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1:26-2:3 하나님의 형상으로 통치하며 거룩한 안식을 향유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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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여섯째 날, 삼위일체적 협의를 통해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고 번성하게 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동물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며 모든 창조가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일곱째 날, 하나님은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며 그날을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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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ANE)의 창조 신화들(에누마 엘리쉬 등)에서 인간은 신들의 노역을 대신하기 위한 노예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창세기는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격상시킵니다. 특히 '형상'은 당시 오직 왕에게만 허용된 칭호였으나, 성경은 이를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을 선포합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창세기 1장은 물질적 기원을 넘어 하나님의 ‘왕 되심’과 우주가 그분의 ‘성소’임을 드러내는 기능적 서술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통한 재창조와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안식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기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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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8절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름받은 인간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Identity)으로 삼으셔서 세상을 돌보는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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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복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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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먼 조이 아임스는 히브리어 전치사 ‘베’가 장소나 방식이 아닌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in)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로서’(as) 존재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의 조상(statue)이 그 왕의 권위를 상징하듯,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 땅에 비추는 ‘각진 거울’이자 대리자입니다. “우리의 형상”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과 천상 회의의 결단을 반영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관계적 공동체’(남자와 여자) 속에서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냄을 뜻합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상실된 형상을 완벽하게 구현하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하며,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이 형상이 회복된다고 가르칩니다(골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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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는 학벌, 외모, 경제력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는 ‘비인간화’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임스의 통찰처럼, 장애나 능력이 형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을 소모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존중하는 것, 가정에서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족으로 대우하는 것이 진정한 형상의 회복입니다. 또한, '정복과 다스림'은 환경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생태계를 보살피는 '청지기적 돌봄'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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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절 생명을 위한 풍성한 공급과 만족
하나님은 피조물의 필요를 세밀하게 살피시고 창조의 조화를 기뻐하시는 자애로운 공급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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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양식으로 주셨고, 들짐승에게는 푸른 풀을 먹거리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조화로운 창조 질서를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감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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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양식을 지정해주시는 행위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공존했던 ‘에덴의 원형적 평화(Shalom)’를 보여줍니다. “심히 좋았더라”는 평가는 단순한 미적 감탄을 넘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목적과 기능에 따라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통치적 만족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대 근동의 신들이 인간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 했던 것과 정반대로, 하나님이 먼저 인간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 자애로운 공급은 신약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과, 궁극적으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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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경쟁과 각박한 생존 투쟁이 일상이 된 대한민국에서 성도는 ‘하나님이 나의 공급자’이심을 믿고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이미 허락하신 일상의 소소한 것들(음식, 자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심히 좋음”을 발견하는 ‘심미적 영성’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이 위협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나누는 통로가 되어야 하며, 기후 위기 시대에 창조 세계의 보존을 위해 절제된 소비와 생태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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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창조의 절정인 거룩한 안식
하나님은 창조의 완성을 ‘안식’으로 정의하시며, 우리를 시간 속의 지성소인 주님과의 사귐으로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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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는데, 이는 그날에 모든 창조 사역을 그치고 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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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은 단순히 피로를 푸는 휴식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를 즐거워하는 사법적인 평온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못 해서 쉬신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성전 건축을 마친 왕이 보좌에 앉아 다스리심을 공포하는 행위입니다. 아임스의 설명처럼, 안식일은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시간 속의 성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안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릴 ‘종말론적 안식’과 연결하며, 믿는 자만이 이 거룩한 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히 4:3-11). 창조의 목적이 안식 곧 샬롬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과 함께하심 곧 임마누엘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주 안에 있을 때 참된 평안을 얻고, 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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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사회’라고 불리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멈춤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세상을 돌보신다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주일을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날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인격적 사귐을 누리는 ‘축제의 날’로 회복해야 합니다. 직장 업무나 입시 공부보다 하나님의 안식이 우선임을 삶으로 증명할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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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태초에 말씀으로 질서를 세우시고,
저희를 주님의 형상으로 삼아 소중한 생명의 세계를 맡겨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며
어떠한 영광을 위해 부름받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로는 흙과 같은 연약함에 절망하고
세상의 경쟁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우리를 온전한 형상으로 회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타인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존중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터와 자연을
주님의 마음으로 돌보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분주한 세상의 속도에 쫓기지 않고,
주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안식의 리듬을 따라
쉼과 사귐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이 땅 대한민국이 생명을 경시하는 죽음의 문화에서 벗어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주님의 창조적 조화를 회복하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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