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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3:1-14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거룩한 고집

신앙은 한 번의 뜨거운 결단으로 완성되는 기념비가 아니라,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고단하고도 치열한 갱신입니다.

*

주님의 은총이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의 고단한 어깨 위에, 그리고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믿음의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모든 분들의 가슴에 임하기를 빕니다.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입니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묘한 상실감에 젖습니다. 시작할 때의 그 비장했던 각오들은 다 어디로 흩어지고, 손에 잡히는 것은 희미한 후회뿐인 것 같아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시간이란 참으로 얄궂어서, 가만히 두면 저절로 성숙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정원을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지듯, 우리의 영혼도 깨어 있지 않으면 금세 세속의 먼지가 내려앉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느헤미야 13장은 바로 그 ‘무너짐의 관성’과 싸우는 한 사람의 외로운 투쟁기입니다.

느헤미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예루살렘에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전 뜰 안에 도비야라는 인물이 버젓이 방을 차지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도비야가 누구입니까? 성벽 재건을 그토록 방해하고 조롱했던 대적입니다. 그런데 제사장 엘리아십은 그와 내통하여 거룩한 성전의 곡식 창고를 비워 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적과의 동침’이 거룩한 곳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처음부터 작정하고 배신한 것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현실적으로 유력자와 잘 지내야 하지 않겠냐” 하는 타협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성전의 문턱을 넘었을 것입니다. 악(惡)은 뿔 달린 괴물의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우리 삶의 가장 내밀한 방으로 스며듭니다.

돌아온 느헤미야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는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집어 던지고, 방을 정결하게 합니다. 점잖은 체면을 따지는 이들이 보면 경박해 보일 수도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혈기가 아닙니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글에서 ‘밥벌이의 지겨움’을 이야기했지만, 느헤미야가 보여준 것은 ‘죄와의 싸움의 지겨움’을 견뎌내는 거룩한 야성이었습니다. 내 안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탐욕과 타협의 가구들을 집어 던지지 않고서는 예배가 회복될 수 없음을 그는 알았습니다.

성전이 더러워지자 레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밭으로 도망쳤고, 예배는 멈춰 섰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도미노 현상입니다. 중심이 무너지면 삶의 우선순위가 뒤집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생존’의 문제 뒤로 밀려날 때, 우리 영혼은 밭을 갈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하늘의 기쁨은 잃어버린 채 메마른 노동자가 되고 맙니다.

느헤미야는 다시 백성들을 꾸짖고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웁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가슴 저린 기도를 드립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 기도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교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개혁의 길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처절한 호소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옛날의 감격’을 파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은혜받았다고 해서 ‘오늘’의 거룩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떠내려가게 만드는 세상의 풍조에 저항해야 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의 방에 똬리를 튼 도비야의 세간살이를 끄집어내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익숙해진 나태함, 습관적인 불평, 은밀한 죄의 습관들을 밖으로 내던져야 합니다. 그 과정은 시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 끝에야 비로소 정결한 예배가 회복됩니다.

오늘 하루, 내 영혼의 성전 뜰을 살피십시오. 혹시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세상의 염려나 헛된 욕망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느헤미야의 그 거룩한 고집, 그 투박한 열정이 우리에게 필요한 때입니다. 부디 세상과 타협하며 안락하게 무너지는 길 대신, 조금은 고단하더라도 주님 보시기에 정결한 길을 선택하는 용기 있는 순례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몸부림을 반드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느헤미야 13:1-14 성전 안의 낯선 손님: 경계와 환대의 역설

인간의 욕망과 자기애는 거룩한 공간(성전)마저 사유화(私有化)하며 영적인 퇴행을 낳지만, 하나님은 변치 않는 인애(헤세드)로 그 오염된 자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시고 정화하시는 은총의 심판자이시다.

*

느헤미야 13장의 본문은 성벽 재건이라는 영광스러운 노작 끝에 맞이한 공동체의 씁쓸한 퇴행을 담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을 읽고 이방인(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배제하며 거룩함을 지키려 했으나 (13:1-3), 정작 내부의 최고 지도자였던 엘리아십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 창고를 대적 도비야에게 내어주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13:4-5).

성전의 방은 마땅히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와 봉헌물이 보관되어야 할 거룩한 유보지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집을 사적인 ‘별장’처럼 전락시켰고, 이는 곧 권력의 독(毒) 이 거룩을 침범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미명 아래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짓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들을 수단으로 삼는 사회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멀어집니다. 영혼이 몸을 이끌어야 할 때 (영의 사람) 육체적 본능(욕망)에 충실하느라 영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대제사장은 보여준 것입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여, 보십시오. 아무리 성벽을 쌓고 율법을 지키며 경건의 삶을 다짐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옛사람의 찌꺼기(욕망과 이기심)에 이끌려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 실패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쉬이 상하는 베 띠'와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가면 결국 썩어서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절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더러워진 성전 창고에서 도비야의 세간을 밖으로 내던지고 정결하게 한 행동(13:7-9)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 이전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현실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가 분연히 일어나 더러움을 숙청하고, 레위 사람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직무를 감당하게 한 힘은(13:10-14), 결국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안일에 길들여져 나태함에 빠지거나, 혹은 세상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진 이들을 아낄 줄 모르는 마음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보다 저 낮은 곳으로 인도하는 길을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의 완벽한 행위를 요구하기보다, 우리의 한계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 때, 그 은혜가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하라고 채찍질하기보다,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소식이 되기를 바라시며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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