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2:04-25 여호와 하나님의 숨결로 빚어진 성소, 에덴에서의 거룩한 소명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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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향해 집중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비어 있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를 위해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경작하며 지키는” 사명을 맡기셨으며, 선악과라는 거룩한 한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독처하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그와 동등한 돕는 배필인 하와를 창조하심으로써 최초의 가정과 공동체를 완성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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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문화적 배경 : 창세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신화(에누마 엘리쉬 등)는 인간을 신들의 노역을 대신하는 노예로 묘사했으나, 창세기는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이자 성소의 관리자로 격상시키며 고대 세계의 비인간적 가치관을 전복합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본문은 ‘톨레도트’(내력) 공식을 통해 우주의 기원에서 인간의 역사로 전환되는 분수령입니다. 엘로힘(1장의 하나님)이 야웨(2장에서는 여호와)로 나타나며 창조주가 인간과 맺는 ‘언약적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 성육신과 요한계시록 22장의 생명수 강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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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절 인간의 기원: : 흙으로 빚어지고 하나님의 숨으로 살아난 존재인 인간.
하나님은 비천한 우리를 찾아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친밀한 토기장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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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창조될 때의 내력이 펼쳐집니다(4b). 비가 내리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던 황량한 땅에 안개가 올라와 지면을 적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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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트’(내력)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라는 배경에서 ‘인간의 역사’가 탄생했음을 선언합니다. ‘아담’(사람)이 ‘아다마’(흙)에서 왔다는 언어유희는 인간이 대지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송민원 박사는 이를 ‘수평적 읽기’의 관점에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이전에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겸손을 배운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마치 옹기장이처럼 손수 흙을 만지시는 ‘야웨 엘로힘’(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신약에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흙과 같은 우리의 인성을 입으시고, 부활 후 제자들에게 숨을 내뱉으시며 성령을 주신 사건(요 20:22)과 구속사적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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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와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연봉이나 지위로 환산하곤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은 우리가 ‘흙’에 불과함을 기억하며 겸손하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생기가 담긴 ‘생령’이기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성을 지녔음을 일깨워줍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을 수단으로 대하거나 경쟁자를 짓밟으려 할 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숨결이 닿은 고귀한 작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를 부모의 소유가 아닌, 창조주가 잠시 맡기신 생명으로 대우하며 그들의 내면에 깃든 하나님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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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절 에덴의 창설과 은혜의 예비 : 인간의 필요를 완전하게 채우시는 세심한 공급자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고립된 존재로 두지 않으시고, 가장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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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정원을 만드시고 직접 빚으신 사람을 그곳에 배치하셨습니다. 그곳에는 미적으로 아름답고 생존에 유익한 온갖 나무가 가득했으며, 정원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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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이라는 단어는 ‘기쁨’ 혹은 ‘평원’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인간을 단순히 노동의 도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향유하는 존재’로 부르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엘로힘’을 넘어, 정원을 직접 일구시는 정원사(Gardener)로서의 ‘야웨’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인간이 대지(아다마)에서 왔음을 잊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생명나무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누릴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은혜의 징표입니다. 이는 신약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요 6:35)를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시 접붙여짐을 예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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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경쟁과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일상을 ‘전쟁터’로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은 우리의 일상이 본래 하나님의 ‘정원’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직장 업무나 가사 노동이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들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성공의 법칙을 주입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소중한 재능(나무)을 발견하도록 돕는 ‘정원사’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메마른 가치관에 지친 영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시 34:8) ‘영적 에덴’의 역할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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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절 에덴에서 흐르는 생명의 강 : 온 세상을 향해 생명과 복을 흘려보내시는 풍요의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임재로부터 시작된 생명력을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전달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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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하나가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네 갈래(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로 나뉩니다. 