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5:01-15 베들레헴의 작은 별 : 고난의 밤을 지나 평화의 왕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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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5장은 대적의 포위와 지도자의 수치라는 절망적인 현실(1절) 속에서,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을 통해 오실 영원한 통치자를 예언하며 반전을 선포합니다. 이 왕은 여호와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먹이는 목자가 되어 땅끝까지 평강을 전하며,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남은 자들을 건져내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의지하던 군사력과 우상을 철저히 제거하심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정결한 공동체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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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주전 8세기 후반,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시기입니다. 지도층은 탐욕에 눈이 멀어 약자를 수탈했고, 종교적으로는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 숭배 및 복술이 만연하여 영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어 심판을 통해 자기 백성을 정화하시고, 다윗 언약에 기초한 메시아를 통해 궁극적인 회복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본문 2절은 마태복음 2:6에서 인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을 확증하는 결정적인 메시아 예언으로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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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베들레헴에서 시작되는 가장 낮은 자의 구원
하나님은 세상의 화려한 중심지가 아닌, 가장 작고 미약한 곳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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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온은 대적에게 포위되어 왕이 뺨을 맞는 치욕을 겪고 있습니다(1절).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 족속 중 가장 작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2절).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으며, 산고를 겪는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잠시 고난의 시간이 있겠지만 결국 남은 자들은 회복될 것입니다(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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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1절의 '뺨을 맞는 재판자'로 상징되는 무력한 인간 통치자와 2절의 '영원부터 계신 통치자'를 극적으로 대조하며 구원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 역설적 선택의 신학, 베들레헴 에브라다 : 베들레헴은 유다의 수많은 고을 중 명함조차 내밀기 힘든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화려한 궁정이 아니라, 이 보잘것없는 곳을 메시아의 요람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정치적 계산이나 군사적 요충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권적인 은혜와 선택에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떡집(Bethlehem)'과 '풍성함(Ephrathah)'이라는 이름의 조합은, 장차 오실 왕이 영적 기근에 빠진 인류에게 하늘의 생명의 떡을 풍성히 나누어 줄 분임을 예표합니다. 이는 다윗을 목동에서 왕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낮은 자를 높이시는' 일관된 원리를 재확인합니다.
- 메시아의 선제적 존재성과 영원성 :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선언은 이 통치자가 단지 다윗의 혈통적 후손 중 하나가 아님을 못 박습니다. 여기서 '근본'은 그의 기원과 본질을 뜻하며, '영원(Olam)'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창조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요 1:1). 따라서 그분의 통치는 일시적인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질서의 회복이며 우주적인 통치입니다.
- 고난의 산고와 남은 자의 회복 : 3절의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는 메시아의 탄생과 그에 따른 구원이 즉각적인 마술처럼 임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죄에 대한 징계로 인해 일정 기간 '내버려 둠'의 시간을 겪어야 하며, 이는 아이를 낳는 산모가 겪는 극심한 진통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죽음을 향한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통증'입니다. 이 진통이 끝날 때, 흩어졌던 '남은 자(The Remnant)'들이 돌아와 진정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게 됩니다. 이는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는 기독교적 소망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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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자신의 약점, 가난, 부족한 배경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베들레헴' 같은 구석진 자리에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내가 가장 초라하다고 느끼는 그 영역이 주님의 통치가 임할 거룩한 성소임을 믿고,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내어 드립시다.
산고의 시간을 지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응답이 더디고 대적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것 같을 때,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진통임을 기억하십시오. 조급함 대신 영원부터 계신 주님의 시간표를 신뢰하며 오늘을 견뎌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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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절 목자 왕의 통치와 승리하는 남은 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어, 주님의 날개 아래서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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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여호와의 능력과 위엄을 의지하여 서서 자기 양 떼를 먹이시며, 그 권세가 땅끝까지 미칠 것입니다(4절). 그는 앗수르와 같은 대적의 침략 속에서도 '평강' 그 자체가 되시며(5절), 남은 자들을 이슬과 단비 같은 축복의 통로이자 사자 같은 승리자로 세우실 것입니다(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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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자적 통치 : '서서 목축함'의 의미 : 메시아의 통치 방식은 세상 군주들의 '군림'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본문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서서(Standing)" 목축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다'는 표현은 양들을 위해 깨어 경계하며, 위험이 닥칠 때 가장 먼저 앞장서서 대적과 맞서는 적극적이고 신실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그는 단순히 양들을 이용하는 주인이 아니라, 양들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자신의 온 능력을 쏟아붓는 선한 목자입니다. 그의 통치 권세가 '땅끝까지' 미친다는 것은 이 목자적 돌봄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경을 넘어 전 우주적인 구원으로 확장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 존재론적 평강 :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 성경에서 평강(Shalom)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미가는 메시아가 평강을 '가져온다'고 하지 않고, 그가 "평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평강이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연합할 때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외부에 앗수르라는 강력한 적군이 침략해도, 평강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 내면에 거하시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은 에베소서 2:14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는 말씀으로 완벽하게 성취됩니다.
