자뿐 아니라 그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까지 책임을 돌리는 극단적 소외를 보여줍니다. '한 몸'이었던 부부 관계가 '남 탓'을 하는 법정적 대립 관계로 변질된 것입니다. 이는 '수평적 관계의 균열'로 보며, 죄의 본질이 타인에 대한 폭력적 언어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훗날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신을 담보로 내놓으며 책임을 지는 모습(창 44장)과 대조를 이루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의 신비'로 향하는 구속사의 서막을 형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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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대립은 창세기 3장의 책임 전가와 닮아 있습니다.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책임 있는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갈등만 깊어집니다. 일터에서도 실수 앞에 동료를 비난하기보다 자신의 몫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적 존재'로서의 모습이 절실합니다. 가정 내에서 부부가 서로의 탓을 하기보다 "우리가 함께 길을 잃었으니 함께 주님께 돌아가자"고 고백할 때, 에덴에서 상실된 화해의 질서가 재건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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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태초에 우리를 신뢰와 사랑의 파트너로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주님의 손을 놓치고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존재인지 발견합니다.
간교한 뱀의 속삭임처럼 우리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시하며,
'보기에 좋은' 것을 쫓아 '살게 하는' 말씀을 외면했던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수치와 두려움에 갇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타인과 주님께 책임을 돌리며 관계를 무너뜨렸던
우리의 완악함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답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가죽옷으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이제는 숨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갈등과 비난이 가득한 이 땅에서
책임을 지고 화평을 일구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찾아오신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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