이 강들은 금과 보석이 가득한 땅들을 둘러 흐르며 온 지면을 풍성하게 적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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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네 강은 온 인류가 거주하는 세계 전체를 상징합니다. 힛데겔(티그리스)과 유브라데는 역사적 실재를 반영하며, 하나님의 복이 에덴이라는 특정 장소에 갇혀 있지 않고 인류 문명 전체로 확산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소(에덴)에서 시작된 생명력이 온 대지로 퍼져나가는 역동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비손 강 주위의 금과 호마노는 창조 세계가 지닌 본래의 영광과 가치를 나타내며, 이는 하나님 나라가 물질적 풍요와 영적 거룩함이 조화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참된 에덴의 발원지이시며, 성도가 그 복의 통로가 됨을 확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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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소유욕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와 성도는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강’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얻는 수익과 재능(금과 보석)을 나만을 위해 쌓아두는 것은 에덴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사무실, 우리가 경영하는 사업체가 에덴의 물줄기가 닿는 곳이 되어, 소외된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생명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생태계 보존에 앞장서는 것은,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이 온 땅을 적셨던 그 창조의 리듬을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선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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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절 에덴의 사명 : 성소를 가꾸는 제사장적 노동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율성을 주시되, 거룩한 한계를 통해 참된 안식을 가르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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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동산의 각종 나무 열매는 임의로 먹게 하시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시며 어길 시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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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하다’(아바드)와 ‘지키다’(샤마르)는 훗날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봉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는 인간의 노동이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이자 창조 세계를 돌보는 제사장적 사명임을 뜻합니다(요한계시록 4-5장에서는 천상예배로 이러한 그림을 표현합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금지라는 ‘수직적 명령’인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탐욕을 멈추고 피조물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수평적 경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광야 시험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되며, 말씀에 순종할 때만 인간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소유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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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는 ‘일’을 자아실현의 수단이나 생계의 짐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일터는 하나님의 정원을 가꾸는 ‘에덴의 확장’이어야 합니다. 직장 업무를 단순히 돈벌이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제사장적 사역으로 재정의해야 합니다. 또한,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망의 선악과를 내려놓고, 법과 윤리의 경계를 지키는 정직함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편법을 거부하고 거룩한 한계를 지킬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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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5절 공동체의 완성: 고독을 넘어선 온전한 연합
하나님은 인간의 고독을 긍휼히 여기시며, 동등한 인격체와의 사귐을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공동체의 창시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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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음을 보시고 ‘돕는 배필’을 지으려 하십니다. 아담이 각종 짐승의 이름을 짓지만 알맞은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자, 아담은 그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하며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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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 배필’(에제르 케네그도)은 열등한 보조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실 때 쓰는 ‘구원적 도움’을 뜻하는 ‘에제르’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두 존재가 마주 보며 서로를 완성하는 ‘대칭적 동반자’임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이름을 짓는 행위는 생육과 번성을 위한 ‘인식의 시작’이며, 하와와의 연합은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관계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연합(엡 5:31-32)을 예표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는 죄 없는 순전한 신뢰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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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가 급증하고 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사회에서, 창세기 2장의 연합 모델은 치유의 대안입니다. 부부는 서로를 소유물이 아닌 ‘나의 다른 자아’로 존중해야 하며, 교회 공동체는 사회적 지위나 배경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고 ‘한 몸’ 됨의 신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특히 젠더 갈등이 심각한 현실 속에서 남녀가 서로를 지배의 대상이 아닌 ‘구원적 동반자’로 인식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부끄러움 없이 서로를 환대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일궈갈 때, 깨어진 우리 사회에 에덴의 샬롬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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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태초에 땅의 흙으로 정성스레 우리를 빚으시고,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존재로 세우신 주권자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에덴의 이야기를 통해 저희 존재의 고귀함과 사명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리고 스스로 주인 되어 살았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우리를 에덴의 청지기로 부르셨사오니,
우리의 일터와 가정이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로 가꾸어지는 거룩한 성소가 되게 하소서.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는 순종을 통해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배우자와 지체들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여기며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갈등과 소외로 신음하는 이 땅에,
창세기가 보여준 그 아름다운 연합과
샬롬의 질서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수치를 십자가의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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