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3:15-31 멈춤, 욕망의 폭주를 막는 거룩한 저항
안식일은 단순히 노동을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는 탐욕의 제국을 향해 ‘아니오’라고 외치며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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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평화가 쫓기듯 살아가는 여러분의 일상에 쉼표처럼 내려앉기를 빕니다.
현대인들은 ‘피로 사회’라는 거대한 수용소에 갇혀 사는 듯합니다. 멈추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우리 등을 떠밉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는 날조차 쉬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을 쥐고 정보를 검색하거나, 밀린 업무를 걱정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느헤미야 13장의 후반부는 바로 이 ‘멈춤 없는 질주’가 가져온 영적 황폐함을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유다 땅에는 다시금 ‘장사의 소음’이 거룩한 침묵을 집어삼켰습니다. 안식일인데도 사람들은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르고, 물건을 사고팔았습니다(15절). 두로 상인들까지 들어와 장사판을 벌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빨리’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그저 ‘돈을 벌지 못해 손해 보는 날’이었을 뿐입니다.
안식일(Sabbath)은 히브리어로 ‘샤바트(Shabbat)’, 즉 ‘멈춤’을 뜻합니다. 무엇을 멈추는 것입니까? 단순히 손발의 노동만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생산과 소비의 욕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일하지 않아도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시장(Market)의 논리가 성전(Temple)의 논리를 압도해 버린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반응은 격렬합니다. 그는 귀인들을 꾸짖고, 성문을 닫아걸고, 장사꾼들을 위협하여 쫓아냅니다. 누군가는 너무 과격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식일이 무너지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가 무너진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쉼이 없는 삶은 결국 인간을 부속품으로 전락시킵니다. 느헤미야는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백성들이 탐욕의 노예가 아닌 존엄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유다 사람들을 책망합니다(23절). 아이들이 유다 말을 못 하고 이방 언어만 쓰는 것을 보고 그는 통탄합니다. 이것은 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닙니다. ‘언어’는 곧 ‘정체성’입니다. 신앙의 언어, 기도의 언어를 잃어버린 다음 세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유행어와 성공의 논리에는 능통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부르는 법을 잊어버린 아이들. 느헤미야가 머리채를 잡고서라도(25절) 그들을 돌이키려 했던 것은, 영적 모국어를 상실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29절과 31절에서 거듭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 기도는 참으로 쓸쓸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혁의 길, 어쩌면 백성들에게 ‘꽉 막힌 꼰대’라고 비난받았을지도 모를 그 길 위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의 인정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세상의 박수갈채는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바벨론’ 같은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시장의 논리는 거세고, 편리함의 유혹은 달콤합니다. 하지만 이번 한 주간, 의도적인 ‘멈춤’을 시도해 보십시오. 돈이 되는 일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나의 유익보다 이웃의 평안을 먼저 생각하는 거룩한 고집을 부려보십시오.
세상 언어에 익숙해지느라 하늘의 언어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깨어 있으십시오. 때로는 느헤미야처럼 단호하게 세상의 유입을 차단하는 결단도 필요합니다. 닫아야 할 문을 닫을 때, 비로소 열리는 하늘의 문이 있습니다. 그 좁은 길을 걷는 여러분의 뒷모습을, 주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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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3:15-31 안식일의 파열음과 하나님의 끈질긴 기억
안식일과 거룩한 언약의 경계가 돈과 욕망 앞에 쉽게 무너질 때 (느 13:15, 23),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의 행위를 뛰어넘어 당신의 백성을 변함없이 기억하시며 (헤세드), 그 퇴행의 현장을 정화하는 거룩한 결단의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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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3장 15절 이하는 성벽 봉헌의 환희(12장)가 채 식기도 전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맞이한 영적인 퇴행의 적나라한 고발장입니다. 그들의 타락은 외세의 침략 같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거래, 즉 안식일을 범하고 이방인과 통혼(通婚)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느 13:15, 23).
안식일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의 역사,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셨던 구원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 효율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문법을 거부하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저항적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유다 사람들은 포도주틀을 밟고 곡식 단을 가져오며(느 13:15), 심지어 두로 사람들은 생선과 물품을 예루살렘 성안에서 팔았습니다(느 13:16). 이들은 눈앞의 작은 이익 앞에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럼없이 저버렸습니다.
오늘날 돈은 유사 전능성(類似全能性)을 가진 신처럼 작용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사람들은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는 파시스트적인 속도에 휩쓸려, 묵상과 성찰을 통해 존재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무위(無爲)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여, 성소의 거룩함이 도비야의 세간으로 채워지듯(느 13:4-5), 우리의 마음 역시 욕망의 벌판을 허둥거리며 질주하다 과녁을 빗나간 삶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체성의 오염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아스돗, 암몬,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여 그 자녀들이 유다 방언을 못하고 아스돗 방언을 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느 13:23-24). 이는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 세대에 전승하지 못하고, 구원의 서사를 잃어버린 공동체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세속적인 문화와 혼합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퇴행 앞에서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개입합니다. 그는 제사장들을 정화하고, 성문을 닫고, 심지어 지도자들을 꾸짖으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는 격렬한 행동을 취합니다(느 13:17-25, 28).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해야 한다'는 율법적 강박이나 자기 확장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옵소서"(느 13:22, 31)라는 그의 간절한 기도는, 연약하여 또다시 무너진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스스로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깊은 인애(헤세드)를 붙잡으려는 거룩한 몸부림입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욥처럼 불의한 현실 앞에서 왜? 라는 탄식을 내뱉거나,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는 순간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지(意志)를 굳게 붙잡을 수 없는 '길들지 않은 짐승'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와 허물 속에 살더라도 우리를 사랑하는 '정념(pathos)'을 지니신 분이시며, 우리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수납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순종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에 마음을 열 때,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금 거룩한 길로 돌아서게 하는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때때로 헛되고 허술할지라도, 우리를 끈질기게 붙드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정의와 사랑의 수고를 통해 주님의 꿈을 이뤄가는 순례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