- 남은 자의 이중적 정체성 : 이슬과 사자 : 7-8절은 회복된 남은 자들이 세상 속에서 수행할 두 가지 상반된 역할을 보여줍니다.
+ 이슬과 단비(7절) : 이는 하늘로부터 거저 내리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총을 상징합니다. 남은 자들은 사람을 기다리거나 세상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영적으로 메마른 세상에 생명력과 소망을 공급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는 복음의 '치유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 젊은 사자(8절) : 이는 악의 세력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강력한 위엄과 심판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사자가 숲의 짐승들을 압도하듯, 하나님의 백성은 진리의 권능으로 불의를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는 복음의 '정복적 성격'을 나타냅니다. 성도는 세상에 대해 부드러운 위로자이면서 동시에 죄에 대해 담대한 전사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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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당신을 밤잠 설치게 하는 '앗수르'(부채, 자녀 문제, 건강 염려, 업무적 압박)는 무엇입니까? 목자이신 주님이 지금 당신의 곁에 '서서' 돌보고 계심을 신뢰하십시오. 내 힘으로 방어막을 치려던 손을 내리고 주님의 지팡이를 붙잡는 기도를 드립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직장 동료, 까다로운 이웃, 힘겨워하는 친구)에게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생색내지 않으면서도 갈증을 해소해 주는 '이슬' 같은 말 한마디를 건네보십시오. 또한 진리를 거스르는 타협의 유혹 앞에서는 사자 같은 단호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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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5절 거짓 요새를 허무시고 정결케 하시는 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 의지하던 세상의 모든 군사력과 우상을 제거하시어, 우리를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거룩한 백성으로 빚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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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 하나님은 우리가 신뢰하던 군마와 병거를 멸절하고 견고한 성읍들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10-11절). 또한 우리 손에 든 복술과 우상, 우리가 만든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여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을 섬기지 않게 하시고, 순종하지 않는 열방을 심판하실 것입니다(12-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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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는 단순히 대적을 물리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백성의 내면을 정화하는 거룩한 파괴로 이어집니다.
- 거짓 안전망의 강제적 해체 : 10-11절에서 언급된 '군마, 병거, 성읍'은 당시 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신뢰했던 군사적 요새들입니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멸절하고 무너뜨리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무력하게 하려는 보복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구축한 '하나님 없는 안전지대'를 해체하시는 사랑의 개입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무기가 손에 쥐어질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그들의 성곽으로 삼게 하기 위해,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지상의 방어벽을 친히 허무십니다.
- 종교적 혼합주의와 우상 숭배의 뿌리 뽑기 : 12-14절은 내면의 영적 타락을 정조준합니다. '복술'은 미래를 내 손안에 두고 통제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며, '우상'은 내 필요를 위해 신을 조종하려는 이기심의 투영입니다. 특히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않게 하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스스로의 성취와 소유를 신격화하는 '자기 숭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깎아 만든 아세라 목상(물질적 번영)을 부수심으로써,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마땅한 질서를 회복시키십니다.
- 심판의 목적 : 사랑의 정화와 언약의 회복 : 이 단락의 무거운 심판 선언은 결국 '정결(Purification)'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파멸을 위한 '폭격'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한 '수술'입니다. 껍데기(세속적 힘)를 벗겨내야만 알맹이(믿음의 본질)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짓 요새가 무너진 그 빈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세워지며, 백성은 다시는 다른 신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순전한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락한 가짜 천국을 깨뜨리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진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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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보다 더 든든하게 여기는 '나만의 성읍'은 무엇입니까? 연금, 인맥, 학벌, 혹은 그동안 쌓아온 경력입니까? 그것들이 흔들릴 때 불안해하기보다 "아, 하나님이 나를 정결하게 하시는구나"라고 고백하며 믿음의 중심을 바로 잡봅시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주, 점술, 혹은 세상의 통계학적 예측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일을 내 손안에 쥐려는 복술적 태도를 버리고,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삶의 운전대를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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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하늘 보좌를 버리고 베들레헴 낮은 마구간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미가 선지자의 외침을 통해 우리의 어두운 현실 너머에 있는
위대한 소망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여전히 우리 손으로 쌓은 성벽을 자랑하고,
우리가 가진 군마와 병거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거짓 요새가 무너지고 삶의 기반이 흔들릴 때,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정결한 손길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의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참된 목자로 모시게 하옵소서.
이 거룩한 성탄탄절에 우리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이슬과 단비가 되게 하시고,
어떠한 대적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사자 같은 믿음을 허락하소서.
마침내 우리의 모든 죄악이 깊은 바다에 던져지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 안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동행하는 남은 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영원한 왕이요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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